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산골 호텔 사들인 수상한 중국인… 그 뒤엔 F-35 기지
미 정보당국, 수년 전부터 스위스에 ‘중국 스파이 활동’ 경고
스위스 베른 주의 운터베흐(Unterbäch)는 해발 1100m의 알프스 계곡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 인구는 500명이 채 안 된다.
2018년 베이징에서 온 왕진ㆍ린징 중국인 부부가 스위스 몽트뢰의 명문 호텔학교(SHMS)를 졸업한 아들 왕다웨이의 이름으로 이 마을에 있는 방 8개짜리 산장(山莊) ‘호텔 뢰슬리’를 사들였다. 구입 가격은 80만 스위스 프랑(약 12억원). 1903년에 지어져 꽤 낡았지만, 여름 트레킹족(族)과 겨울철 스키 인구가 이 마을을 즐겨 찾는 점을 고려하면 괜찮은 투자처럼 보였다. 왕씨 부부는 전망이 좋은 맨 위 스위트룸에 자리 잡았다.
‘호텔 뢰슬리’의 정면으로는 탐정소설의 주인공 셜록 홈즈가 숙적과 결투를 벌이다가 함께 떨어져 죽었다는 라이헨바흐 폭포와 알프스 만년설이 그림처럼 펼쳐진다(작가 아서 코난 도일은 독자들의 원성 끝에, 후속작품에서 홈즈를 다시 살려냈다).
문제는 이 산장의 후면 뷰(view)였다. 마이링겐 공군기지와 맞붙어 있어, 군용(軍用) 활주로가 한눈에 들어온다. 군 기지인데도 울타리도 제대로 세워져 있지 않고 마을 도로도 동서남북으로 이 활주로를 지나가, 군용기가 이착륙할 때에는 신호등으로 차량을 통제한다.
스위스는 2028년 최첨단 스텔스 전투기인 미국의 F-35 라이트닝(Lightning) II 36대를 이 기지에 배치할 예정이다. 미국과 스위스는 2018년부터 F-35가 배치될 활주로를 놓고 협상했고, 2019년엔 미국의 F-35 전투기가 이 활주로에서 시범 이착륙을 했다. 비슷한 시기에, 왕씨 부부가 ‘호텔 뢰슬리’를 사들인 것이다.
스위스 일간지인 타게스-안차이거(Tages-Anzeiger)와 블릭(Blick), 스위스 라디오TV(RTS),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미ㆍ영 정보 당국은 이 중국인 가족의 산장 구입이 사실은 F-35의 기밀을 빼내려는 중국의 장기적인 투자였다고 본다”고 최근 보도했다.
왕씨 가족에겐 사실 수상한 점이 없지 않았다. WSJ에 따르면, 이 산장을 구입한 왕진 부부는 스위스식(式) 요리를 배우는 데는 별 관심이 없었다. 또 가장 붐비는 크리스마스 시즌을 비롯해 장기간 산장을 떠나 베이징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마을 사람들은 “빵을 직접 굽지 않고, 슈퍼마켓에서 사온다” “엘리트 호텔경영학교를 졸업한 아들이 뜨거운 우유를 커피에 섞는 스위스식 카페오레를 만들지 않고, 찬 우유를 커피에 붓는다”고 불평했다.
이 산장의 새 주인 왕진은 세련된 독일어를 구사했다. 독일(서독)과 스위스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한 아버지 덕분에 독일어를 배웠다고 주민들에게 말했다.
왕진의 어린 시절에, 두 나라에서 중국 외교관으로 근무한 왕씨는 4명이었다. 2명은 스위스에서 무관(武官)으로 근무했고, 서독의 왕씨 외교관 2명 중 한 명은 수 개월 만에 떠났고, 한 명은 중국 관영 매체 기자 출신으로 나중에 대사가 됐다.
WSJ는 “1950년~1960년대 중립국 스위스는 유럽 스파이활동의 중심지였고, 많은 중국 외교관들은 스파이였다”고 보도했다. 중국의 초대(初代) 스위스 대사였던 펑쉬안은 나중에 정보ㆍ보안기관인 중국 국가안전부의 부(副)부장이 됐다.
