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총선, 의무 군복무… 경제 망친 영국 총리의 묘수? [마켓톡톡]
OECD “내년 영국 성장률 G7 꼴찌”
경기침체에 성장 전망 어두워지자
수낵 총리 ‘조기 총선’ 돌발행동
재무장관 등 내각에도 당일 알려
총선승부수 $32억 소요 의무복무
보수당 총리 ‘경제 잔혹사’ 반복 우려
도박을 안 한다던 영국 총리가 일생일대의 내기에 나섰다. 리시 수낵 영국 총리는 올해 2월 한 TV쇼 진행자가 르완다 난민 추방을 두고 내기를 제안하자 "나는 베팅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3개월 후, 수낵 총리는 자신과 내각, 보수당의 집권을 모두 걸고 '조기 총선'이라는 내기에 나섰다. 총리는 영국 경제의 초라한 미래를 딛고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리시 수낵 영국 총리는 지난 5월 22일 "찰스 3세 국왕에게 의회 해산을 요청했다"며 "7월 4일에 총선을 치르겠다"고 발표했다. 의원내각제인 영국에서 집권당의 지지율이 야당보다 20%포인트나 뒤처진 상황에서 총리가 나서 조기 총선을 시도하는 일은 드물다. 영국 텔레그래프의 5월 20일 설문 조사에 따르면 집권 보수당 지지율은 22.9%, 야당인 노동당 지지율은 44.2%다.
수낵 내각의 주요 장관들도 총리의 결정을 당일 아침에야 들었다. 블룸버그는 5월 25일 "수낵 총리가 주요 장관들에게도 조기 총선 결정을 한 시간 전에 알렸다"며 "제레미 헌트 재무장관도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보도했다.
미국 정치 전문매체 폴리티코는 5월 26일 "영국 정치권은 경제 상황이 개선될 시간을 벌고, 20년래 최고 수준인 금리를 내릴 수 있는 10~11월을 조기 총선 시기로 예상하고 있었다"며 의아해했다.
수낵 총리는 경제가 지금도 안 좋지만, 앞으로는 더 안 좋아질 것으로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가디언은 26일 "총리가 경제 회복이라는 희망이 사라지고 있는 것을 알아챈 것"이라고 보도했다. 여기에 불을 붙인 게 국제기구의 경제 전망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영국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전망치로 0.7%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0.4%를 제시했다. IMF는 지난 5월 21일 "영국이 최근 사회보장 기여금을 낮추는 행태로 감세를 추진하면, 국가 부채가 증가할 것"이라며 "사회보장 세율을 내리면 영국 GDP의 0.5%에 해당하는 비용이 필요하다"고 경고했다.
OECD도 지난 5월 2일 6개월 전 발표한 경제 전망을 수정하며 "영국은 2025년 G7 국가 중에서 최악의 성장률을 기록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영국 경제가 지난해 역성장해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독일, 20여년간 디플레이션에 빠졌던 일본보다 미래가 어둡다는 뜻이다. OECD는 "영국은 서비스 부문의 지속적인 물가 상승과 숙련 인력 부족으로 성장률이 둔화하고, 기준금리 인하 시점도 현재 예상보다 늦어질 것"이라고 밝혔다.
수낵 총리의 이번 돌발행동은 2019년 보수당 집권 이후 5년 내내 이어지는 경제 실정失政의 연장선이다. 보리스 존슨 전 총리는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브렉시트‧Brexit)를 밀어붙여 관철했고, 리즈 트러스는 재원 없는 감세정책으로 외환시장과 채권시장을 혼란에 빠뜨렸다.
수낵 집권기인 지난해 하반기는 경제가 잇달아 역성장했다. 영국 GDP 성장률은 지난해 3분기 -0.1%, 4분기 -0.3%였다. 영국의 2023년 GDP 성장률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최악인 0.1%였다.
그렇다면 수낵 총리의 '조기 총선 승부수'는 무엇일까. 국가복무제도(mandatory National Service)다. 징병제와 비슷하지만, 군사훈련을 강요하지 않고, 처벌하지 않는다는 차이가 있다. 수낵은 25일 "18세 이상 청년은 앞으로 12개월간 정규군으로 병역을 이행하거나 1년 동안 한달에 한번씩 지역사회 봉사활동을 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 제도의 가장 큰 모순은 수낵 총리가 과거의 자신과 싸워야 한다는 점이다. 지난 1월 패트릭 샌더스 영국 육군 참모총장은 "스웨덴에서 시행하는 '국가복무제도'를 도입해 시민군 수만명을 동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수낵 총리는 당시 육군 참모총장을 질책하며 "1960년에 폐지한 징병제로 복귀하지 않겠다"고 말한 바 있다.
수낵 총리는 모순을 무릅쓰고 사실상의 의무복무제도를 통해서 보수당의 가치인 '안보'를 강조하고, 핵심지지층의 결집을 꾀하고 있다. 여론조사기관 유고브(YouGov)의 지난해 9월 설문조사에 따르면 영국인 53.0%가 1년 의무복무제도를 반대했다(찬성 37.0%). 반면 국가복무제도가 의무가 아닌 선택적일 경우 찬성률은 57.0%였다(온워드 여론 조사).
국가복무제도 시행에 필요한 25억 파운드(미화 32억 달러) 재원을 어떻게 마련하련하느냐도 문제다. 수낵 총리는 조세회피 및 탈세 단속에서 10억 파운드, 브렉시트 이후 EU에서 받은 자금에서 15억 파운드를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보수당이 재집권하면 내년에 시행하는 국가복무제도 재원을 앞으로 벌어서 충당하겠다는 얘기다.
수낵 총리의 무모해 보이는 이 도박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그의 전 직장이 헤지펀드였던 만큼 승부에 익숙해 보이기도 한다. 수낵 총리는 미국 투자은행 골드만삭스에서 3년 동안 애널리스트로 활동했고, 스탠퍼드대 MBA 과정을 밟았다.
영국 대형 헤지펀드인 TCI펀드에 2004년 입사해 2년 만에 파트너가 된 수낵 총리는 타고난 승부사처럼 보인다. 하지만 가디언은 지난 2020년 "리시 수낵이 정치에 입문하기 전 런던 금융계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자세히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보도했다.
수낵 총리는 2004년 인도의 아웃소싱 대기업 인포시스 창업자의 딸인 아크샤타 무르티를 만났고, 2009년 결혼했다. 수낵 총리 부부는 2024년 기준 영국 국왕인 찰스 3세만큼 부유하다. 총리 부부의 재산은 6억5100만 파운드(미화 8억1500만 달러)로 추정되는데, 찰스 3세의 개인 투자 자산은 6억5330만 파운드다. 수낵 총리를 타고난 승부사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한정연 더스쿠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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