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는 최고령의 할매, 엄마 [플랫]
내가 아는 최고령의 할매는 엄마다. 이 글을 쓰기 전까지 내 엄마도 할매라는 당연한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다. 엄마는 할매가 아니고 그냥 엄마였으니까.
내 엄마는 1926년생, 올해 98세다. 구례 내려오기 전까지 나는 우리 엄마가 그 세대 중 고생으로는 상위 0.1%에 들 거라 확신했다. 1948년 겨울부터 1954년 봄까지 지리산에서, 체포된 이후 7년간 감옥에서 어떤 고초를 겪었을지 경험하지 않은 나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다. 엄마는 마흔이 다 되어 세상으로 돌아왔다. 가난과 산에서 얻은 위장병이 천형처럼 찰싹 들러붙은 엄마의 삶은 내내 고달팠다. 노년에는 고된 노동으로 척추협착증까지 얻었다. 구례 내려와 알았다. 시골 할매치고 엄마보다 고달프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을. 그 시대의 누구나 엄마만 한, 때로는 엄마보다 더한 삶의 무게를 견뎌냈다는 것을. 그 사실을 깨닫고 난 뒤 엄마가 아픈 추억을 들먹일 때마다 나는 야무지게 엄마 말을 뚝 잘랐다.
알고 보니 엄마는 고생 안 한 편이던데? 태어나자마자 부모 잃은 사람, 굶주려 죽은 사람 천지인 시대였잖아. 엄마는 산에 들어가기 전까지 굶지도 않았잖아? 공부 못한 게 한일 뿐이지. 산에서 고생한 건 엄마 선택이었고.
매몰찬 딸의 말에 엄마는 할 말을 잃었다. 속 깊고 다정한 성품의 엄마는 객관적이다 못해 냉정한 딸의 말이 늘 서글펐으리라. 그러나 한 번도 나를 나무란 적이 없다. 나무라기는커녕 노상 고맙단다. 사실 엄마를 모시면서 걱정이 많았다. 꼼꼼하고 치밀한 성격의 엄마가 늙어가면서 사람들을 괜히 의심하고 미워하지는 않을지 그게 제일 큰 걱정이었다. 그런 노인들을 많이 본 탓이다. 엄마 성격상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을 것 같았다. 기우였다. 엄마는 언젠가부터 나쁜 말을 하지 않는다. 부정적인 말을 다 잊어버린 게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다.
얼마 전 오랜만에 사촌 동생이 왔다. 워낙 고령이라 오래 보지 않은 사람은 잘 기억하지 못하는 엄마가 보자마자 동생의 손을 잡고는 등을 두드렸다. 아이, 니가 에레서부텀 그리 이삐고 똑똑했니라. 동생이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내가?
순간 나와 동생의 눈이 마주쳤고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동생이 착하긴 했지만 예쁘고 똑똑하다는 말을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수준이라는 걸 자기도 알았다. 듣기 좋으라고 그렇게 말한 것인지 기억의 왜곡이 일어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아무튼 늘 그런 식이다. 늙으면서 새롭게 변조된 엄마의 기억 속에서 나는 언제나 착했고, 엄마 속을 썩인 적이 없다. 당연히 사실이 아니다. 십여년 전까지만 해도 엄마는 사춘기 시절의 내 꿈을 꾸고 놀라서 잠이 깼다. 어린 게 어쩌면 그렇게 독할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벌렁거린다고 토로한 적도 있다. 엄마는 고통스러운 기억을 가장 먼저 잊었다. 산에서의 기억만 빼고(그러니까 지리산에서 보낸 청춘의 시간이 엄마에게는 고통이 아니었을지 모른다는 합리적 의심이 든다).
요즘 엄마의 말을 들을 때마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요동친다. 밥을 차려갈 때마다 엄마는 말한다. 하루도 빠짐없이 반복되는 밥상머리의 대화는 대충 이러하다. 아이, 나가 오래 상게 니가 고상이다. 고생은 무슨. 하루 세 끼 밥 채리는 것이 고상이제. 정확히는 두 끼다. 하루 두 끼인 게 얼마나 다행이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못된 딸이다, 나는.
엄마는 하루 세 끼, 이십 년 나를 먹여 살렸잖아. 엄만디 자석 묵에 살리는 것이 당연허제. 딸인디 엄마 묵에 살리는 것이 당연허제. 아이가. 부모허고 자석허고 똑같가니? 시상에 니 겉은 딸 없다. 나가 워치케 니 겉은 딸을 났능가 참말 신기해야. 씨헐라고 났능갑서. 먹는 즐거움조차 천천히 잊어가는 엄마가 유일하게 맛있어하는 사골국을 먹다 말고 식탁에 쌓여 있는 뉴케어와 과자를 둘러보면서 배시시 웃는다. 시상에 나 겉이 행복한 사램 있으먼 나와보라 그래라. 나가 먼 복이 이리 많은가 모리겄어야. 우리 딸이 최고다, 최고! 이토록 소박한 엄마의 감사는 혹 맛있는 거 하나 제대로 먹지 못하고 살아온 가난한 삶의 결과물이 아닐까. 더 많은 것을 누렸으면서도 불평불만투성이인 나는 누린 것도 없이 감사할 줄 아는 엄마가, 엄마 세대의 할매들이 경이롭기만 하다.
▼ 정지아 소설가
플랫팀 기자 fla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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