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해방의 꿈 안고 ‘학출’ 노동자가 되다

한겨레 2024. 5. 27.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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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박래군의 인권의 꿈] 4화 위장취업과 5·3항쟁
1986년 5월3일 오후 인천시민회관 앞에 모인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하고 있다. 연합뉴스

1985년 부평지역 목장갑 공장 취업
새 사회 만들 노동자 조직화 위해
대학생활 포기하고 노동운동 투신

무더기 해고에 동료와 일일파업 대응
하루만에 복직했지만 결국 쫓겨나
해고자투쟁위원회 소속으로 활동

1986년 5월3일 인천의 노동자·학생
민주화 조처 요구하며 격렬 시위
‘고물장수로 위장’ 직접 화염병 운반

광주학살 묵인한 미국에 항의하러
그달 말 영등포 한미은행 점거 시위
반미구호 외치다 연행돼 첫 구속

1985년 2학기에 우상호는 학교에 남아 학생운동을 하기로 했고 나는 공장으로 가기로 했다. 집에는 복학한다고 거짓말을 하고 인천 부평지역에 갔다. 그렇다고 전적으로 노동운동에 투신한 건 아니었다. 지금은 ‘오마이뉴스’ 대표로 있는 오연호의 부탁으로 국문과 후배들의 민속문화반 학회 지도도 겸했다. 1주일에 한 번 세미나를 지도한다는 명분이었지만, 세미나보다는 주로 술 먹고 재미있게 놀았다. 그래서인지 그때 만난 후배들과의 인연은 지금까지 이어진다.

역사의 주인인 노동자, 자본주의 착취체제를 부수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갈 주역인 노동자, 그들을 조직해서 노동자 군대를 만들겠다는 포부를 갖고 공장으로 갔다. 선택받은 지식인이 아니라 기득권을 포기하고 존재 자체를 이전하기로 한 것이었다. 나는 다시는 대학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각오로, 공장에 뼈를 묻겠다는 각오로 노동현장으로 갔다. 다른 ‘학출’(대학생 출신, 반면 ‘노출’은 노동자 출신)들은 외모가 노동자스럽지 못하므로 일부러 노가다판에도 가고, 용접 일도 배우고 했지만 나는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다. 군대에서도 ‘어디서 농사일하다가 온 것 같은 놈이 대학 다니다 왔다’고 해서 두들겨 맞았던 것처럼 나는 별도의 준비가 필요치 않았다. 출중한(?) 외모 덕분이었다.

부평 지역의 교회들을 찾아다니면서 노동야학을 열 수 있는 곳을 알아봤지만 허탕이었다. 그래서 1986년부터는 노동현장에 직접 취업하기로 했다. 몇 곳을 알아보다가 작전동의 목장갑 공장에 들어갔다. 120명 정도가 일하는 이곳은 한 달 13만원의 월급에, 하루 12시간씩 맞교대로 일하는 저임금·장시간 작업장이었다.

15~20대 정도의 기계를 2명의 노동자가 맡아서 실을 걸어주고 기계를 돌리면 실장갑이 만들어졌다. 실이 바늘에 엉키지 않게 해주고, 불량을 골라낸 뒤 물량이 쌓이면 다른 부서로 넘겼다. 눈썰미가 있다는 칭찬을 받으면서 노동자들과 금방 친해졌다. 몇몇과는 12시간 일을 하고 근처 술집에 가서 돼지껍데기를 놓고 소주를 마시며 친분을 다졌다. 슬슬 그들을 만나 학습을 하려던 때였다.

하루는 출근했는데 작업자들 이름을 불렀다. 나만이 아니라 거의 절반 가까운 사람들을 부르더니 오른편에 따로 서라고 했다. 호명당한 이들은 내일부터 회사에 나오지 말라고 했다. 말 한마디로 해고를 당했다. ‘뭐 이런 일이 있나’ 했더니, 그 계통 공장에서는 매년 반복되는 일이었다. 가을에서 겨울 사이에는 인력을 왕창 뽑아서 물량을 대량 생산한 뒤 재고로 쌓아놓고, 봄이 되면 인력을 대폭 줄이는 관행이 당연한 것처럼 행해졌다. 그날 저녁, 내 사수를 비롯해 친하게 지내던 노동자들과 공장에서 꽤 떨어진 술집에 모여서 다음날 대응 행동을 의논했다.

이튿날 아침, 사람들이 공장에 들어가지 않고 운동장에 모였다. 10명 정도를 빼고는 모두 기계를 세우는 데 동참했고, 우리는 사장 면담을 요청했다. 사장이 나오지 않자 인천노동청으로 몰려갔다. 한 시간이나 지났을까, 담당 근로감독관이라는 사람이 나와서 회사와 얘기가 됐다면서 해고는 없던 일로 하겠다고, 내일부터 다시 출근하면 된다고 했다. 별로 한 일도 없고, 파업 같지도 않은 집단행동이었지만 하루 만에 이뤄낸 승리였다. 그날 저녁 술집에 모인 우리는 모두 신이 나서 술을 거나하게 마셨다.

