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준의 돈 이야기 <46>] 디킨스, 케인스 그리고 절약의 역설

신상준 한국은행 이코노미스트 2024. 5. 27.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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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킨스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의 고리대금업자 스크루지. /셔터스톡

찰스 디킨스는 대영제국의 황금기였던 빅토리아 시대를 대표하는 대문호다. 그의 대표작은 ‘올리버 트위스트’ ‘위대한 유산’ ‘하드 타임스’ ‘데이비드 코퍼필드’ ‘두 도시 이야기’ 등 끝도 없다. 이 소설들은 모두 할리우드에서 여러 차례 영화화되었다. 디킨스의 작품 중에서 경제학적 사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을 꼽으라면 아마도 ‘크리스마스 캐럴’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종교개혁

영국의 종교개혁은 16세기 헨리 8세가 자신의 육체적 욕망 때문에 교황과 관계를 끊고 가톨릭 수도원을 해산하면서 시작됐고, 그의 딸인 엘리자베스 1세가 영국 국교회의 수장이 되면서 완성됐다. 그 후 두 세기에 걸쳐 개신교는 계속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19세기에도 전통 귀족이 권력을 쥐고 있었지만, 산업혁명과 제국주의의 물결을 타고 부를 거머쥔 신흥 상공업자들의 부상을 막을 수는 없었다.

‘부(富)’를 어떻게 봐야 할까. 기독교 ‘구약성경’ 욥(Job)이 살던 시대처럼 신이 내린 축복의 징표로 보아야 할까. 아니면 값비싼 고통의 원천으로 보아야 할까. 금욕주의적 은둔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세속과 타락의 표지로 보아야 할까. 이것은 다양한 기독교 종파사이에서 오랫동안 계속된 논쟁거리였다. 예수는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태복음 19: 23~24)”라고 말했다. 일부 교파는 이승에서는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할 수 없지만 저승에서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두툼한 은행 잔고를 갖고 죽으면 천상에서 고급스러운 축하연을 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따라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태복음 7:16~20)”. 이 문장에서 예수가 말한 열매는 분명히 영적인 열매였을 것이다. 하지만 일부 기독교 이론가는 이 말이 물질적 열매를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부자가 되는 것을 신이 내린 축복과 은혜의 징표로 여겼다. 오늘날까지 미국의 근본주의 교단에서는 이런 입장을 신봉하고 있다.

고리대금

기독교도에게 고리대금(usury)이 허용된 것은 종교개혁 이후의 일이었다. ‘usury’라는 말은 원래 대출금 사용(use)을 의미했다. 종교개혁 이후 고리대금업자들은 고리대금으로 번 돈을 이자라고 바꿔 부르면서 사회적 금기와 법적 규제를 피해 갔다. 대출금에 이자를 물리는 것은 헨리 8세 이후 합법화되었다. 뚜껑이 열리자 많은 사람이 민첩하게 시장에 뛰어들었다. 이자율을 제한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효과가 없었다. ‘이자제한법’이존재하는 오늘날에도 그렇다. 사기꾼들이 학력 세탁, 경력 세탁을 통해 신분을 위장하듯 고리대금업자들은 명칭 세탁, 용어 세탁을 통해 존경받는 사업가로 변신했다. 오늘날 은행이 신용카드를 통해 건별로 고율의 수수료를 매기고 연 40%의 고리를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게 된 이유다.

19세기 서구에서는 자본주의가 폭발적으로 팽창했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오늘날 노벨상을 받은 경제학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아무런 노동도 하지 않고 큰 부를 거머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나자, 대중은 자본주의에 신비감을 느꼈다. 사악한 자본가가 횡재하도록 악마가 개입하여 도와주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호경기와 불경기가 주기적으로 나타났다. 어떠한 규제 장치도 사회 안전망이 없었기 때문에 불경기에는 극심한 고통이 만연했다. 특히 저소득층이 그랬다. 객관적 성공 확률이 절반이더라도 우월적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자본력과 시장 지배력, 음모와 협잡을 통해 그 확률을 바꿀 수 있었다. 이자에 대한 규제가 없어지자 고리대금의 의미는 ‘이자’ 부과에서 ‘엄청난 이자’ 부과로 변질되었다. 디킨스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의 고리대금업자 에버니저 스크루지는 이런 상황을 이용해 이득을 본 사람이다.