왕진 부부가 호텔 뢰슬리를 구입할 즈음, 중국 국가안전부의 스위스 내 스파이 활동은 최고조에 달했다. 스위스 연방정보국(NDB)은 러시아보다도 더 많은 중국 스파이가 과학자, 기자, 사업가로 위장해 활동 중이라는 보고서를 내기도 했다. 2020년 중국인 직원들이 새로 이 산장에 왔는데, 영주권도 없이 직원으로 일했다.
미국은 무려 17조 달러를 들여서 개발한 ‘현대 공중전의 제왕’이라 할 F-35의 기밀 보안에 철저하다. 전투기가 수집한 정보를 처리하는 조종사 헬멧부터 이 전투기의 거의 모든 것이 톱 시크릿이다. 미국에선 제트 엔진을 찍는 것도 금지돼 있다고 한다.
중국은 10여 년 간 F-35에 들어간 첨단기술을 빼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2015년엔 중국 해커들이 F-35 제조사인 록히드 마틴 사에서 테라바이트급의 데이터를 훔쳐간 사실이 뒤늦게 공개되기도 했다. 중국은 2017년, F-35 기술을 일부 베낀 것으로 추정되는 첫 5세대 스텔스 전투기 청두 J-20를 선보였다.
이런 탓에, 미 정보당국은 F-35가 배치될 마이링겐 기지 옆 호텔을 사들인 이 중국인 부부를 계속 관찰했다. 그리고 수년간 스위스 정보당국에 이 사실을 알렸지만, 나토(NATO) 회원국도, 유럽연합(EU) 회원국도 아닌 중립국 스위스의 반응은 더뎠다. 스위스 정보기관의 중국 전담요원은 5명에 불과했다.
결국 작년에 미국은 스위스에 “마이링겐 기지 주변의 보안이 대폭 강화되기 전에는 F-35를 이곳에 배치할 수 없다”고 통첩했다.
그해 7월 26일, 스위스 연방정보국(NDB) 요원들이 호텔 뢰슬리를 압수수색했고, 중국인 가족 3명은 연행돼 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끝내 스파이 혐의는 입증하지 못했고, 관광비자를 가지고 호텔에서 일한 혐의로 5400달러의 벌금을 부과하는 데 그쳤다. 호텔 현관문에는 ‘폐쇄’라는 종이가 붙었다.
WSJ는 “이후 행적이 드러나지 않은 왕씨 가족 3명은 현재 중국의 신흥 부자들이 사는 베이징 북쪽 근교의 ‘드래곤 빌라’에 살고 있다”고 보도했다. 2017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암살된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이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들 왕다웨이는 타게스-안차이거에 “스파이 운운은 가짜 뉴스이며, 다시 스위스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스위스 정보요원과 경찰의 수색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인터넷에는 이 호텔 판매 광고가 떴다. 희망 매도(賣渡)가격은 180만 달러. 한 스위스인이 구입 의사를 밝혔지만, 은행 대출을 받지 못했다.
왕씨 부부의 ‘호텔 뢰슬러’ 구입은 10년을 내다보고 최첨단 전투기 F-35의 기밀을 빼내려는 중국 스파이 기관의 투자였을까. 워싱턴의 중국 대사관은 WSJ에 “미국이 근거도 없이 중국의 이미지를 떨어뜨리려고 음해한다”고 말했다. 마을 사람들 의견도 갈린다. 많은 사람은 “미국이 지나치게 간섭한다”고 WSJ에 말했다.
분명한 것은 F-35를 둘러싼 미ㆍ중 군사첩보 전쟁이 스위스의 알프스 산골마을로까지 번졌다는 것이다.
지난 1월 운터베흐 비행장 위원회는 ‘호텔 뢰슬리’의 새 주인을 통보 받았다. 구매자는 스위스군이었다. 구매 조건은 공개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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