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 금기어’ 된 리모델링? 냉가슴 앓는 단지들[올앳부동산]
※투기와 투자는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집값이 오르긴 오른 걸까. 우리가 살게될 집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통계로 점철된 부동산 기사의 행간을 읽어내고 판단을 내리려면 나만의 질문과 관점이 필요합니다. 경향신문만의 질문과 관점으로 부동산의 모든 것을 짚어드리는 ‘올앳부동산’은 경향신문 칸업(KHANUP) 콘텐츠입니다. 더 많은 내용을 읽고 싶으면 로그인 해주세요!
“지난해 서울시에서 리모델링 조합장들과 간담회를 가졌는데, 서울시 관계자 첫 마디가 ‘재건축 할 수 있으면 재건축 하세요’였어요. 누군 안 그러고 싶나요?”
서울의 한 리모델링 단지 조합장은 재건축 규제완화 관련 뉴스를 볼 때마다 한숨부터 나온다고 했다. 용적률 상향 등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이 쏟아지는 재건축 단지들과 달리, 리모델링 단지에 대한 규제는 강화되고 있어서다.
서울 리모델링 단지들의 한숨이 깊어지고 있다. 공사비 폭등으로 가뜩이나 사업성에 대한 고민이 큰데, 각종 규제까지 더해지며 공사 기간이 기약없이 길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리모델링으로 선회하는 단지들, 왜?
2018년 ‘서울형 리모델링 1호’ 단지로 선정된 서울 송파구 문정동 문정시영아파트는 최근 주민총회를 열어 리모델링을 지속할지 여부를 선택하는 투표를 진행했다. 이 아파트는 지난해 중층 노후 아파트의 용적률을 최대 500%까지 완화할 수 있다는 내용의 ‘노후계획도시 정비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 발표된 후 재건축으로 선회해야 한다는 민원이 빗발쳤던 곳이다.
결론은 80% 넘는 동의율로 ‘그대로 리모델링’이었다. 용적률 완화 가능성만 믿고 사업 방향을 바꾸기엔 사업 지연과 공사비 인상 리스크가 너무 크다고 판단한 것이다. 단지 특성 상 재건축으로 얻을 실익도 크지 않다.
문정시영의 용적률은 216%다. 업계에서 재건축 사업성이 있다고 보는 용적률(180%)을 훌쩍 상회한다. 1988년 서울 패럴림픽 선수 숙소 용도로 지어진 이 단지는 각 동별로 휠체어 장애인 경사로와 건물 복도가 차지하는 면적이 넓은 편이다. 재건축을 하더라도 가구당 대지지분을 16.5~29.7㎡(5~9평) 이상 가져가기 어렵다. 비행안전구역에 포함돼 용적률 상향도 쉽지 않다.
정부가 재건축 규제 완화에 적극 나서면서, 시장에서는 리모델링에서 재건축으로 선회하는 단지들이 쏟아질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다. ‘리모델링 투자 붐’이 처음 불었던 것은 2000년대 초반으로, 당시 재건축 연한 30년을 넘지 못한 단지들은 빠른 정비사업을 위한 대안으로 15년 이상부터 가능한 리모델링을 선택했다.
하지만 사업이 장기화되면서 당시 리모델링을 추진했던 단지들도 재건축 연한을 채우게 됐다. 리모델링 분담금이 재건축의 70~80%까지 올라오면서, 재건축 대비 저렴한 공사비라는 리모델링의 장점도 옅어졌다. 리모델링 조합 설립 이후 10년이 지난 개포동 대치2차와 응봉대림1단지에서 리모델링 조합 해산 논의가 나온 것도 이때문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문정시영을 포함해 리모델링 사업을 계속 진행하기로 결정한 단지들이 상당하다. 대부분 용적률이 200%를 넘어 재건축 사업성이 확보되지 않는 단지들이다. 서울 최대 리모델링 추진 단지로 꼽히는 동작구 사당동 ‘우극신’(우성2·3단지, 극동, 신동아4차), 강동구 선사현대 역시 재건축으로 선회할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리모델링 사업을 그대로 밀고 가기로 결정했다.
류지택 서울시리모델링주택조합협의회 부회장은 “2018년 이후 조합이 설립된 단지들은 재건축이 불가능해 어쩔수 없이 리모델링을 선택한 단지들”이라며 “서울시 신통기획 등으로 용적률이 대폭 완화된 단지들도 재건축이 안되는 상황에서, 기존 리모델링 조합을 해산하는 막대한 비용을 감수하면서까지 재건축을 고집하긴 힘들다”고 말했다.
