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김정난의 다채로운 얼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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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먼센스> 6월호 촬영을 위해 화려한 옷이 함께했어요.
화려한 옷을 좋아하지만 사실 평소에는 입을 일이 거의 없어요. 그래서 화보 촬영이 즐거운 것 같아요.
tvN 드라마 <눈물의 여왕>에서도 레오퍼드 프린트가 강렬했죠.(웃음)
괜히 더 힘이 나는 것 같은 옷이었어요. ‘범자’의 강렬한 캐릭터를 드러내기 위해 준비한 옷이었고요. 어떤 옷을 입느냐에 따라 태도는 물론 마음가짐도 많이 달라지기 때문에 캐릭터를 준비할 때 의상도 많이 신경 쓸 수밖에 없죠. 범자는 걱정도 정말 많이 했던 캐릭터였어요. 그 정도까지 ‘센캐’는 처음이었고, 감정의 기복이 큰 데다 자칫하면 비호감이 될 수 있는 인물이었어요. 그런 범자를 호감형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감도 컸어요. 촬영에 들어가기 전까지 걱정하느라 잠도 제대로 잘 수 없다고 작가와 PD에게 하소연도 엄청 많이 했어요. 그렇게 걱정이 많았는데도 의상을 입고, 헤어스타일을 완성하고, 메이크업을 세게 하고 카메라 앞에 서니 그 인물이 나오더라고요.
헤어와 메이크업, 스타일링의 도움을 받지만 텍스트로 적힌 인물을 살아 있게 하는 건 결국 배우의 몫이기도 해요.
생명을 불어넣는 거죠. 대본을 통해 만난 범자는 자신의 감정에 따라 직진하는 성격이지만 동시에 굉장히 인간적이에요. 보는 사람은 그냥 지나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표정이나 억양, 호흡 같은 미세한 것들에도 인간적인 면을 부여하려고 많이 노력했어요.
‘범자 고모’가 조카의 시한부를 알게 된 후 꼭 안아주며 위로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어요.
우는 장면이 그렇게 많은 줄 몰랐어요. 거의 매회 울었죠. 우는 장면이 많았던 만큼 신경도 많이 썼어요. 계속 징징거리면 그것 역시 보기 싫으니까요. 슬프기만 한 장면이 아니라 범자의 눈물은 어느 정도 재밌기도 해야 했기 때문에 더 고민이 많았어요.
배역마다 지닌 창작의 고통을 어떻게 이겨내나요?
전 아미(BTS 팬덤)예요. BTS의 ‘Dionysus’라는 곡에 이런 가사가 나와요. “쭉 들이켜, 창작의 고통.” 그 노래를 들으면서 생각했죠. ‘아, 창작의 고통은 쭉 들이켜고 그냥 취하면 되는 거구나.’ 뮤지션, 배우, 화가 할 것 없이 예술가라면 누구나 겪는 고통이니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이겨내기보다 그냥 ‘팔자려니’ 하는 거죠.
예술이란 정답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 자신이 잘하고 있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지더라도 확답을 얻을 수 없는 일이기도 해요. 자신의 연기에 대한 확신은 무엇으로부터 생기는 걸까요?
지금까지 연기해온 세월을 믿어요. 오랜 시간 연기하면서 많은 데이터가 쌓이고 노하우 역시 생겼죠. 당장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더라도 카메라가 돌아가면 번뜩일 때도 있어요. 촬영 전날까지만 해도 목소리 톤이 제대로 안 잡히다가 막상 촬영에 들어가면 제가 원하던 목소리가 나올 때도 있고요. 지금까지 열심히 해온 시간을 믿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고 생각해요.
<눈물의 여왕>은 종방연을 두 번 했어요. 촬영을 마친 지 오래됐음에도 여전히 그 현장을 떠올릴 일도 많았을 것 같고요.
현장 분위기가 더할 나위 없이 좋았어요. 과거와 비교했을 때 현장 환경이 많이 좋아졌다는 것도 절감했고요. 어렸을 때는 현장 상황이 열악했기 때문에 그렇게 꿈꿔왔던 배우 생활을 오래 못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어요. 매니저도 없이 직접 운전해 현장에 가고, 의상도 직접 챙겨 다니던 시절이 문득 생각나더라고요. 절 도와주는 스태프가 있고, 대기실도 정말 잘돼 있고, 추우면 담요를 덮어주고 더우면 핫팩을 챙겨주니까 옛날 생각이 문득문득 떠올랐어요. 힘들었던 시간을 잘 버티고 살아 남았다는 것이 대견했어요.
