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반도체 새 수장의 사인검
[편집자주] 재계 전반에 일어나는 일에 대한 사견(私見)일 수도 있지만, 이보다는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라는 누군가의 에세이집 제목처럼 세상의 문제를 깊이 있게 생각하고, 멀리 내다보자는 취지의 사견(思見)을 담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경 사장 입장에서는 2021년 12월에 취임해 전임 김기남 대표(현 고문)의 뒷처리를 해온 상황이라며 억울해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마냥 과거 탓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곳이 그 자리였다. 어쨌든 그가 맡은 시기에 고대역메모리(HBM) 반도체가 경쟁사에 밀렸고, 미세회로 공정도 초격차를 잃었다는 말이 나온다. 지난해 약 15조원의 반도체 적자는 치명타였다. 기업에선 전임자를 잘만나는 운도 실력이다.
경 사장 체제에서 2년반 동안 반전(HBM 납품 등)의 기회를 얻지 못한 게 경질의 결정적 요인으로 보인다. 한번 무너진 회사 분위기를 되살리는데 10년의 시간이 걸린다지만 삼성 반도체엔 느긋하게 기다려줄 시간이 없었다.
반도체 수장의 교체에 대한 삼성 내외부의 평가는 만시지탄이지만 긍정적 반응이 우세하다.사실 삼성 반도체의 위기는 경 사장 이전부터 쌓여온 것이다. 미래기술 개발에 미흡했고 우수인력 확보도 못해 경쟁사의 추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누적된 결과다.
전 부회장을 잘 아는 그의 선배들은 한 목소리로 "유순한 경계현 후임으로 그나마 전영현이 선임돼 다행이다"면서도 "그 외에 대안이 없다는 게 삼성 반도체엔 불행이다"고 말했다. 올드보이의 귀환은 삼성 반도체 내에서 후임 CEO 재목들을 그동안 제대로 키우지 못했다는 방증이다.
장강의 뒷물이 앞물을 밀어내는 게 순리인데, 앞물이 다시 수원(水原)으로 거꾸로 거슬러 올라간 모양새다. 미래전략실 전략1팀 출신의 김용관 삼성메디슨 대표(부사장)가 이동우 부사장이 맡고 있던 사업지원TF 반도체 운용임원으로 옮긴 것도 마찬가지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구원투수'로 나선 전 부회장이나 김 부사장이 반도체에 대한 다양한 글로벌 경험과 역량을 갖췄다는 점이다.
전 부회장은 오래 전부터 삼성 반도체의 문제점을 '후발주자에 대한 안이한 대처'로 꼽았다. 후발주자들은 삼성의 제품을 뜯어보고 기술과 사람을 빼가면서 추격해왔는데 삼성전자는 평소 하던대로 "내 기술만 열심히 개발하자"며 넋놓고 있다가 추격당했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그는 처절한 자기반성문의 토대 위에 초격차 회복을 위한 전략을 짜야 한다고 강조해왔다. 부임 초기에 삼성 반도체 내부에 강도높은 경영진단이 예상되는 이유다. SK하이닉스 뿐만 아니라 미국 마이크론도 어느새 삼성전자 턱 밑까지 쫓아왔는데도 삼성 반도체는 '초격차라는 과거 성공의 자만심'에 취해 현실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미국의 경영 컨설턴트인 짐 콜린스가 저서 '위대한 기업은 다 어디로 갔을까'에서 말한 '기업몰락의 다섯 단계' 중 첫번째 단계에 삼성 반도체가 진입한지 오래다. '성공으로부터의 자만심'이 이번 위기의 시발점이다. 핵심요직에 적임자가 배치되는 비율이 떨어지고 관료주의 시스템이 부각되는 '몰락 2단계'도 현재진행형이다.
삼성 반도체 내부에서는 AI(인공지능) 시대가 이렇게 빠르게 올 지 몰랐다고 한다. 위기를 가져올 변화를 제대로 탐지하는 능력이 사라진 것을 보면 '위기를 부정하는' 3단계의 초입에 들어선 듯하다. 4단계는 혼란과 냉소가 회사 내에 번지고 외부에서 구원투수를 찾는 시기라고 한다.
다행인 것은 구원투수를 외부에서 찾지 않고 내부에서 찾았다는 것과 단기적인 극약처방이 아닌 냉정한 내부진단의 과정을 거칠 것이라는 점에서 아직 몰락 4단계 이전으로 보인다. 다시 초격차의 길로 돌아갈 수 있는 만회의 기회가 있다는 얘기다. 그러기 위해서는 몇가지 선행돼야 할 일들이 있다.
전 부회장이 새로 삼성 반도체의 키를 쥔 만큼 그가 미래를 준비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줘야 한다. 현재 반도체의 위기는 경영자(반도체부문장)의 자질 문제가 아니라 결단의 문제이고 권한과 책임의 문제다. 그 옛날 왕들이 국가의 명운이 걸린 전쟁터로 향하는 장수에게 자신의 모든 권한을 위임하는 사인검(四寅劍)을 내리듯 새 반도체 수장에 전권을 줘야한다.
과거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장만 해도 자신의 전결로 3000억원까지 쓸 수 있었다. DS부문장은 그보다 더 큰 권한과 책임이 있는 위치다. 수십조원의 대규모 투자나 M&A 등에 있어서 DS부문장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 토대 위에 DS부문장은 무엇보다도 반도체 인재 영입과 육성에 힘써야 한다. 불편부당하고 투명한 인사를 통해 인재들이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TSMC나 인텔, 마이크론 등 경쟁자들에 밀리지 않고 살아남는 길은 결국 사람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얘기한 세상에 없는 기술을 만들어내는 것도, 그런 상상력을 실현할 수 있는 것도 인재다. 삼성반도체가 살아남는 길은 의외로 간단하다. 전문가에게 힘을 실어주고 사라졌던 1등 DNA를 다시 살리면 된다.
오동희 산업1부 선임기자 hunter@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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