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훈의 미술관 산책 <10>] 고흐와 고갱이 불교에 심취한 사실을 아시나요
1887년 11월 빈센트 반 고흐는 자주 다니던 레스토랑에서 동료 작가들과 함께 100여 점의 작품을 전시했다. 그 무렵 처지가 곤궁했던 폴 고갱은 고흐의 작품을 보러 전시회장을 방문했다. 고흐와 고갱의 첫 만남이었다.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각자의 자화상을 교환하기로 했다. 두 사람은 고흐의 동생이며, 미술품 딜러였던 테오의 소개로 만나게 되었다. 테오는 전시회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갱의 그림 하나를 자신의 컬렉션으로 구입했다. 그것은 테오가 구입한 미술품 중 가장 비싼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고흐는 고갱에게 아를에서 같이 작업하기를 권하는 편지를 썼다.
“친애하는 벗 고갱에게, 내가 얼마 전 아를에 방 네 개짜리 집을 빌렸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싶소. 남부에서 작업할 마음이 있고, 수도승처럼 살아갈 화가를 찾게 된다면, 아주 기쁠 겁니다.”
고흐는 수도승이 되고 싶었을까
고흐는 예술 공동체를 꿈꾸며, 호기롭게 자신과 고갱을 예술혼에 불타는 고행의 길을 가는 수도승에 비유했다. 이 편지를 시작으로 그들은 서로의 자화상을 교환하며, 예술적 영감을 공유했다. 고갱에게 헌정된 고흐의 자화상은 그의 다른 자화상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전체적인 느낌은 말끔하고, 영적이다. 머리와 턱수염을 깎은 마른 모습의 군더더기 없는 얼굴과 단정하게 입은 파란색 테두리가 있는 갈색 코트. 갈색이지만 보라색의 기운을 불어넣어 단정함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것은 그림의 배경이다. 머리의 그림자도 없이 두껍게 칠해진 맑은 하늘 같은 푸른 배경 색은 성인들의 후광처럼 동심원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동심원 같은 배경 색은 머리 주변에서는 밝게 시작하여 가장자리로 갈수록 어두워진다. 불교의 수도승 같은 느낌이다. 이러한 생각은 그가 동생 테오에게 남긴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나는 고갱에게 편지에 대한 답장으로 자화상에서, 나의 개성과 인상파의 정신을 전달하려고 노력했으며, 영원한 부처의 숭배자로 자화상을 생각했다.”
그는 편지에서 자신을 부처를 숭배하는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다. 고행의 수도승처럼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인상파의 정신을 이어받아 예술에 대한 열정에 따라 그림을 그리겠다는 각오를 나타내고 있다. 고흐가 부처의 가르침을 얼마나 많이 받아들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는 불교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고 끊임없는 고뇌와 번뇌 속에서 예술혼을 불태우고 있었던 것이었다.
폴 고갱은 왜 불교에 심취했을까
‘폴 고갱은 왜 불교에 심취했을까?’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은 그의 작품 세계와 인생을 살펴보는 과정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는 화가의 길로 들어서기 전에 안정된 직장인으로 증권회사에 다녔다. 이후 증권회사를 그만두고,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그즈음 고갱은 결혼과 동시에 부인의 고향인 덴마크 코펜하겐으로 터전을 옮겼다. 그곳에서 사업을 벌였으나 실패하고 생활고와 불화로 1885년 여섯 살 아들 클로비스와 함께 프랑스 파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파리의 미술계는 다시 돌아온 고갱을 반기지 않았다. 1888년 혹독한 가난을 경험하던 고갱은 고흐의 제안으로 아를에서 고흐와 같이 지내게 되는데, 이마저도 둘 사이의 의견 차이로 헤어지게 된다. 빈곤과 고독, 그리고 욕망을 채우지 못하는 현실은 그에게 가장 혹독한 시간이었다. 이 혹독한 시간에 그는 불교에 심취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갱은 불교적인 이미지를 여러 작품에 차용하기도 했는데, 작품의 제목을 불교의 열반을 의미하는 ‘니르바나’라고 명명하거나, 작품 속에서 타히티 원주민을 가부좌한 부처를 연상시키는 모습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가장 직접적인 표현은 목판화 작품이다. 검은빛의 갈색 톤으로 인쇄된 목판화는 불상을 연상시킨다. 고갱은 작품을 통하여, 자기 삶과 부처를 결부시키고 있다.
“부처님, 신을 잉태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했지만 인간의 지혜를 완전히 잉태하고 완전히 이해한 분은 그 영원한 행복, 열반, 시대를 통한 진보적인 움직임에서 영혼의 마지막 단계에 도달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이 지혜를 얻음으로써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그가 남긴 가장 대작인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는 인간 삶의 의미와 근원을 탐색하는 다분히 불교적인 선문답 같은 작품이다. 대부분 작품에 캔버스를 사용했지만, 이 작품에는 거친 터치가 느껴지는 삼베를 사용했다.
또 붉은 기운의 열대지방을 표현하던 야생의 색이 아닌 어두운 빛깔의 군청색이 그림의 배경으로 표현되어 있다. 고갱이 한 달 만에 진력을 다해 완성한 이 작품은 제목만큼이나 여러 상징으로 유명하다. 그림을 그릴 당시 그는 그야말로 인생에서 최악의 상태였다. 건강 악화와 딸의 죽음, 재정 파탄 등 그의 주변에는 불행의 기운들만 있었다. 이러한 번민을 안고서, 그가 예술 작품으로서 삶의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만든 작품이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이다.
그림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크게 세 장면으로 우리의 일생을 표현하고 있다. 신성한 탄생기와 욕망의 성장기 그리고 죽음을 앞둔 노년기를 나타내고 있다. 잠자는 어린아이의 모습에서는 신성함과 순수함이, 가운데 과일을 따는 모습의 성장기에는 원죄의 사과처럼 인간의 탐욕과 욕망이, 죽음을 앞둔 노년기에는 뒤편에 있는 내세의 평안을 상징하는 부처처럼 보이는 조각상이 있다. 부처처럼 보이는 조각상은 두 팔을 크게 벌려 세상의 고통을 자비로써 보듬는 모습을 하고 있다. 조각상을 인생의 노년기에 배치함으로써 죽음을 앞두고는 욕망과 탐욕보다 내세 평안의 중요성을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고흐와 고갱은 비교적 늦은 나이에 화가의 길로 들어섰고, 둘 다 독학으로 예술혼을 불태웠지만, 두 사람은 기본적으로 다른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서양미술사’를 저술한 곰브리치는 “인간적으로 고갱은 고흐와는 아주 달랐다. 그는 고흐가 지닌 겸손함이나 사명감 따위는 전혀 없었다. 반대로 오만하고 야심만만한 사람이었다”라고 평했다.
현실에서의 가난과 고독 그리고 가족과 분리 등 고통의 길에서 혹은 더 나은 예술을 위한 끊임없는 고민의 길에서, 고흐는 수도승처럼 불교의 가르침을 되새겼다. 반면 고갱은 탐욕과 욕망으로 자신을 불태운 과거를 속죄하는 마음으로 부처의 자비를 작품에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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