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소련서 열린 첫 한국 상품전… 고려인 3세가 선물로 준 ‘로조 사전’

유석재 기자 2024. 5. 28.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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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김훈씨의 보물
독자 김훈씨가 소장한 '로조사전' /김훈씨 제공

삼성전자 전무와 경남도 정무부지사를 지낸 독자 김훈(81)씨가 1988년 삼성전자 구주(유럽) 총괄로 근무하던 시절 일이다. 그해 5월 노태우 정부는 소련과 동유럽·중국 등 이전 ‘적성 국가’였던 나라들과 관계를 개선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이때 소련 최초 ‘한국 상품전’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렸다.

김씨는 난생처음 공산주의 국가 소련에 발을 디뎠다. 전시관 부스에 누가 봐도 우리 동포처럼 생긴 키 작은 젊은이가 슬라브족 미인인 아내와 함께 찾아와 영어로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고려인 3세 강금돌입니다. 레닌그라드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회사에 다니고 있는데, 나중에 ‘조섯 국숫집’을 차리는 게 꿈이에요.” ‘조선 국숫집’ 다섯 글자만은 한국어로 또박또박 말하는 것이었다.

김씨는 팀원들의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쌓아놓은 컵라면을 그 청년 쇼핑백에 가득 넣어 주며 국숫집 운영에 참고하라고 했다. 다음 날 강금돌이 다시 찾아와 고맙다는 표시로 사전을 한 권 건넸다. ‘로조사전(露朝辭典·러시아 조선어 사전·사진)’이었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소련의 조선어학자와 북한 학자가 공동 집필한 책으로 발행처는 모스크바의 ‘국립외국어급민족어사전출판사’였다. 분량은 1056쪽, 누렇고 두꺼운 재질의 종이에 인쇄한 책이었다. 이후 강금돌이 어떻게 됐는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국내에서 처음 출간한 러시아어 사전은 1987년 고려대 러시아문화연구소에서 낸 ‘노한사전’이었다. 1980년대 초 노문과에 다닌 한 전공자는 “당시엔 ‘로조사전’과 ‘조로사전’의 비공식 영인본을 구해 러시아어를 공부하는 게 필수였다”며 “다들 사전이 너덜너덜해지기 일쑤였고, 한 장씩 외우고 뜯어 삼키는 사람도 있었다”고 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한국 상품전이 열린 지 두 달 뒤, 노태우 정부는 ‘7·7 선언’으로 종전 적성 국가들에 대한 개방 의지를 밝혔다. 이른바 ‘북방 정책’의 본격화였다. 서울올림픽 직후인 1989년 2월 헝가리를 시작으로 대(對)공산권 수교의 봇물이 터졌고, 1990년 9월 한·소 수교, 1992년 8월 한·중 수교가 이뤄졌다. 노태우 정부 기간 새로 수교한 나라는 45국이었으며 그 인구는 17억명이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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