문훈숙 단장 “한국무용할 뻔… 상모돌리기도 잘했어요” [나의 삶 나의 길]

이강은 2024. 5. 28.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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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초 직업발레단으로 창단 40돌 맞은 유니버설발레단의 ‘산증인’
창단 멤버로 합류해 수석무용수로 50여 작품에서 주역…은퇴 후 단장 맡아 발레단 중흥 이끌어
“‘세계 정상’ 목표 어느 정도 이뤄 감격…설립자 문선명·한학자 총재의 ‘팔길이 원칙’ 지원 덕분”
유니버설발레단, 지난 40년간 한국 발레계의 눈부신 발전에 큰 영향 끼쳐
‘국내 최초’ 기록 잇따라 쓰며 19차례 해외 순회공연으로 ‘발레 한류’ 개척에도 앞장
문 단장, “유니버설발레단의 역사는 한국 발레의 성장과 궤를 같이 해”
‘천상의 예술로 세상을 아름답게’ 비전…“창작발레 ‘심청’, ‘춘향’ 해외에 널리 퍼지길”
지난 10∼12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은 발레 애호가들의 발길이 줄을 이었다. 한국 최초의 민간 직업발레단인 유니버설발레단이 창단 40돌을 기념해 5차례에 걸쳐 정성스레 차린 생일상을 맛보기 위해서다. 발레단은 그동안 성원해준 관객들에게 보답하는 차원으로 케네스 맥밀란의 대작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을 8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올렸다. 줄리엣 역 무용수 캐스팅에도 공을 들였다. 세계적 발레단인 아메리칸발레시어터(ABT)의 동양인 최초 수석무용수 서희를 필두로 무용계 최고 권위의 ‘브누아 드 라 당스’ 지난해 수상자인 강미선 유니버설발레단 수석무용수, 깜짝 발탁한 이유림 유니버설발레단 솔리스트를 내세웠다. 세 발레리나는 국내외 주요 발레단에서 활약하는 무용수들의 산실인 선화예술중학교 선후배이기도 하다.   
창단 40돌을 맞은 유니버설발레단을 이끌고 있는 문훈숙 단장이 지난 23일 서울 광진구 유니버설아트센터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문 단장은 1984년 5월12일 발레단 창단 당시 수석무용수로 시작해 2001년 토슈즈를 벗은 이후 단장직에 전념하고 있는 유니버설발레단 역사의 산증인이다. 남정탁 기자
커튼콜 때마다 우레와 같은 갈채가 쏟아졌다. 발레단의 40주년 생일을 축하해주는 의미가 담긴 듯했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한국을 대표하는 민간발레단으로 우뚝 서고 우리 발레의 국제적 위상을 드높이는 놀라운 성과를 이뤄냈기 때문이다.   

이번 생일상을 치우면서 누구보다 감회가 남다른 이가 있었으니, 바로 문훈숙(61) 유니버설발레단 단장이다. 1984년 5월12일 창단 당시 수석무용수로 시작한 그는 2001년 토슈즈를 벗은 뒤 단장직에 전념했다. 발레단 역사의 산증인인 셈이다. 

