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나의 시네마 에세이 <96> 프레스티지] 집착을 버려라, 높고 푸른 뜻을 품어라
마술사가 예쁜 새 한 마리를 새장에 넣고 보자기를 덮는다. 눈 깜짝할 사이 새장을 납작하게 눌러 버리고 보자기를 걷으면 테이블 위엔 아무것도 없다. 새는 어디로 갔을까. 관객이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마술사의 다른 손에서 작은 새가 자유롭게 날갯짓한다. 관객은 안도하며 기쁨의 박수를 보낸다. 관객이 본 것은 실재일까, 환상일까. 살아 있음을 기뻐하듯 높이 날아오른 새는 조금 전 새장에 가두었던 그 새일까.
보든은 경쟁 마술사 엔지어를 살해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는다. 사건 현장을 목격한 마술 감독 커터는 물탱크에 빠져 죽어가던 엔지어를 보든이 지켜보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사형 집행을 기다리던 보든에게 마술 애호가 콜드로 경이 보낸 변호사가 찾아온다. 그는 순간 이동 마술 비법을 알려주면 혼자 남을 어린 딸을 콜드로가 보살펴 줄 거라 말한다. 보든은 고민하며 변호사가 건넨 엔지어의 일기를 읽는다.
한때 동료였던 그들이 철천지원수가 된 건 수중 탈출을 연기하던 엔지어의 아내가 보든이 묶은 매듭을 풀지 못하고 마술 공연 중 익사했기 때문이다. 절망에 빠져 있던 엔지어는 갓 태어난 딸아이를 안고 아내와 행복해하는 보든의 모습을 보고 마음의 칼을 간다. ‘보든이 내 삶을 훔쳐 갔으니 나는 그의 마술을 훔치겠다’고 결심한다.
그는 보든의 공연장에 찾아가 총을 쏜다. 두 손가락을 잃은 보든도 엔지어의 다리를 부러뜨리며 복수의 열차에 오른다. 이해와 용서를 외면한 채 술잔 돌리듯 반복되는 복수의 순환은 어느 한쪽의 죽음, 또는 양쪽 모두의 죽음을 불러들인다.
복수를 주고받는 사이에도 보든은 순간 이동 마술로 인기를 얻는다. 절망에 빠진 엔지어도 시기심에 불을 지피며 보든을 흉내 내 더 화려한 순간 이동 마술을 선보이지만 성에 차지 않는다. 대역을 쓰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커터가 말했지만 엔지어는 믿지않는다. 천재적인 아이디어를 가진 보든이 그렇게 쉬운 마술을 할 리 없다고 단정한다.
‘가장 단순한 것이 진실’이라는 오컴의 면도날 원칙에는 ‘설마, 그럴 리가’ 하며 외면하게 되는 논리의 함정이 있다. 무대를 장악하는 능력이 탁월했던 엔지어는 대역이 자신인 척, 관객의 박수를 독차지하는 것도 맘에 들지 않는다. 보든은 어떤 방법으로 순식간에 다른 곳에 나타나 관객의 갈채를 받는 것일까. 그는 비법을 알아내기 위해 출구 없는 집착의 미로 속으로 더 깊이 발을 밀어 넣는다.
문제는 또 있었다. 순간 이동 마술에 꼭 필요한 엔지어의 대역 배우가 비밀을 지키는 대가로 계속해서 더 많은 돈을 요구하며 협박했다. “통제할 수 없는 마술은 그만둬야 한다”며 지혜로운 커터가 조언했지만, 보든을 앞지르겠다는 생각에만 빠져 있던 엔지어는 더 빠른 속도로 종착역을 향해 달리며 자신을 채찍질한다.
“자넨 마술사지 마법사가 아니야.” 옆에서 균형을 잡아주던 커터도 경쟁에 눈이 먼 엔지어의 고집을 꺾지 못한다. 복수는 더 이상 엔지어의 최종 목표가 아니다. 아내를 잃은 슬픔마저 보든을 이기겠다는 야심, 그를 밟고 서서 최고가 되겠다는 야망의 변명거리로 전락한 지 오래다. ‘집착은 젊은이의 전유물’이라고 이해하면서도 커터는 결별을 선언한다.
