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전 ‘새마을 정신’ 이념팔이 연극, 섬뜩한 재연
윤한솔 연출 ”이념팔이 연극 지금도 통할까 궁금했다”
1973년 11월 전국새마을지도자대회에서 경북 월성군 김명순씨의 모범 사례가 발표됐다. 극작가 차범석은(1924~2006) 이를 모델로 희곡 ‘활화산’을 썼고, 국립극장이 이듬해 연극으로 만들었다. 이해랑 연출에 장민호, 백성희, 신구, 손숙 등 일급 배우들이 주연했다. 활화산처럼 솟구치는 새마을 의욕을 고취하려는 이 선전용 연극은 녹화본이 텔레비전으로 방영됐고, 전국 15개 도시 순회공연으로 이어졌다. 이근삼, 하유상, 천승세, 오태석 등 내로라하는 극작가들 역시 박정희 정권의 시책에 따른 ‘새마을 연극’을 썼다고 해도, 한국의 대표적인 사실주의 극작가 차범석에게 이 작품은 하나의 흑역사가 아닐 수 없다.
차범석이 남긴 희곡은 64편에 이른다. 차범석 탄생 100돌을 맞아 국립극단으로부터 작품을 의뢰받은 윤한솔 연출은 그 많은 작품 중에 왜 하필 ‘활화산’을 골랐을까. “정권의 사업을 선전하기 위해 만든 ‘이념팔이’ 프로파간다 공연이 2024년에도 먹힐지 궁금했다”는 게 윤한솔 연출의 대답이다. 그는 “작품을 고르고 나서야 프로파간다 희곡이란 사실을 알고 뜨끔했지만 다른 작품을 다 읽어도 그만큼 재미 있는 작품이 없었다”며 “주변 학자들과 차범석재단에도 우려를 나타냈고, 어떤 분은 작가에게 오명을 남긴 작품인데 굳이 왜 재연하느냐며 분개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차범석 전집 10권을 쌓아놓고 읽어가던 연출가에겐 ‘여성이 변화의 주체로 등장하는 희곡을 1970년대에 썼다는 점’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는 “당대 정치와 양반 가문의 구습에 대한 비판이 담긴 점도 흥미롭게 다가왔다”고 했다.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가세가 기울었지만 양반 집안이란 허세와 허울에 찌든 집의 며느리 정숙이 주인공. 철부지 남편이 또다시 축협 조합장 선거에 낙선하자 정숙이 집안의 모든 결정권을 틀어쥐고 돼지를 키워 마침내 잘살게 된다는 이야기. 정권 선전용으로 만든 도구화된 ‘새마을 연극’ 희곡을 토씨 하나 고치지 않고 원작 그대로 살려냈는데, 초연 이후 50년이 흐른 지금의 관객도 불편함 없이 연극을 관람할 수 있을까. 윤 연출은 “작품을 수정하지 않고도 이 시대 관객이 공명하게 할 방법이 있다고 생각했다”며 “이미 쓰인 글로 관객을 납득시키는 게 연출가의 몫”이라고 했다.
당차고 주체적인 젊은 여성이 온갖 구습과 시대착오에 맞서 가부장제를 타파하는 원작의 뼈대는 지금도 울림이 있다. 봉건과 근대의 경계에 있던 1970년대 농촌 풍경과 시대상을 생생한 입말로 화석처럼 담아낸 점도 눈에 띈다. 시도 때도 없이 소리를 질러대는 남자들의 모습에서 그 시대에 만연했던 폭력성이 묻어난다. 느닷없이 튀어나오는 ‘하면 된다’, ‘잘살아보세’ 투의 대사가 관변 ‘새마을 연극’의 한계를 뚜렷이 드러내는데, 이조차 지금의 관객에겐 웃음을 유발하는 유머코드로 작동한다.
윤한솔 연출은 각색도, 윤색도 하지 않은 대신, 기발한 무대세트와 다양한 연극적 장치로 원작을 의외의 방향으로 비튼다. 후반부는 무대 중심에 버티고 선 거대한 돼지 모형이 압도한다. 집단주의적 광기를 드러내는 마지막 장면은 섬뜩함을 자아내는 공포물에 가깝다. 사람들은 모두 녹색 옷을 입고, 돼지도 녹색으로 변한 ‘녹색 세상’에서 정숙은 “우리는 오랜 세월 땅속에서 이글거리다가 솟구치는 활화산”이라며 “우리가 일어서야 한다”고 열변을 토해낸다.
이 그로테스크한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윤 연출은 히틀러의 연설을 담은 다큐멘터리까지 연구했다. 윤 연출은 “히틀러 연설을 보면, 경제를 발전시키고 거리를 깨끗하게 하자는 얘기를 하다가 유대인을 몰아내자는 결론으로 이어지는데, 정숙의 마지막 연설도 이성적 판단을 마비시키는 점에서 전개되는 양상이 비슷하다”고 말했다. 어쩌면 원작자 차범석이 의도했던 것과 반대의 결론을 도출한 셈이다. 다음 달 17일까지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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