23일 서울 광진구 유니버설발레단 집무실에서 만난 문 단장은 ”한국이 발레의 불모지였던 시절 창단하고 무용수도 10여명에 불과했지만 ‘세계 정상’을 목표로 삼았던 발레단이었다”며 “그 목표가 어느 정도 이뤄진 것 같아 감격스럽다. ‘한국 발레의 발전과 발레사는 유니버설발레단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고 말해주시는 분들을 보면 정말 감사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예술은 인류 봉사의 길’이라는 설립자 문선명·한학자 총재의 뜻에 따라 창단된 유니버설발레단은 초창기부터 한국 발레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국과 러시아 등 발레 선진국의 수준급 지도자를 데려와 발레 교육 선진화의 길을 열었고, 조지 발란신, 존 크랑코, 케네스 맥밀란, 나초 두아토, 윌리엄 포사이드 등 거장 안무가들에게서 국내 최초로 공연권을 허가 받으며 작품 수준 제고와 다양화에 크게 기여했다. 1985년 국내 발레단 최초로 해외(일본, 중국, 대만) 순회공연을 시작하고 1998년에는 창작 발레 ‘심청’을 들고 역시 최초로 북미(미국, 캐나다) 공연에 나서는 등 2019년까지 19차례나 해외 투어를 하면서 ‘발레 한류’ 개척에도 앞장섰다.
문훈숙 유니버설발레단 단장. 남정탁 기자
아울러 발레단 모체인 선화예술중고등학교는 물론 직접 운영하는 유니버설·줄리아 발레아카데미를 통해 많은 발레 인재를 길러냈다. 이 중 강수진 국립발레단 단장(전 슈투트가르트발레단 수석무용수)과 이상은(영국 국립발레단 〃), 서희·안주원(ABT〃), 강효정(비엔나국립발레단 〃), 최영규(네덜란드 국립발레단 〃), 김주원(전 국립발레단 〃), 황혜민·엄재용(전 유니버설발레단 〃) 등 국내외 정상급 발레 스타가 된 무용수도 상당하다. 
문 단장은 “우리 발레단의 역사는 한국 발레의 성장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자신있게 말했다. “사실 민간에서 (이 정도 규모의) 발레단을 40년간 운영해온 사례는 유니버설발레단 빼고 전 세계 어디에도 없을 겁니다. 두 분 설립자가 ‘팔길이 원칙’으로 아무런 간섭없이 순수하게 지원해주신 덕분이에요. 발레단의 좋은 기반을 이어가고 다음 세대에 잘 물려주는 건 제 책임입니다.” 다음은 일문일답.
선화예중 시절 문훈숙 단장(앞줄 오른쪽 두 번째)이 동료 학생들과 애드리언 델라스(오른쪽) 교사의 지도를 받고 있는 모습. 유니버설발레단 제공
―발레는 언제, 어떻게 시작하게 된 건가.

“미국에서 태어나 7살 때 취미로 발레를 시작했다. 그러다 리틀엔젤스예술단(우리 전통 예술로 전 세계에 한국을 알리고 평화의 정신을 퍼트리기 위해 1962년 창단)을 이끌던 아버지(박보희 전 한국문화재단 이사장)가 ‘딸 셋 중 한 명은 해야 되지 않겠냐’ 해서 둘째인 내가 리틀엔젤스 단원이 됐다. 전통 무용을 배우고 예술단 해외 순회 공연 다니러 10살 때 한국으로 유학왔다. 상모돌리기도 잘 했는데 지금도 하라면 할 수 있다.(웃음)

이후 1976년 선화예중에 입학했는데 발레반이 새로 생겼다. 그때는 발레 유망주가 없어 미국에서 온 애드리언 델라스 선생님이 무용부 학생들 중에서 뽑아야 했다. 어렸을 적 경험으로 발레 시범 동작을 해보였고 그렇게 발레를 다시 하게 돼 여기까지 왔다. 델라스 선생님을 못 만났으면 한국무용하는 사람이 됐을 거다.(웃음)”

―몇 년 후 발레 선진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 계기는.

“1978년 세종문화회관 개관 때 영국 로열발레단이 내한공연을 했다. 델라스 선생님이 발레단 관계자를 만나 나 포함 제자 7명이 로열발레학교 입학 오디션을 볼 수 있도록 했다. 발레를 거의 6년 배워야 들어갈 수 있는 학교인데 3년 밖에 안 된 우리 모두 합격했다. 그만큼 델라스 선생님의 지도력이 뛰어났다. 고1 때 선배 언니 2명과 함께 영국으로 갔지만 외국인 반을 따로 둘 만큼 차별이 심해 마음의 상처가 컸다. 급기야 2년째에 ‘스트레스(피로·미세) 골절’까지 오고 얼굴과 체격 모두 예쁜 외국 애들 틈에 있으니 기가 죽더라. 발레 자체가 나의 내성적인 성격과도 안 맞는 것 같아 관두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그동안 투입한 시간과 노력이 아깝지 않냐. 다른 학교에서 한번 더 해보고 마음이 안 바뀌면 그때 관둬라’고 하셔서 모나코 왕립발레학교로 옮겼다. 그곳은 개방적인 분위기였고, 동양 문화를 좋아했던 교장은 첫 한국인 학생에다 골절로 점프도 잘 못하는 나를 극진히 보살피며 가르쳤다. 이후 김인희(전 서울발레시어터 단장), 허용순(재독 안무가), 강수진 등이 뒤따라 모나코 발레학교로 왔다.”    
문훈숙 단장이 선화예중 시절 애드리언 델라스 교사에게 개인 지도를 받고 있는 모습. 유니버설발레단 제공
―유니버설발레단과의 인연은.