박지은 작가의 작품에는 정말 다양한 캐릭터가 등장해요. 캐릭터가 형식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각자의 서사가 있기도 하고요.
작품이 너무 재미있어서 한번은 어떻게 이렇게 잘 쓸 수 있는지 물어본 적이 있어요. 박지은 작가가 말하기를 라디오 작가로 일할 때 접한 수많은 사연이 글을 쓸 때 많은 도움이 된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배우 입장에서는 입체적인 캐릭터여서 연기하기가 너무 어려워요.(웃음) tvN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 때도 그랬어요. 북한 말투를 쓰는 게 처음이었기 때문에 겁도 많이 났어요. 지금껏 해보지 않은 역할이라서 두려웠고요.
그렇기 때문에 선택한 게 아닐까요?
그렇죠. 도전이었어요. 작품을 선택할 때 비슷한 역할은 피하려고 해왔어요. 대사는 또 왜 그렇게 맛깔난지, 도무지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역할이었죠. 김정난이라는 배우를 선택한 데는 분명 제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텐데 잘해내지 못하면 온전히 제 책임이니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어요. 박지은 작가에게 농담으로 “도대체 왜 이렇게 재밌게 쓰는 거야”라고 투정 아닌 투정을 할 정도였어요. <눈물의 여왕>에서는 작가가 쓴 대사의 맛을 잘 살려내려고 애드리브도 거의 하지 않았어요. 대본이 지닌 맛을 잘 전달하려고 노력했죠.
이렇게 뜨거운 반응을 예상했나요?
굉장히 뜨거울 거라고 생각했어요. 대본을 읽으면서 너무 재밌었고 범자 캐릭터도 좋았고요. 다른 배우들은 워낙 잘하니까 저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뿐이었죠.
범자의 장면 중 가장 잊히지 않는 신이 있다면요?
제사 신도 잊히지 않고요. 담벼락에서 오빠와 통화하며 울다가 ‘영송’(김영민 분)의 엄마와 엉엉 울며 대화하는 장면도 정말 좋았어요.
멜로 연기도 있었어요. 나이대가 있는 남녀의 로맨스이다 보니 적정선에 대한 고민도 있었겠죠?
그 또한 부담스러운 연기 중 하나였어요. 20~30대의 사랑은 달달하잖아요. 하지만 50대의 멜로는 잘못하면 공감대가 잘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어요. 특히 젊은 시청자 입장에서는 더 그렇죠. 범자가 굉장히 센 캐릭터지만 영송과의 로맨스가 사랑스럽게 느껴질 수 있도록 캐릭터 초반에 순진하고 인간적이고 귀여운 면을 조금씩 쌓아가려고 했어요. 초반에 그런 점이 빌드업된다면 충분히 자연스럽게 로맨스로 이어질 수 있으리라 여겼죠. 다행히 김영민 배우와 이전에 작품을 함께한 적이 있어서 친하다 보니 케미도 잘 나왔고요. 현장에서 젊은 촬영 스태프에게 괜찮은지 계속 물어봤어요. 다행히 매우 좋아해줬고, 감독도 잘하고 있다고 북돋워준 덕에 더 힘이 났어요.
김수현·김지원 배우와의 호흡도 궁금해요.
너무 좋았어요. 즐거웠고요. 두 배우 모두 성격도 좋고, 예의도 바르고 선배들도 잘 챙겨요. 분량도 많고 감정 신도 많아 누구보다 힘들었을 텐데 주연배우로서 책임감이 정말 강했어요. 모든 촬영이 끝나고 종영 파티를 하는데 마음 한편이 이상하게 울렁울렁했어요. 현장의 모든 케미가 좋았어요. 대본에 배우와 스태프가 영혼을 불어넣고, 새로운 인물을 만들어내고 이렇게 케미를 일으켰다는 걸 생각하니 울컥했죠. 대단한 걸 해낸 듯한 성취감마저 느껴졌어요. 오래전에는 쪽대본도 흔했어요. 그러다 보면 작품이 산으로 가는 경우도 있고, 갑자기 주연이 조연이 된다거나 반대로 조연이 주연이 되는 일도 있었어요. 한배를 탔으니 끝까지 가야 하긴 하는데, 그렇게 가다 보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도 생기고요. 그 시절 경험 덕분에 이제 내공이 쌓여 어떤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잘 대처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생겨 좀 편해진 것 같기도 해요. 다만 새로운 창작물을 만들어내는 것에 대한 고통은 배가됐죠.
