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퍼홀릭~당근 맛에 빠지다 [맛있는 중고 이야기]
‘에르메스 트윌리 스카프를 내놓습니다. 구입처는 A면세점, 풀박스. 가방 손잡이에 감아서 사용하다가 스카프로 쓰실 분께 넘기고 싶어요. 중고거래니 민감한 분은 지나가주세요.’
“당근,이세요?” 광화문 역 출구에서 나의 첫 번째 당근을 가슴에 품고 이 말을 할 때 얼마나 떨렸던지요. 나와 지구의 미래에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기념비적 당근이자, 사고 또 사온 지난 쇼핑 생활에 (일단) 안녕을 고한 날이었거든요.
다들 아시겠지만, 당근은 우리나라 대표 중고거래앱으로, 한 달에 한 번 이상 당근을 방문하는 사람(MAU)이 1800만~2000만명에 이른다고 해요. 애초엔 ‘당신 근처에서 벌어지는 일’의 줄임말로, 우리 주변에 언제나 있어 왔지만, 흙 속에 묻혀 있어 미처 보지 못했던 멋진 당근들을 이웃들과 나누는 곳이 바로 ‘당근 유니버스’인 것이죠.
돌아보면, 20세기의 맥시멀 쇼퍼홀릭이었던 저는 일찍이 중고거래의 세계에 들어와있었어요. 시작은 서울 압구정동의 중고명품점이었는데, 젊은 사장님을 인터뷰하면서 이 시장, 잘되겠구나 라는 감이 왔죠. 그 시절 벼룩시장도 인기였어요. 동네 단위 무가지에 상품을 광고처럼 올려서 거래하는 원조 중고시장으로, 피아노랑 월세 매물이 많았던 기억이 있어요.
그렇다면, 21세기의 당근이란 동네 벼룩시장과 고가품을 거래하는 중고명품점을 합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물론 많이 다르죠. 당근과 벼룩이 다르듯이요.
당근 이전 중고거래의 제1 규칙은 ‘내가 누군지 알려고 하지 말 것’이었어요. 예물을 중고상에 넘겼다든지, 모서리가 까진 중고 샤넬백을 샀다는 이야기 같은 건 누구도 하고 싶지 않았잖아요. 중고게임기를 거래하고 입금했더니 벽돌이 왔다는 사건을 확률적 위험처럼 받아들였죠.
하지만 요즘 중고거래는 내가 누구인지 보여주는 데서 시작해요. 당근을 하려면 나의 계정을 만들고, 팔려는 물건 사진을 찍어서 올리고, 물건의 스토리도 올려야 해요. IT강국에서, 배달의 민족이, 5000원짜리 중고 물건을 직거래하며 쏟아붓는 열정은 윤리적 소비나 물건 정리로는 이해할 수 없어요.
진짜 당근의 맛은 재미거든요. 인스타그램이 나를 아는 사람들에게 회식 온 레스토랑이나 친구의 선글라스를 나인 척 과시하는 맛이 있다면 당근은 익명의 계정에 ‘내돈내산’을 평가받는 스릴이 있어요. 나의 취향과 감각, 지식과 매너는 그 자체로 가장 정직한 SNS인 것이죠. 당근은 댓글, 좋아요, 팔로잉 등 SNS의 장치들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매너온도’라는 성적표도 공개합니다. 이는 ‘사용자들로부터 받은 칭찬, 후기, 비매너, 운영자 제재 등을 종합’한 점수인데 거래를 잘하면 온도가 올라가지만, 수상한 물건과 비매너 신고를 받은 계정은 인간의 온도 이하로 추락해서 거래 기피 대상이 되죠. 종종 ‘저는 재미로 당근합니다’라는 글을 보곤 하는데, 당근의 성공을 설명하는데 재미를 빼놓을 수 없어요.
중고거래는 엄청나게 힙(hip)한 문화가 되었어요. 당근과 크림, 솔드아웃 등 중고거래플랫폼들이 브랜딩에 성공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당근은 친환경적 실천이며, 공유와 나눔의 가치를 알고, 믿을만한 이웃들의 커뮤니티로 브랜딩하는데 성공한 것 같아요. 당근이 중고거래의 나이키가 됐다고 해야할까요. 애널리스트들은 이를 ‘신용자산’이라고 부르더군요.
중고거래앱의 성장은 전세계적 현상이에요. 특히 디지털과 친환경, 그리고 호기심 유전자를 가진 MZ세대에게 중요한 쇼핑의 방식이죠.
이제 당근 4년 차, 그동안 저의 모든 당근들은 제각각 다른 맛의 경험이 되었어요. 스카프를 거래한 첫 구매자의 토끼같은 인상도 기억나요. 입맛 쓰고 물컹한 당근들도 없진 않았지만 당근이 있으면 채찍(?)도 있는 법! 오늘도 주홍색의 명랑한 알림은 저를 설레게 합니다.
마담캐롯 @madame_carrot 당근과 고양이, 글쓰기를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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