“졸업 후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 입단하고 싶었는데 오디션 일정이 안 맞아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 워싱턴발레단에서 2년가량 활동하던 중 유니버설발레단이 창단됐다. 선화예중고에서 배출한 무용수들이 계속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델라스 선생님이 초대 예술감독을 맡았는데 당장 수석무용수가 급하다며 나를 호출했다. 수석무용수를 하기에는 많이 부족했지만 사정이 어려웠던 시절이라 어쩔 수 없었다. 델라스 선생님 지도 아래 단원 모두가 똘똘 뭉쳐 피나도록 연습하면서 양질의 작품을 무대에 올리려고 애썼다.” 

―특히 기억에 남는 일화를 소개한다면.

“발레단이 1992년 ‘백조의 호수’를 초연하기 위해 마린스키발레단 올레그 비노그라도프 예술감독에게 연출을 부탁했다. 이 작품은 발레단의 수준을 가늠하는 잣대였다. 처음엔 비노그라도프가 ‘너희는 아직 그 수준이 안 된다’며 거절했다. 간절하게 매달려 승낙을 받아낸 뒤 6개월 동안 맹연습을 해 성공적으로 공연하자 그도 놀라더라. ‘한국 사람들은 한다면 하는구나’라고. 이후 ‘잠자는 숲속의 미녀’부터 ‘지젤’까지 2년마다 마린스키 작품을 올리며 발레단이 크게 도약했다. 

1998년 한국 발레 최초로 북미 투어를 할 때 첫 뉴욕 공연에서 창작발레 ‘심청’으로 세계적인 발레 공연 기획자 폴 질라드에게 인정받은 순간도 잊을 수 없다. 앞서 2년 전 뉴욕 공연을 추진하면서 도움을 부탁할 때는 ‘이름도 못 들어본 단체’라며 퇴짜를 놨던 사람이 ‘심청’을 보곤 감동 받아 울더라. 이후 우리의 모든 해외공연을 도맡아줬다.”
1984년 유니버설발레단 창단 공연인 ‘신데렐라’ 무대에서 주역을 맡은 문훈숙이 패트릭 비셀과 파드 되(2인무)를 펼치고 있다. 유니버설발레단 제공
문 단장은 창단 공연 ‘신데렐라’에서 신데렐라를 맡은 이후 2001년 무대를 떠날 때까지 ‘백조의 호수’, ‘지젤’, ‘심청’, ‘알레그로 브리앙뜨’ 등 50여 편의 고전·창작·단막발레에서 주역으로 활약한 스타 발레리나였다. 1989년에는 세계적인 러시아 마린스키발레단의 ‘지젤’ 공연에 동양인 최초로 초청돼 지젤을 연기하며 7차례나 커튼콜을 받기도 했다. 

―토슈즈를 벗고 은퇴할 때 기분이 어땠고,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을 꼽는다면.

“무용수는 대개 40살 전후로 힘이 달리기 시작하는데 그때 마침 발가락 부상으로 수술을 했다. 이듬해 올린 ‘로미오와 줄리엣’이 맥밀란 버전이었으면 은퇴 안 하고 기를 쓰고 했겠지만 다른 안무가의 작품이었다. ‘여기까지만 하라는 하늘의 뜻인가 보다. 후배들한테 물려줄 때가 됐구나’란 생각이 들더라. 무대는 용서가 없는 곳이고 변명이 통하지 않는 곳이어서다. 

