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푸틴을 감동시켰다는 김정은의 활약
“전선 부대 탄약고에는 최고사령관의 명령이 하달돼야 뜯을 수 있는 밀봉된 탄약 상자가 있다. 한번은 최전방에서 전투가 벌어졌는데, 명령이 하달돼 뜯어보니 총알이 있었다. 그걸 자동보총에 장전하고 쏘니 산 하나가 날아가 적이 찍소리 못 하고 잘못을 빌었다.”
“미제가 진짜로 전쟁을 일으키려고 항공모함을 끌고 온 적이 있다. 이때 우리가 점잖게 ‘너희들 배 밑창을 보라’고 했다. 살펴보니 핵탄두를 멘 결사대들이 벌써 항공모함에 붙어 있었다. 미제는 공포에 질려 물러갔다.”
이런 소문들이 어떻게 생산돼 퍼지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북한이 은퇴한 고위 간부들 중에 몇 명을 선발해 허름한 옷을 입혀 기차역처럼 사람이 많은 곳에서 의도적으로 퍼뜨린다는 얘기도 들었다. 지금 돌아보면 너무나 황당한 궤변들이었지만, 외부 세상과 철저히 단절된 북한에서는 이런 소문을 사실이라 믿는 사람들이 많다.
소문과 별개로 북한에선 각종 강연이 끊임없이 진행되는데, 그중에서 최고 강연은 중앙당 선전선동부 강연과 소속 강사들이 진행하는 것이다. 이걸 중앙당 강연이라고 하는데, 아무나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중요한 기관에만 찾아가 한다.
북한에서 엄선된 달변가들인 강사들은 사실과 거짓을 교묘하게 버무린 강연으로 청중을 쥐었다 놨다 한다. 김일성종합대학을 다니던 시절 중앙당 강연을 많이 들었다.
고난의 행군 시절 중앙당 강사들이 특별히 장마당을 찾아가 “장군님이 요즘 이렇게 힘들게 하시는데…”를 연발하며 신파극을 펴니 뼈가 앙상한 청중이 몰려들어 배가 남산만 한 김정일의 건강을 걱정하며 대성통곡했다. 실은 이런 강연이 새빨간 거짓말인 것을 제일 잘 아는 사람들이 바로 중앙당 강사다. 하지만 거짓말의 달인들인 이들도 위에 사례를 든 총알이나 항공모함 같은 궤변은 차마 공식적으로 말할 수 없으니 은밀한 소문으로 만들어 유통시켰을 것이다.
거짓말은 점점 더 큰 거짓말을 부른다. 거짓된 강연을 들으며 자랐을 요즘 중앙당 강사들은 과거보다 한술 더 뜬다. 소문으로 퍼뜨릴 것도 당당하게 공식 강연에서 사실처럼 말한다.
올 초 중앙당 선전선동부에서 주민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공화국 대외정책에서 이룩한 성과’라는 제목의 강연이 대표적이다. 학습까지 시킨다는 강연의 주요 줄거리는 이렇다.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장관이 지난해 7·27 전승절 경축행사에 와서 원수님(김정은)께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절실히 부족한 군수물자와 병력을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다. 원수님은 쇼이구에게 ‘원조를 청하겠으면 쩨쩨하게 놀지 말고 덩치 큰 땅덩어리에 어울리게 청하라’고 하면서 그가 요구한 군수물자 수량보다 훨씬 더 많이 주겠다고 했다. 러시아가 군 병력 3000명을 지원해 달라고 했는데 원수님은 특수부대 3만 명을 보내주겠다고 했다.
이런 지원 덕분에 우크라이나에서 고전하던 러시아는 획기적인 전과를 거두었다. 특히 러시아의 한 개 전선군 병력이 동원돼 몇 달 동안 점령하지 못했던 어느 전략적 요충지를 우리가 파견한 단 몇백 명의 공화국 전투원들이 이틀 만에 점령했다.
다른 나라들이 러시아를 고립시키려는 제국주의자들의 눈치를 보고만 있을 때 우리 공화국만이 러시아에 많은 군사적 원조를 주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이에 깊은 감동을 받아 원수님께 러시아를 방문해줄 것을 무려 여섯 번이나 간청했다. 푸틴은 원수님께 자기가 타고 다니는 최고급 승용차와 함께 쿠릴열도의 섬 4개를 공화국의 해군기지로 제공하면서 원동지역의 안전을 지켜줄 것을 요청했다.”
하도 황당한 내용이라, 뒤늦게 이런 강연이 진행됨을 인지한 평양 주재 러시아대사관이 김정은에게 항의하면서 당장 중지해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문제는 이런 강연이 북한에선 먹힌다는 것이다. 워낙 극단적인 폐쇄 정책에다 ‘반동사상문화배격법’이니 ‘청년교양배격법’이니 하는 악법으로 외부 정보를 접하면 극형에 처하니 북한 주민들은 위의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 판단할 능력이 없다. 마음껏 거짓말을 해도 되는 환경이니 노동당 선전선동부는 점점 괴물로 진화하는 것 같다. 그 선전선동부를 책임진 것이 바로 김여정이다. 그에게 이런 창작 재능까지 있을 줄은 몰랐다.
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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