20대에 연기를 시작해 어느덧 50대가 됐어요. 과거와 비교했을 때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이 있다면요?
늙었다는 거죠.(웃음)
그래서 좋은 점이 있나요?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노력해요. 나이 드는 걸 달가워할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늙어간다는 건 한편으로는 슬픈 일이고, 죽음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시간이죠. 여러 가지 복잡한 마음이 들기 마련인데, 그럼에도 배우로서는 연기가 깊어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눈이 그런 세월을 담아내고, 주름도 좀 더 예뻐 보일 수 있도록 노력하며 긍정적이고 밝게 살려고 해요. 그렇게 우아하게 나이 들고 싶어요.
지금까지 연기하며 배우로서 전환점이 됐던 작품이 궁금해요.
SBS 드라마 <신사의 품격>과 JTBC 드라마 <SKY 캐슬>이 아닐까요? 전 10년을 주기로 뭔가 바뀌는 것 같아요. <SKY 캐슬>을 하기 전 무렵엔 코믹한 역할을 많이 했어요. 그러다 보니 비슷한 결의 작품이 많이 들어왔고요. 조금 어둡고 밀도감 있는 인물을 연기하고 싶은데 가벼운 캐릭터들만 들어와서 1년 정도 작품을 안 하고 기다렸어요. 그때 연극을 준비했죠. 책도 읽고 피아노도 배우며 1년의 시간을 보내는 중에 <SKY 캐슬> 출연을 제안받았어요. 분량이 굉장히 적었는데도 꼭 함께하고 싶다면서요. <SKY 캐슬>의 유현미 작가와 함께했던 SBS 단막극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에서 제 연기가 인상 깊었나 봐요. 대본을 봤더니 정말 원하던 캐릭터였어요. 무엇보다 잘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어떻게 연기해야 할지 그림이 펼쳐지더라고요. 연극 공연도 앞두고 있던 터라 둘 다 잘해내야 했어요. 그러다 보니 거의 매일 악몽을 꿨어요. 어쨌든 둘 다 잘했죠.(웃음) 분량이 적어 오히려 다행이었어요. 16부 내내 나오는 거였다면 힘들었을 거예요. <SKY 캐슬>을 마쳤더니 한동안 어두운 역할만 들어왔어요. tvN 드라마 <마우스>를 할 때는 에너지 소모가 엄청났죠. 절규하고 오열하고 미친 듯이 막 우는 연기를 하다 보니 모든 기가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어요. 그러다 <사랑의 불시착>에 이어 tvN 드라마 <구미호뎐1938>을 만났어요. 판타지는 정말 해보고 싶은 장르였기에 신나게 연기했죠. 그렇게 다양한 연기를 하다 보니 이제는 좀 작가들에게 믿음을 산 것 같기도 해요.
모든 작품이 좋은 반응으로 이어질 순 없어요. 작품에 대한 반응이 기대한 만큼 나오지 않았을 때는 위축되기도 하나요?
그렇진 않아요. 오래 연기하며 얻은 결론인데, 그런 작품 역시 경험해봐야 해요. 저는 늘 최선을 다하고 역할에 몰입하려고 애썼고, 그렇게 또 하나의 필모그래피를 만들고 경험했으니 된 거죠. 작품은 비록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더라도 나는 경험을 얻었으니 된 거죠.
<눈물의 여왕> 다음에는 어떤 작품을 기대하나요?
기대하는 건 없어요. 바람도 없고요. 하던 대로 하고 싶어요. 대본이 좋다고 작품이 잘 나오는 것도 아니고, 뭔가 부족해 보여도 그 작품이 꼭 망하진 않아요. 상황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지죠. 그냥 순리대로 연기해나가고 싶어요. 늘 좋은 작품만 제안을 받을 수 없고, 조금 아닌 것 같더라도 일단 한번 만들어보자는 마음으로 할 거예요.
지금까지 작품을 선택해오며 변하지 않은 기준이 있을까요?
다양한 캐릭터를 해보는 것, 그리고 하나의 이미지에 매몰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 그런 기준으로 일할 수 없다면 쉬어 갈 수 있는 용기도 내며 연기해왔어요.
얼마 전 메릴 스트립이 칸영화제에서 명예 황금종려상을 받았어요. 시상자가 “당신은 우리가 여성을 보는 방식을 바꾸었다. 또한 우리가 자신을 다르게 볼 수 있도록 해주었다”고 말했어요. 여성 배우로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라는 생각이 들었죠.