신상준 한국은행 이코노미스트연세대 법학 학·석사, 서울시립대 법학 박사, ‘중앙은행과 화폐의 헌법적 문제’ ‘돈의 불장난’ ‘국회란 무엇인가’ 저자

사자의 서

스크루지는 금욕주의자였다. 스크루지의 죄는 금송아지를 숭배하는 데서 비롯됐다. 스크루지의 동료였던 고리대금업자 말리는 생전에 지었던 죗값을 죽은 후에 치러야 했다. 고대 이집트의 ‘사자의 서’에 의하면 사람이 죽으면 생전의 공과를 측정하기 위해 죽은 자의 심장 무게를 재야 한다. 사후 세계로 가기 위한 최후의 심판인 것이다. 죽은 자의 심장을 저울에 올려놓고, 정의와 지혜의 여신 마트(Ma'at)의 깃털로 무게를 재는데, 심장이 깃털보다 무거우면 이승에서 많은 죄를 지었다고 여겨 사자의 몸통에 악어의 머리를 한 암무트(Ammut)가 그 심장을 먹어버린다. 그렇게 되면 죽은 자의 영혼은 영원히 사후 세계로 가지 못하고 이승을 떠돈다. 반면, 심장과 깃털의 무게가 일치하면 죽은 자의 영혼은 육체에 남아있던 바(Ba)와 다시 만나 부활하게 된다. 말리는 죽은 뒤 고대 이집트인이 행했던 것과 비슷한 통과의례를 겪는다. 그의 모든 죄는 19세기 자유방임적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행해지던 가혹한 비즈니스 방식에서 생겨났다. 말리는 죽은 뒤 ‘철로 만든 무거운’ 현금함, 열쇠, 자물쇠, 회계장부, 채권 증서, 돈지갑이 주렁주렁 달린 쇠사슬을 짊어져야 했다.

소설이 끝날 무렵 무거운 황금 사슬에서 해방된 스크루지는 돈을 쓰기 시작한다. 다른 사람을 위해 돈 쓰는 행위를 통해 디킨스가 가장 소중하게 여겼던 ‘가슴’의 관대함을체험하게 된다. 하지만 요점은 ‘다른 사람을 위해’가 아니라 ‘돈을 쓰는’ 데 있었다. 디킨스 이전 시대였다면 자신의 모든 재산을 남들에게 나누어 준 뒤 거지가 되어야 거룩한 행위로 칭송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디킨스는 스크루지가 부자라는 사실을 문제 삼지 않았다. 그의 작품에는 호감형 부자가 여럿 등장하기도 한다. 재산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재산을 어떻게 모으느냐의 문제도 아니다.

절약의 역설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느냐’다. 스크루지가 저지른 죄는 자신의 돈을 동결한 것이다.돈은 돌고 돌아야 효용이 생긴다. 돈은 다른 것과 바꿔야만 가치를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돈을 다른 것과 바꾸기를 거부한 스크루지는 돈이 도는 데 지장을 준 것이다. 경제학자들이 돈을 통화(currency·흐름)라고 부르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스크루지의 행복한 결말은 자본주의의 핵심적 신념과 일치한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1930년대 대공황 시기에 ‘절약의 역설’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그는 대공황이라는 급격한 경기 침체기에 민간 부문에서 투자와 소비가 줄고 저축이 늘어나는 것에 주목했다. 케인스는 저축상승이 실업과 유휴자본 같은 자원 낭비를 초래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민간 부문이 소비하지 않는다면 정부가 관여해 소비를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간 부문이 저축을 늘리면 정부가 자금을 빌려 경제에 투자해야 한다는 것이다.

스크루지와 케인스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저축은 나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일반적으로 높은 저축률은 장기적인 경제성장에 중요한 요소다. 가계의 저축률이 높으면 은행이 기업에 대출해 줄 수 있고 기업은 그 돈으로 투자 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 특히 개발도상국에서는 높은 저축률이 투자와 경제개발을 촉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장기 저축률은 고령화 문제에 대처하기 위한 중요한 요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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