느린 리모델링, 서울시의 ‘발목잡기’ 때문?
하지만 리모델링을 이어가기로 결정한 이후에도 사업은 지지부진하다. 정부·지자체가 리모델링에 대한 규제를 강화했기 때문이라는게 조합들의 주장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건축심의 전 서울시 도시·건축공동위원회(공동위원회)의 사전심의를 받도록 한 조치가 언급된다. 리모델링 사업 절차는 조합 설립→안전진단→건축심의→리모델링 허가→이주·착공 →입주 순으로 이뤄진다. 안전진단 이후 건축심의까지 통과하면 리모델링 인·허가를 받아 실제 공사에 착수할 수 있다.
하지만 서울시에서 리모델링을 진행 중인 76개 단지 중 건축심의를 통과한 단지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문정시영은 2020년 1차 안전진단을 통과한 이후로도 4년간 다음단계인 건축심의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고 있다. 문정시영 조합 관계자는 “서울시의 요구에 따라 사전자문 보완 작업을 진행중”이라고 했다. 문정시영과 함께 서울형 리모델링 단지로 선정됐던 신도림 우성 2차·3차·4차 단지는 건축심의를 통과하고도 사전자문 문턱을 넘지 못해 난항을 겪고 있는 상황이다.
서울시는 사전자문이 리모델링 사업을 방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절차를 단축시키는 조치라고 해명했다. 서울시 관계자는 “지구단위계획을 의제하는 사업은 공동위원회 자문을 받도록 하는 절차가 이전에도 있었다”며 “건축심의를 받은 내용이 공동위원회 단계에서 바뀌고 사업이 지연되는 것을 막기 위해 뒤에 있던 절차를 앞으로 당겼을 뿐”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리모델링 조합들의 입장은 다르다. 류 부회장은 “사전자문을 통과했던 내용들이 건축심의에서 번복되는 경우가 상당하다”며 “사전자문에 1년 넘게 묶여있느라 건축단계로 넘어가지 못하는 조합들이 정말 많다”고 말했다.
필로티(비어있는 1층 공간) 설계에 따른 1개층 상향을 ‘수평증축’이 아닌 ‘수직증축’으로 보기로 한 국토교통부의 유권해석도 사업 속도를 늦춘 요인이다. 국토부는 2020년까지만 해도 1층 필로티를 뺀 1개층 상향을 수평증축으로 간주한다는 유권해석을 내놨지만, 지난해 7월 법제처가 이와 반대되는 해석을 내놓자 입장을 바꿨다. 필로티 증축도 수직 증축으로 보고 규제를 강화하되, 안전에 대한 책임이 있는 지자체가 최종 판단하라고 권한을 넘긴 것이다.
이에 따라 리모델링 조합들의 사업 진행에도 비상이 걸렸다. 수평증축은 안전성검토를 한 번만 받아도 되는 반면, 수직증축은 두 번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두 번의 리모델링 안전진단까지 합치면, 리모델링 조합들은 수직증축에 대한 안전성 검토만 총 네 번을 받게 된다. 이에 용산구 이촌 한가람을 비롯한 일부 단지들은 기존 필로티를 제외한 수평증축으로 설계변경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최소 6개월 이상의 사업 지연을 경험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합들은 서울시의 리모델링 규제 강화 기조를 납득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공약사업인 재건축을 장려하기 위해 리모델링 사업을 의도적으로 억제하고 있다는 의심도 내비치고 있다.
실제로 오 시장은 지난해 9월 시의회에서 “리모델링은 전임시장 때 관심의 대상이 됐다”면서 “재건축·재개발·모아타운으로 인해 리모델링 수요가 많이 줄었다”고 발언했다. 박원순 시장 시절 추진됐던 서울형 리모델링을 신청한 한 조합장은 “오 시장이 리모델링을 전 정권의 잔재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며 “상황이 이렇다보니 지금은 서울형 리모델링라는 말조차 꺼낼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조합장도 “서울형 리모델링은 서울시가 리모델링을 장려하기 위해 선정한 일종의 시범단지”라며 “정권에 따라 정비사업의 방향이 이렇게 달라지면 되겠느냐”고 말했다.
심윤지 기자 sharps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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