사람들이 곁을 떠날 때는 자신을 냉정하게 점검해야 한다. 모든 걸 다 가졌으면서도 만족할 줄 모르던 엔지어는 무엇보다 자신을 믿지 못했다. 보든을 실제보다 더 크고 완전한 존재로 부풀려 인식했고 그에 대한 시기심은 열등감으로 전이되어 자신을 괴롭혔다. 혼자 남은 엔지어는 날개 없이 높이 나는 새였다. 추락 끝에 산산이 부서질 걸 알면서도 멈출 줄 몰랐다.
마술에는 사람이나 물체를 나타났다 사라지게 하는 일루전 매직, 마음을 읽어내는 멘털 매직, 카드나 동전 같은 소품을 이용하는 클로즈업 매직 등이 있는데, 어떤 종류든 가장 어려운 마술이 완성되는 단계를 프레스티지(prestige)라고 한다. 프레스티지에 이르는 길은 부단한 연구와 쉼 없는 연습뿐, 다른 비법이 있을 리 없다. 그런데도 엔지어는 보든의 마술을 훔쳐서 현란한 쇼맨십으로 포장하면 최고가 될 수 있다고 자만한다.
그는 에디슨과 라이벌 관계였던 테슬라를 찾아간다. ‘마술은 눈속임이고 과학은 확률의 싸움’이라며 테슬라는 ‘불가능을 향한 도전이 가져올 결과’를 감당할 각오가 되어 있느냐고 묻는다. 복수와 승리 말고는 안중에 없던 엔지어에게 ‘집착의 노예는 결국 파멸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도 테슬라는 그가 요청한 마술 도구를 제작해 준다.
테슬라의 과학기술을 이용한 순간 이동 마술은 엔지어를 마침내 ‘런던 최고의 공연가’ 반열에 올려놓는다. 엔지어는 승리했고 보든은 패배를 인정했다. 하지만 왜일까. 기쁨과 만족은 잠깐뿐이었고 엔지어에겐 정상에서 내려가는 일만 남는다.
엔지어의 일기를 덮으며 보든은 비로소 자신이 왜 감옥에 있는지 깨닫는다. 엔지어는 무대에서 혼자 내려갈 생각이 없었다. 그는 보든을 동행 삼아 마침표를 찍을 작정이었다. 아무도 죽이지 않았지만 보든은 엔지어의 각본대로 교수대에 오른다.
마술을 빌려 복수의 허망함을 전한 영화의 이야기는 마지막 반전을 위한 서론일 뿐, 눈앞에서 사라진 새장 속 새의 이야기는 아니다. 엔지어가 알고 싶어 했던 보든의 순간 이동 비법은 간단했지만 ‘좋은 마술을 하려면 희생은 필수’라던 커터의 말처럼 소중한 것들을 제물로 바쳐야 했다. 테슬라의 과학을 이용한 엔지어의 성공도 보든이 포기한 것보다 더 큰 것을 상실한 결과였다.
유명 마술사를 인터뷰한 적 있다. 매일 방송 스케줄에 쫓기면서도 하루 열 시간의 연습을 빼놓지 않았던 그는 문득 왜 이렇게 힘들게 사나, 회의했다. 그를 슬럼프에서 건져낸 건 ‘꿈을 좇지 말고 높은 뜻을 품으라’는 한마디였다. 그는 최고로 인정받고 싶은 집착을 내려놓고 많은 사람을 꿈꾸게 하는 마술사가 되겠다는 뜻을 품고 지금도 활발히 활동 중이다. 당신은 꿈꾸는 사람인가, 높고 푸른 뜻을 품은 사람인가? 하물며 복수와 경쟁심은 얼마나 쓸쓸한 야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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