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격노’는 죄가 아니지만 해명이라도 해야 [핫이슈]

김병호 기자(jerome@mk.co.kr) 2024. 5. 27.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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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 러시아 특파원을 했다는 이유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인기가 왜 지금도 높은지에 대한 질문을 종종 받는다. 그때마다 꼽는 이유 중 하나는 ‘적절한 화내기’다. 러시아 TV 뉴스에서는 푸틴이 최고위 관료, 여당 의원, 기업 총수 등을 상대로 1대 1로 대화하는 장면이 거의 매일 나온다. 이들이 탁자를 두고 마주 앉아 대화하는 내용을 들려주는데 여기서 푸틴은 상대방 잘못을 지적하고 화를 낸다. 장관한테는 지난번 지시한 일의 진행속도가 느리다며 타박한다. 러시아 재벌(올리가르히)은 푸틴 앞에서 고개를 숙인 채 꾸중을 듣는다. 이를 본 많은 국민은 “우리 대통령 열심히 일한다”고 느낀다. 꼴보기 싫은 관료와 정치인, 돈 많다고 폼잡는 기업인을 불러다가 대통령이 직접 혼내주니 국민은 카타르시스를 얻는다. 이러니 연출일지라도 푸틴에 대한 국민 지지는 계속된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크렘린에서 베로니카 스크보르초바 의생물학청 청장을 만나고 있다. 2022.3.16 모스크바 AP 연합뉴스
우리 같으면 대통령이 상대방을 함부로 대한다면서 온통 시끄럽겠지만 러시아에서는 그런 게 통한다. 푸틴의 분노 방식을 우리 대통령도 해볼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20년 7월 문재인 대통령은 수차례 부동산 대책을 내놔도 소용이 없자 당시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을 청와대로 긴급 호출했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국민이 문 대통령이 김 장관을 크게 질책하거나 더 나아가 해임 통보라도 할 줄 알았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열심히 잘 하고 있다며 오히려 더 강도 높은 처방을 주문했다. 국민은 자신들을 대신해 대통령이 장관을 좀 꾸짖어주길 바랬지만 문 정부는 반대로 갔다. 그러니 문 대통령 지지율과 부동산 정책에 대한 신뢰는 계속 추락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일에 지도자가 화도 내지 않고 얼렁뚱땅 넘어가면 국민 분노를 부채질할 뿐이다.

대통령이라는 지엄한 위치 때문에 최고통치권자가 화를 내면 대통령실은 물론 정부와 정치권, 국민까지 술렁인다. “무슨 일이래?” 하면서 말이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 격노’가 화두가 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소리를 쳤거나 성질을 부렸다고 할 일을 ‘분노’, ‘격노’라는 단어를 써가며 대통령 심기가 매우 불편함을 강조하려 든다.

채상병 특검 통과 촉구하는 이재명-조국 대표 (서울=연합뉴스) 김인철 기자 =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와 박찬대 원내대표,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 등이 25일 오후 서울역 앞에서 열린 야당·시민사회 공동 해병대원특검법 거부 규탄 및 통과 촉구 범국민대회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24.5.25 [공동취재] yatoya@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해병대원 채 상병 사망 경위 보고서상에 책임자 중 한 명으로 해병대 사단장이 포함된데 대해 윤 대통령이 격노했다는 얘기로 시끄럽다. 대통령 격노 때문에 해병대 수사단 보고서가 경찰에 이첩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일각에선 사단장까지 책임 추궁하는 게 과하다는 대통령의 정당한 의견 피력이라고 하지만 반대편에선 대통령의 개입으로 수사 차질을 빚은 직권남용으로 몰아간다. 유족 입장을 감안하지 않았다며 감상에 빠진 비난도 있다. 얼마 전 더불어민주당이 주도해 통과시킨 일명 ‘채상병 특검법’이 그렇게 해서 나왔다.

지금은 사망 원인에 대한 실체 규명보다 대통령이 누구를 빼내려고 격노했는지 여부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는듯하다. 공수처가 대통령 격노 관련 녹음 파일을 복원했다고 하니 들어보면 진짜 격노인지, 화낸 수준인지, 건의 차원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격노한 정황이 나오더라도 군 통수권자로서 당시 수색구조 업무 지휘관한테 과실치사를 묻는데 대해 대통령이 반대 의견을 낼 수도 있다고 본다.

물론 사태가 지금처럼 꼬인 것은 윤 대통령이 9일 기자회견은 물론 사건 발생 초기부터 격노설에 대해 함구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의혹은 커지고 특검 압박은 증폭됐다. 28일 국회 재의결에서 채상병 특검법은 처리되지 못해 자동 폐기됐다. 하지만 야당은 22대 국회에서 1호 법안으로 벼르고 있다. 윤 대통령과 여당은 경찰과 공수처 수사가 먼저라고 하지만 여당 내에서도 ‘특검 수용’ 얘기가 잇따라 나오고 있다. 윤 대통령과 이종섭 전 국방부장관 간에 지난해 7월 말~8월 초 수차례 통화한 것으로 드러나 사건 진위에 대한 국민 궁금증이 커지고 있다.

국민의힘, 채상병 특검법 야당 단독 처리 규탄 (서울=연합뉴스) 김주성 기자 = 국민의힘 윤재옥 원내대표 겸 당 대표 권한대행 등 의원들이 2일 오후 국회 본회의장 앞 계단에서 피켓을 들고서 ‘채상병 특검법’을 단독 처리한 야당을 규탄하고 있다. 2024.5.2 utzza@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어차피 야당은 이 건에 칼을 뽑은 만큼 절대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22대 국회는 윤 대통령에 한 맺힌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와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 추미애, 이언주 등 목소리 큰 의원들이 대거 포진해있다. 부정적인 뉘앙스의 격노설 확산은 윤 대통령이 처음부터 “이래서 이랬다”며 솔직한 얘기를 하지 않아 벌어진 일이다. ‘대통령의 격노’라는 프레임은 러시아 같은 권위주의 국가에서는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어도 우리한테는 좀 힘들다.

격노라는 단어가 주는 부정적 파급력을 멈추려면 대통령은 이제라도 자초지종을 밝히던지, 대국민 설명자료라도 준비해서 채상병 특검법의 모순점들을 엄숙하고 조리있게 조목조목 반박하길 바란다. 그래도 국민이 받아들이지 못하면 현 특검법 독소조항을 고쳐 특검을 수용하는 결단도 고민해야 한다.

김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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