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에 4일만 야근하면 되나요?”…‘예산 부족’ 사법부의 진퇴양난 [취재후]
"한 달에 15시간만 야근하고 그 이상은 추가로 못하겠다는 불만이 나오네요."
수도권 소재 9급 공무원 A 씨는 법원행정처 공지를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산 부족'으로 초과근무수당이 대폭 깎이는 것에 대해 동료들의 불만이 크다고 전했습니다.
법원행정처는 지난 20일 오후, '실질에 따른 공정한 초과근무수당 지급 계획'이라는 이름의 공문을 각급 법원에 공지했습니다.
공지는 기획재정부와 국회의 예산 통제로 그동안 관행적으로 해왔던 예산 전용이 어려워지면서 이번 달부터 월 최대 25시간 초과근무에 대한 수당을 지급하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또 실제 필요한 초과근무를 한 직원에게 수당을 지급하겠다고도 밝혔습니다.
하지만 초과근무수당 25시간 중의 10시간은 초과근무를 하지 않아도 기본적으로 지급되는 '기본지급분'이기 때문에 월 최대 15시간 초과근무에 대한 수당만 지급하겠다는 뜻입니다.
인사혁신처의 공무원 수당 관련 규정에 따르면, 공무원의 초과근무수당 최대 인정 시간은 월 57시간입니다. 한 달에 최대 57시간까지 초과근무에 따른 수당을 받을 수 있었는데 절반 이상 줄어드는 겁니다.
■ '수당 미지급' 공지가 나간 이후 '수당 축소'
초과근무수당 지급을 축소하겠다는 공지 전에는 초과근무수당을 지급하지 않겠다는 공지도 있었습니다.
2주 전쯤 각급 법원에는 '5월부터 초과근무수당의 기본지급분 10시간 외에는 지급하지 않는다'는 공지가 있었습니다.
[연관 기사] [단독] 법원 “이제 초과근무 수당 없다”…논란 일자 ‘착오’ (2024.05.20 KBS 뉴스9)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7967590
각급 법원에 비슷한 내용의 공지가 확산하자, 법원 공무원들의 불만 글들이 법원 내부 게시판 등에 올라오기도 했습니다.
법원행정처는 "일부 법원의 예산산정 과정에서 누락 내지 오류가 발생해 초과근무수당 고지에 착오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면서 "다른 급여항목 예산 중 피해가 최소화할 수 있는 부분을 임시로 활용하는 방식을 찾아 합리적인 해결을 가능하도록 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일선 법원 담당자의 착오에서 벌어진 해프닝이었다는 설명입니다. 그러면서 5월 수당 분부터 지급되지 않는다는 건 사실이 아니고, 지난해처럼 예산을 전용해 문제없이 지급할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공지를 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예산 전용이 반복되는 것에 대한 감사원의 지적이 있었다고 덧붙였습니다.
해당 공지에 대해 KBS 취재가 시작되고 결국 9시 뉴스에 방송되자 법원행정처가 구체적인 초과근무수당 축소 지침 등을 발표한 것으로 보입니다.
■ "4일만 야근하면 되나?"·"재판 지연, 어쩔 수 없다"
수당 미지급 공지에서 수당 축소 공지로 바뀌었지만, 법원 공무원들의 불만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모습입니다.
수도권 지역의 한 법원에 근무하는 법원 공무원 A 씨는 "15시간 초과근무에 대해 수당을 주겠다는 것이었지, 이외에는 준다는 이야기가 없다"면서 "15시간 넘어 일하면 휴가로 전환해서 쓰라는 건데, 격무부서 등에서 15시간 넘게 야근할 정도로 일이 많은데 휴가를 쓸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A 씨는 "동료들은 '15시간만 야근하고, 그 이상은 추가로 야근 못 하겠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면서 "안 그래도 '재판 지연이 되고 있는데 더 지연돼도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동료들이 있다"고 밝혔습니다.
서울 소재 한 법원의 공무원 B 씨도 지난해 연말에 초과근무수당 축소가 있었지만, 올해처럼 상반기에 수당을 못 주겠다고 한 적은 처음이라고 털어놨습니다.
B 씨는 "하루에 최대 4시간을 야근으로 올릴 수 있는데, (15시간이면) 한 달에 4일만 야근하면 되는 건가?"라면서 "직원 인사 이동 시기인 1월과 7월에 미제 사건 처리 등으로 공무원들의 야근도 많은데, 지원이 줄어들 때는 아래(하위직 공무원)부터 줄여나가는 식이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지난해 연말에도 15시간만 수당으로 올리고 나머지는 연차(휴가) 등으로 전환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는데, 그렇게 해서 생긴 연차를 제대로 못 쓰고 있다. 일이 많기 때문이다"고 강조했습니다.
형사 재판 자료의 경우 전자 문서가 아닌 종이 문서 형태로 보관해 법원 공무원들이 일일이 분류하고 전달해야 하고, 회생 관련 업무의 경우 압류 금액 확인 등을 일일이 대조할 필요가 있어 야근이 잦다고 법원 공무원들은 말합니다.
■ '줄어드는 법원 예산으론 어쩔 수 없어'…재판 지연 피해는 국민이
법원행정처는 난감한 모습입니다. 지난해까지 다른 예산을 전용해 초과근무수당을 지급했지만, 감사원과 기재부의 지적 등으로 이마저도 여의치 않자 올해부터 수당 지급을 줄이게 됐기 때문입니다.
구조적으로 법원 예산이 적다는 내부 인식도 있는 상황입니다. 올해 사법부 예산이 약 2조 2천억 원으로 전체 국가 예산의 0.33% 수준입니다. 산림청 예산보다 작은 규모입니다.
전체 국가 예산 중 사법부 예산 비중은 갈수록 줄고 있습니다. 2016년 사법부 예산 비율이 0.43%를 기록한 이후 계속 비율이 떨어지는 추세입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물가인상에 따른 수당 인상은커녕 기존 수당도 주기 어려운 현실이라는 겁니다.
조희대 대법원장은 취임 후 '재판 지연 해소'를 연일 강조하고 있습니다.
재판 지연을 막기 위해선 법관들의 신속하고 정확한 재판이 가장 중요하고, 이를 위해 법관에게 필요한 자료를 정리하고 올리는 법원 공무원들의 노력도 필수적입니다.
하지만 판사와 법원 공무원 등 사법부 구성원들에게 당위성만을 강조하며 격무를 견디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자료 정리 등 재판 기본 업무를 담당하는 공무원들이 기본적인 수당조차 못 받는 상황에선 재판 지연 해소는 더욱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법부가 일반 기업처럼 스스로 수익 사업을 벌일 수는 없습니다. 결국 적절한 수준의 예산 증액은 반드시 있어야 하고, 이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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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준 기자 (hojoon.lee@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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