참여했던 모든 작품이 소중해서 딱 하나를 꼽기 어렵지만, 지금 떠오르는 건 조지 발란신의 단막 ‘라 손남불라’(몽유병 환자인 귀부인과 낭만적인 시인의 아름다운 2인무로 유명한 작품)다. 내가 했던 공연 영상들을 보면 마음에 드는 게 별로 없는데 그 옛날(1991년) ‘라 손남불라’ 영상을 보곤 ‘아 이건 잘했구나’ 싶었다.”
문훈숙 단장이 주역으로 무대에 섰던 작품 중 스스로에게 가장 후한 점수를 준 조지 발란신(1904∼1983) 안무의 단막 ‘라 손남불라’ 공연(1991년)에서 열연하는 모습. 유니버설발레단 제공
―은퇴 전 6년가량 수석무용수와 단장을 겸하다 오롯이 단장만 맡게 된 후 어떤 각오를 다졌나.

“단원들과 오랫동안 동료였던 터라 본격적으로 단장직에 적응하는 데만 3년이 걸렸다. 그때부터 빈 객석이 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좋은 작품을 공연하는데 왜 표가 안 팔리는 건지 의아했다. 무용수 때는 춤에만 집중하느라 그 이유를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 최고경영자(CEO) 모임 등 사회 활동을 하면서 만난 사람 10명 중 9명이 ‘발레는 지루하고 대사가 없어 어렵다’, ‘비싼 티켓을 사서 갔는데 존다’고 해 깜짝 놀랐다. 그래서 ‘관객이 왜 안 오시지’가 아니라 ‘우리가 먼저 손을 내밀고 다가가야 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발레단 안팎의 반대와 우려에도 불구하고 3년 가까이 고민하고 준비한 끝에 ‘해설이 있는 발레 공연’, ‘발레 토크 콘서트’ 등을 열었는데 관객 반응이 좋았다. 그야말로 ‘발레 전도사’가 됐다.(웃음)” 

―‘천상의 예술로 세상을 아름답게’란 비전을 내세운 이유는.

“해외에서도 어느 정도 인정 받는 수준의 발레단이 되니 예술의 본질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예술은 세상의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고 삶에 활력과 영감을 줘서 세상이 더 아름다워지도록 하는 것이라고 본다. 비전은 그런 예술의 본질에 충실한 발레단이 되자는 취지다. 같은 맥락에서 항상 단원들에게 겸손한 자세와 바른 인품을 유지하도록 당부한다. 예술은 (예술가의) 내면을 외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 천상의 예술로 세상을 아름답게 하려면 무용수의 내면부터 아름다워야 하니까.”
문훈숙 유니버설발레단 단장. 남정탁 기자
―몇 년 전 구조조정으로 단원 3분의 1이 줄 만큼 경영 환경이 녹록하지 않은데.

“불혹의 나이에 맞게 (재정)자립도를 더 높여야 하는데 쉽지 않은 상황이다. 민간발레단의 활성화와 발레 인프라 구축 등을 통해 한국 발레가 선순환 구조로 지속 발전하도록 공공 지원이 절실하다. 아울러 양질의 작품을 계속 선보이고 발레단의 자산이 공적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유니버설발레단이 좋은 파트너십을 확보하는 것도 중요하다. 도움을 주실 수 있는 기업 등 후원자 분들은 정말 대환영이다.”

―꼭 이루고 싶은 목표는. ‘문훈숙 이후 유니버설발레단’은 어떤 모습이길 바라나.

“우리가 ‘백조의 호수’ 같은 해외 작품을 사 오듯이 창작 발레 ‘춘향’, ‘심청’ 등을 해외 발레단에서 사 가 우리 작품이 전 세계에 퍼졌으면 한다. 젊은 차세대 리더들이 발레단의 전통과 역사를 이어가면서 발레단을 새로운 감각으로 잘 이끄는 모습을 보는 것도 꿈이다. ‘내가 단장하던 시절보다 훨씬 잘 하네, 손 놓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문훈숙 유니버설발레단 단장은… ●1963년 미국 워싱턴D.C. 출생 ●선화예중, 영국 로열발레학교, 모나코 왕립발레학교 ●미국 워싱턴발레단 솔리스트 ●유니버설발레단 창립멤버(수석무용수) ●러시아 모스크바 국립예술대 무용예술학 명예박사 ●유니버설발레단장

이강은 선임기자 kele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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