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릿’으로 돌아온 열정 박지일∙냉정 남명렬…“연기는 속성 자체가 가짜”

임석규 기자 2024. 5. 27.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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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에 끼지 말되, 일단 끼게 되면 본때를 보여줘." 배우 박지일(64)의 작달막한 체구가 격정에 찬 목소리를 뿜어낸다.

남명렬과 박지일은 명확한 발성, 꼼꼼한 인물 분석, 지적인 연기로 무대와 매체를 넘나드는 배우다.

남명렬은 "실제로 저는 무대에서 조금 냉정한 편이고 박지일은 굉장히 열정적인 배우"라고 했다.

박지일은 "수많은 약속으로 이뤄진 무대에서 배우는 약속을 잘 수행하면서 그 안에서 자유로워야 한다"며 "메소드 연기는 폐해와 단점이 훨씬 크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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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에 폴로니우스 배역 더블캐스트
전무송-이호재 잇는 ‘브로맨스 콤비’
30년 넘게 숱한 무대에 함께 오르며 서로를 다독여 온 동년배 배우 남명렬(왼쪽)과 박지일은 연극계에서 전무송-이호재를 잇는 브로맨스 콤비로 거론된다. 신시컴퍼니 제공

“싸움에 끼지 말되, 일단 끼게 되면 본때를 보여줘.” 배우 박지일(64)의 작달막한 체구가 격정에 찬 목소리를 뿜어낸다. 지난 24일 서울 중구 충무아트홀 6층 연습실. 뒤쪽에서 물끄러미 이 장면을 지켜보던 배우 남명렬(65)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번진다. 두 사람은 신시컴퍼니 제작 연극 ‘햄릿’에서 폴로니우스 배역을 더블캐스트로 연기한다. 이날 연습실은 이호재, 박정자, 길용우, 김성녀, 정경숙, 손봉숙 등 쟁쟁한 배우들이 내뿜는 열기로 뜨거웠다.

남명렬과 박지일은 명확한 발성, 꼼꼼한 인물 분석, 지적인 연기로 무대와 매체를 넘나드는 배우다. 30년 넘게 벗이자 경쟁자로 숱한 무대에 함께 오르며 서로를 격려하고 다독여왔다. 연극계에선 두 사람을 이호재-전무송의 맥을 잇는 ‘브로맨스 콤비’로 거론한다. 80대에 ‘긴장의 전무송, 이완의 이호재’가 있다면, 60대엔 ‘열정의 박지일, 냉정의 남명렬’이 있다고 할까. 남명렬은 “실제로 저는 무대에서 조금 냉정한 편이고 박지일은 굉장히 열정적인 배우”라고 했다. 그러자 박지일은 “연기는 뜨거움 속에 냉정함을 유지하는 게 제일 중요한데, 저도 사실은 이성적”이라며 웃었다.

이호재, 전무송과 남명렬-박지일 두 명콤비가 이번 ‘햄릿’에 동시에 출격한다. 박지일은 “한시대를 풍미했던 배우들이 연습실에 나란히 앉아있는 걸 보면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라고 했다.

연극 ‘햄릿’에서 배우 박지일과 더블캐스트로 폴로니우스를 연기하는 배우 남명렬. 신시컴퍼니 제공

햄릿의 연인 오필리아의 아버지이자 햄릿이 왕으로 착각해 죽이는 인물 폴로니우스는 극의 흐름을 비극으로 치닫게 하는 캐릭터. 연극에선 대체로 희극적 인물로 그려진다. “자신의 지적인 우월감을 장황하고 수다스럽게 드러내서 희극적으로 보이는 인물이죠.” (박지일). “본인이 왕을 옹립한 킹메이커라고 생각하는 인물로 설정해 연기해보려고 해요.” (남명렬)

박지일이 “어쨌거나 재미있게 표현해야 하는 인물”이라고 하자, 남명렬은 “웃기되, 그 질감이 광대가 나와서 웃기는 것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답했다. ‘지적 우월감 속에 권력을 향한 탐욕을 품은 수다쟁이 폴로니우스’를 지적인 연기가 일품인 두 배우가 어떻게 풀어낼지 궁금해진다.

연극 ‘햄릿’에서 배우 남명렬과 함께 폴로니우스 역을 연기하는 배우 박지일. 신시컴퍼니 제공

부산에서 연극을 하던 박지일은 1993년 산울림소극장 연극 ‘죄와 벌’로 서울 연극계에 데뷔한다. 6개월 뒤에 대전에서 활동하던 남명렬도 산울림소극장 연극 ‘불의 가면-권력의 형식’에 출연한다. 두 사람 모두 산울림소극장 예술감독이던 채윤일 연출의 제의를 받고 비슷한 시기에 서울살이를 시작한 것. 둘 다 대학 연극반 출신에, 세상 보는 눈도 비슷했던 두 사람은 잠시 같은 집에 살 정도로 가까웠다. 같은 배역을 번갈아 연기하는 더블캐스트 출연은 지난해 연극 ‘오펀스’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 박지일은 “경쟁심 같은 게 없어서 훨씬 편하다”고 했다. 남명렬은 “더블캐스팅은 선배든, 후배든 미묘하고 조심스러운 게 많은데, 우리 둘은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을 수 있어서 좋다”고 말했다.

명확한 발성과 꼼꼼한 인물 분석, 지적인 연기로 무대와 매체 연기를 넘나드는 배우 남명렬(왼쪽)과 박지일. 신시컴퍼니 제공

두 사람에게 1601년 세상에 나온 ‘햄릿’을 21세기에 공연하는 이유를 물었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 되새기게 하잖아요. 극적으로 이야기가 다채롭고 재미있죠.” (남명렬) “인간의 부질없는 욕망을 성찰하게 하는 작품이죠.” (박지일)

감정과 생각을 배역에 완전히 몰입시키는 ‘메소드 연기’에 대해선 두 배우 모두 거부감을 드러냈다. 박지일은 “수많은 약속으로 이뤄진 무대에서 배우는 약속을 잘 수행하면서 그 안에서 자유로워야 한다”며 “메소드 연기는 폐해와 단점이 훨씬 크다”고 했다. 남명렬도 “배우는 무대에서 열정을 표현하되, 아주 냉정한 시선으로 자신을 보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대 위의 모든 약속이 다 깨져버린다”고 했다. “신들린 것처럼 연기해야지, 진짜로 신이 들리면 안 되는 거죠”(남명렬) “연기는 어디까지나 속성 자체가 가짜예요. 가짜임을 인식하고 진짜처럼 연기해야지 진짜로 해버리면 안 되죠.”(박지일)

두 사람 모두 서로의 장점을 부러워했다. “박지일은 끝없이 욕망해요. 배우로서 그런 자세가 필요한데, 늘 유유자적하는 저한테는 그런 게 없어요.”(남명렬) ”남명렬의 성실함엔 끈질긴 노력이 스며 있어요. 그가 뭘 붙잡으면 놓는 걸 본 적이 없어요. 저는 지금도 초연하지 못해요.”(박지일)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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