문제는 다음날부터였다. 회사 쪽에서 노동자를 한명한명 불러 회유했고, 불려갔던 이들은 모두 회사를 떠났다. 집단행동을 주도했던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서 학출인 것이 드러나 부평경찰서로 신병이 넘겨졌다. 마침 고향 선배가 그 경찰서 소속 경찰이어서 훈방으로 풀려날 수 있었다. 당시 위장 취업한 학출을 색출하느라 난리였는데 그나마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뒤부터는 해고자투쟁위원회 소속으로 활동했다. 밤에 ‘피세일’(유인물 돌리기)을 하고, 낮에는 현장 투쟁 지원을 나가거나 가두투쟁에 전투조로 참가하는 게 주된 일이었다. 그해 3월에 구로공단 신흥정밀에서 일하던 박영진이 분신했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살인적인 부당노동행위 철회하라, 노동3권 보장하라”는 요구 뒤였다. 그의 시신은 경찰에 의해 벽제화장터에서 화장된 뒤 뿌려졌다. 나중에 노동자들이 유골을 수습했고, 이소선 어머님이 보관하다가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하기로 했다고 했다.

4월 중순쯤이었고, 해고자투쟁위원회에서 활동한 지 오래되지 않았을 때였다. 마석역에 도착하니 역 앞에서부터 경찰과 노동자들 사이에 투석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겨우 경찰 저지선을 뚫고 마석 모란공원에 도착했는데, 모란공원 주위도 경찰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거기서도 싸움이 벌어졌고, 오후가 되어서야 겨우 유골을 안장할 수 있었다. 먼발치에서 이소선 어머님을 뵐 수 있었다. 어머니와의 첫 만남이었다.

정국은 요동치고 있었다. 전두환 정권의 탄압은 거셌지만, 제1야당이었던 신민당은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면서 전국에서 개헌추진위원회 현판식을 열었다. 4월28일에는 서울대생 김세진, 이재호가 신림사거리에서 분신했다. “미제용병 교육, 전방입소 철폐”를 주장했던 그들의 분신은 충격이었다.

1986년 5월3일 오후 인천시민회관에서 열릴 계획이던 신민당 개헌추진위 인천·경기지부 결성대회장 주변에 모인 시위대. 연합뉴스

1986년 5월3일, 인천에서 개헌추진위원회 현판식 일정이 잡혔다. 이날 당시 모든 운동권이 “인천을 해방구로!”를 외치며 집결했다. 경찰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화염병을 반입할 방법을 고민하다가 고물장수로 위장해 리어카를 이용해 운반하기로 했다. 딱 알맞은 외모를 지닌 내가 그 역할을 맡았다. 예상대로 인천 시민회관 주변은 경찰의 경비가 삼엄했다. 태연하게 리어카를 밀고 들어갔다. 10m쯤 전진했을까? 별 의심 없이 길을 터줬던 경찰이 갑자기 “저거 뭐야?” 하고 소리치자 경찰들이 우리를 잡으려고 몰려들었다. 다행히 주변에 있던 동지들이 경찰들을 밀어내면서 화염병 운반에 성공했다.

인천시민회관 주위는 격렬한 전쟁터와 다름없었다. 경찰과 투석전이 벌어졌고 여기저기서 내가 반입한 화염병이 날아다녔다. 그 와중에 시민회관 앞에서 동생을 만났다. 아주 오랜만에 만난지라 기쁨에 서로 부둥켜안았다. 투쟁 중에 만나니 더 반가웠다. 거기서 우상호도 만났다. 경찰에 밀리면서 오전에 시작된 투쟁이 저녁 무렵까지 이어졌다. 이날 시위로 총 319명이 연행됐고 그중 129명이 소요죄로 구속되었다. 해고자투쟁위원회 소속 노동자들은 화염병 반입과 폭력투쟁 주도 혐의로 비공개 수배를 당했다.

1986년 5월3일 오후 인천시민회관에서 열릴 계획이던 신민당 개헌추진위 인천·경기지부 결성대회장 주변에 모인 시위대가 화염병, 벽돌 등을 던지며 격렬한 시위를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그러던 중 미제국주의를 반대하는 노동자의 목소리를 세상에 알려야 한다는 지도부 방침에 따라 1986년 5월30일 한미은행 점거 시위에 참여했다. 인천지역 해고자들이 중심이 됐다. 학출도 있었고, 노출도 있었다. 영등포 한미은행에 청소부가 청소하느라 문을 열어둔 틈을 타고 우리는 은행 2층을 점거한 뒤 바리케이드를 쳤다. 경찰은 소방차를 동원해 유리창에 소방호스로 물을 쐈다. 압력이 얼마나 센지 유리창이 모두 깨졌다. 일부는 해머로 벽을 부수고 거칠게 진입했다. 나는 “노동자, 농민 피땀 짜는 미제국주의 몰아내자!” “광주학살 원흉 군부독재 양키 처단하자!”는 현수막을 내걸고 창에 매달려 계속 구호를 외쳤다. 그러다가 밀고 들어온 경찰에 떠밀려 바닥으로 떨어졌다. 미처 땅에 닿기도 전에 경찰 군홧발이 내 얼굴을 짓밟았다. 그길로 영등포경찰서로 연행되었고 구속됐다. 내 생애 첫 번째 구속이었다. 깨어진 유리창에 올라가 구호를 외치는 내 사진이 다음날 신문에 실렸다.

1986년 5월30일 서울 영등포 한미은행을 점거한 뒤 창에 매달려 반미 구호를 외치고 있는 박래군 사진이 경향신문에 실렸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박래군 |36년째 인권운동가로 살고 있다. 유가협, 인권운동사랑방, 인권재단 사람을 거쳐서 현재는 4·16재단 운영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 ‘상처는 언젠가 말을 한다’ ‘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 ‘사람 곁에 사람 곁에 사람’, 공저서 ‘이따위 불평등’ ‘새로고침’ ‘살아남은 아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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