메릴 스트립은 제 롤 모델이에요. 헬레나 본햄 카터도요. 그 배우들처럼 굉장히 다양한 캐릭터에 도전하고 싶어요. 나이 들수록 도전하는 게 어려워요. 헤어스타일 하나 바꾸는 것도 쉽지 않은데 새로운 역할에 도전하는 건 정말 용기가 필요한 일이죠. 끝없이 도전하고, 그로부터 오는 고통을 기꺼이 감내하는 배우이고 싶어요.
작품을 끝내고 나면 잘 쉬는 것 역시 필요할 것 같아요. 얼마 전에 태국 여행을 다녀온 사진을 SNS에서 봤어요.
지지난달에는 베트남에도 잠깐 다녀왔어요. 가끔 짧게 여행을 다녀와요. 키우는 고양이가 아파서 여행을 오래 할 수 없었어요. 고양이 6마리를 키우고 있는데 그중 3마리가 19살이어서 매일 아침저녁으로 약을 먹여야 해요. 수액도 챙겨야 하고. 여행을 가면 길어야 3박 4일이에요. 고양이들 때문에 꼼짝할 수가 없죠.
연기하지 않는 시간은 고양이들과 함께하겠네요.
동물을 워낙 좋아해 동네 길고양이들 케어도 해요. 중성화도 해주고 밥도 먹이고 겨울에는 집도 지어주고요. 이제는 운동도 챙기고 있어요. 50대가 되면 이곳저곳 아픈 곳이 생겨요. 고장 나고 있는 게 눈에 보이죠. 제대로 관리 안 하면 연기도 잘할 수 없고, 고양이도 제대로 돌볼 수 없으니 운동을 안 할 수가 없어요. 작품을 하지 않는 시간에는 계속 영화나 드라마를 찾아봐요. 요즘 젊은 배우들이 어떤 연기를 하는지도 보고, 어떤 배우가 있는지도 보고요. 새로운 배우가 계속 유입되다 보니 작품을 많이 챙겨봐야 해요. 공연이나 전시회도 많이 보러 다녀요. 얼마 전에는 손유영 작가의 <묘한세상> 전시를 보고 왔어요. 고양이를 주제로 그린 민화 작품인데, 몇 년 전에 인터넷에서 그림을 발견하고 너무 마음에 들어 작품을 구입한 적도 있어요. 거실 한가운데에 걸어두었죠. 언젠가 민화 그리는 걸 배우고 싶어요. 위안이 되는 작품이 정말 많으니 언젠가 다시 전시가 열리면 꼭 보러 가세요.
집에서 보내는 시간 중 가장 평화로운 때는 언제인가요?
김부각 같은 거 먹으면서 재미있는 드라마나 영화 볼 때! 요즘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를 보고 있어요. 제가 공황장애가 있다 보니 더 흥미롭더라고요. 도대체 작가가 어떤 경험을 했기에 공황장애 환자에 대해 이렇게 정확히 표현할 수 있는지 궁금했어요. 저는 공황장애가 있는지 좀 오래됐어요. 그래도 요즘은 정말 많이 좋아졌어요. 약도 열심히 먹었고요. <눈물의 여왕> 촬영 때 갑자기 증세가 심해져 촬영을 하지 못한 적도 있어요. 정말 너무 미안해서 힘들었죠. 그래도 혼자만 그런 병을 가진 게 아니라며 촬영팀이 진심으로 이해해준 덕분에 큰 위안이 됐어요.
여름휴가 계획은 세웠나요?
고양이를 키우다 보면 할 일이 너무 많아 집에서도 늘 3,000보 이상 걸을 수밖에 없어요. 집에만 있는데도 아래위층을 계속 오가다 보니 눈이 퀭해질 만큼 피곤한 날도 있어요. 작품에 들어가면 촬영도 해야 하고, 고양이 약 먹이는 시간도 맞춰야 해서 작품이 끝나고 나면 방전되는 기분마저 들어요. 예전에는 유적지 여행도 좋아했는데 이제는 그냥 휴양지에 가서 수평선을 바라보며 아무 생각 없이 쉬고 싶어요. 온전히.
에디터 : 송정은(패션), 박민(인터뷰) | 사진 : 김외밀 | 헤어 : 레나 | 메이크업 : 정서윤 | 스타일링 : 김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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