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표 2000원’ 낙원상가 실버영화관 김은주 대표 “노인들 놀이터 만들고 싶었죠” [차 한잔 나누며]

이정한 2024. 5. 28.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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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주 ‘허리우드클래식’ 대표
낙원상가서 실버영화관 운영
가격 인상 없이 16년째 유지
정부 지원 등 통해 비용 충당
하루에 500~600명 ‘북적북적’
“편히 수다 떠는 공간 됐으면”

“146번 줘요. 맨 앞쪽 자리.”

익숙한 듯이 자리를 요구한 한 어르신이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1000원짜리 지폐 두 장을 꺼냈다. 1952년에 나온 영화 ‘사랑의 매혹’ 표를 집어 든 어르신은 “어이, 김씨. 오늘은 영화 안 봐?”라며 주변을 서성이는 다른 어르신에게 물었다. 어르신들로 북적이는 이곳은 2009년 이후 15년여 동안 탑골공원 뒷마당을 지킨 ‘실버영화관’이다. 55세 이상에게는 푯값이 단돈 2000원. 16년째 똑같다.
20일 서울 종로구 낙원상가에서 만난 김은주 허리우드클래식 대표는 “기획하고 준비한 것에 손님들이 어린아이처럼 기뻐할 때 행복하다”며 “열정은 내 힘의 원천”이라고 말했다. 남정탁 기자
20일 실버영화관 ‘허리우드 클래식’에서 만난 김은주(50) 대표는 “요즘 어르신들이 마음 편히 있을 장소가 별로 없다”며 “여기 만큼은 종일 친구들과 떠들면서 놀 수 있는 공간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어르신을 위한 영화관’에선 꼭 영화를 보지 않아도 된다. 문을 열고 있는 동안엔 부담 없이 쉴 수 있는 공간이다. 표를 사면 ‘영웅본색’ 주윤발 얼굴이 들어간 ‘달러’ 쿠폰 한장을 받는데, 이걸로 영화관 내 카페에서 1000원을 할인받을 수 있다. 가래떡과 조청, 옛날 커피, 주변에 전시된 90년대 물건들까지. 이곳은 어르신 맞춤형 공간으로, 찾는 어르신들은 편안함을 느낀다고 한다.

영화 마케팅을 공부한 김 대표는 2008년 낙원상가에 처음 들어와 대중 영화관을 운영했고, 이듬해 실버영화관으로 바꿔 문을 열었다. 초창기 하루 관람객은 1000명을 훌쩍 넘었다. 좌석 수 300개, 하루 4∼5회 영화를 상영하는데 몰려든 어르신들을 감당하지 못해 대기표만 200번까지 간 적도 많았다고 한다. 김 대표는 “어르신을 위한 장소가 정말 부족했다는 걸 느꼈다”며 “여기 오는 분들이 저소득층만 있는 게 아니다. 후줄근해 보여도 건물주나 땅이 많은 거부도 꽤 있다”고 전했다.

상영 영화는 고전 뿐이다. 관람객으로부터 희망 영화를 받고 1∼50위를 정한 뒤 영화관에 적합한 영화를 튼다. 한 번은 ‘방자전’을 틀었다가 호되게 야단치는 어르신들을 상대하느라 곤욕을 치렀다. 김 대표는 “방자가 이상하다면서 역사를 왜곡했다고 화내셨다”며 “폭력 영화 등 어르신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영화는 제외한다”고 덧붙였다.

2000원 티켓 값으로는 영화관 운영비를 감당하기 쉽지 않다. 정부 지원을 받거나 SK 등 기업 후원, 일부 사업 공모전에서 받는 상금 등으로 매년 1억∼1억5000만원 정도를 충당한다. 그래도 9억원에 달하는 1년 운영비가 모자라거나 적자를 겨우 면하는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유행은 큰 고비였다. 하루 관람객은 50∼100명으로 급감했다. 김 대표는 “그땐 사비를 써서 운영비를 메웠다”고 돌아봤다.

전국의 실버영화관은 이제 4곳뿐이다. 부산과 대구의 실버영화관은 코로나19를 견디지 못하고 폐업했다. 허리우드 클래식은 어려웠던 시기를 극복하고 지난해 11월부터 정상화됐다. 지금은 하루에 500∼600명이 영화관을 찾는다.
지난해 10월 김 대표는 영화관이 있는 층과 공연장이 있는 위층, 두개 층을 양도받았다. 김 대표는 “건물주 나이가 80세가 넘으셨는데 ‘사고 싶은 금액을 적으라’고 해서 제 형편에 낼 수 있는 최대액을 썼고 그 가격에 여기를 인수했다”고 밝혔다. 김 대표가 2009년부터 실버영화관을 운영해 온 걸 바로 옆에서 지켜본 건물주는 그는 ‘여기를 다른 사람한테 팔면 이 영화관은 없어질 것 같다. 의미가 큰 곳이라 지켰으면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김 대표는 “그분께 받은 것처럼 저도 똑같이 남을 도와줄 것”이라고 다짐했다.

임대료가 크게 줄면서 이제는 여유가 생겼다. 그래도 수익성은 거의 없다. 애초에 돈을 벌려고 한 사업도 아니다. 전국의 실버영화관이 소속된 시니어어벤져스 협동조합을 통해 수익이 생기면 다른 실버영화관을 도와준다. 김 대표는 “건물이 헐려서 영화관이 없어질 때까지 푯값은 2000원”이라며 “나중엔 여기 온 어르신들이 할 수 있는 소일거리도 준비해 소액이라도 벌 수 있게 할 계획도 있다”고 했다.

김 대표는 “아무도 안 하는 일을 하고 싶고, 거기엔 반드시 사회적 가치가 들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의미 있는 일을 할 때 도와주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어려울 때 그 사람들이 힘이 됐기 때문이다. “전 그냥 이렇게 일 하고 싶어요. 앞으로도 계속.”

이정한 기자 ha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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