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그림만 그리고 디테일은 맡긴다… ‘자율성’으로 우뚝 세운 출판명가[Leadership]
기획·저자선정, 편집자에 재량
유튜브는 마케팅부 자율 운영
“내가 제안한 콘텐츠 통과안돼”
부친 이어 2005년부터 경영
출판 불황에도 영업익 38% ↑
“무리한 투자 대신 길게 보자”
신작 최대 10만달러만 쓰고
‘세계문학전집’ 26년 금자탑
민음사 자회사 황금가지 운영
‘듄’ ‘드래곤 라자’ 등 큰 성과
출판 시장의 위기는 더는 공허한 외침이나 푸념이 아닌 현실이다. 성인 독서율은 43%로 역대 최저를 기록했고 국내 주요 출판사 71개의 영업이익은 전년 대비 42.4% 감소했다. 일부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이제는 정말 출판계가 변해야 한다”며 각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기도 하다. 이런 출판계 불황 속에 유독 부러움을 사는 출판사가 있다. 바로 지난해 영업이익 15억6800만 원으로 전년보다 38.1%를 늘린 종합 출판사 민음사다. 문학동네와 창비 등 국내 주요 출판사들의 영업이익이 약 40% 감소한 가운데 유독 두드러지는 결과다.
박근섭(60) 민음사 대표는 1966년 고 박맹호 회장이 창립한 ‘출판 명가’의 전통을 이어받아 가시적인 성과를 이어가고 있다. 박 대표의 지휘 아래 민음사는 최근에도 2018∼2019년까지 2년 연속 국내 출판사 영업이익 1위를 차지하는 등 ‘적자 없는’ 경영을 유지하고 있다.
창립자인 박 회장이 세상을 떠난 후 민음사는 장남인 박근섭 대표와 막내인 박상준 대표가 공동대표에 올랐지만, 경영 전반의 결정은 박근섭 대표가 맡고 있다. 최근 영화 개봉과 함께 인기를 얻은 원작 소설 ‘듄’을 출간한 장르소설 전문 출판사 황금가지도 박근섭 대표가 운영한다. 이 외에도 박 대표의 체제 속에 민음사는 국내에서 130만 부가 넘게 팔린 베스트셀러 소설 ‘82년생 김지영’, 2016년 창간 후 현재까지 주목받고 있는 문예지 ‘릿터’ 등을 내놓으면서 국내 대표적 출판사 중 하나로서의 자리를 지켜가고 있다.
◇“아버지는 편집인, 나는 경영인”
“한참 회장님이 잘하셨을 때는 회사에 누구도 회장님 앞에서 명함도 못 내밀 정도였죠.” 민음사의 58년 역사에서 박 회장의 영향력은 지울 수 없다. ‘단행본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박 회장은 민음사에서 7000여 권의 책을 통해 국내 저자를 발굴해냈고 우리 출판계에서 세계문학전집을 처음으로 시도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지난 22일 서울 강남구 민음사 본사에서 만난 박 대표는 “아버지는 내가 만나본 가장 훌륭한 편집자”라며 “그에 반해 나는 경영인”이라고 구분 지었다.
시대의 흐름에 맞춰 출판사는 변해야 하고, 리더의 역할 또한 달라진다. 2005년부터 민음사를 맡아온 박 대표 또한 새로운 시대에 맞는 개편을 단행했다. 1976년 박 회장이 창간해 40년을 이어온 ‘세계의 문학’을 2015년 폐간하고 내부 편집자들이 중심이 된 격월간 문학잡지 ‘릿터’를 창간했다. 오랜 기간 ‘세계의 문학’을 만들어온 편집위원들의 집을 일일이 찾아가 양해를 구하면서까지 새 잡지를 만든 이유는 저조한 실적 탓이었다. 실제 구독자가 100∼200명에 불과한 잡지를 뒤로하고 민음사의 현재를 상징하는 ‘릿터’는 매호 3000부 이상이 꾸준하게 판매되고 있다.
이 외에도 박 대표가 강조한 것은 구성원들의 ‘자율성’이다. 박 대표는 큰 그림은 그리되 ‘디테일’은 들어가지 않는다. 문학팀 편집자들이 직접 기획하는 ‘릿터’ 외에도 기획부터 저자 선정 등은 모두 편집자의 재량으로 이뤄지고 출판사 자체 유튜브로는 이례적으로 20만 구독자를 돌파한 채널 ‘민음사TV’도 마케팅부에서 자율적으로 운영된다. 박 대표는 “이전에 아버지에게 있던 편집자나 기획자로서의 아이덴티티가 나에겐 없다”며 “그래서 문학 편집자를 만나면 문학 이야기를 별로 하지 않는다. 유튜브도 내가 제안하는 경우는 있지만 통과된 사례는 거의 없다”고 설명했다. 대신 한국문학팀의 박혜진 편집자가 당시 무명이었던 조남주 작가가 투고한 원고를 발굴해 베스트셀러 ‘82년생 김지영’이 탄생했다. 믿고 맡긴 결과다.
◇무리한 투자는 금물, 길고 탄탄하게
최근 출판계에서 과열되고 있는 것은 ‘대작 경쟁’이다. 국내에서 출간만 하면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나 그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가 발표한 신작의 국내 판권을 확보하기 위해 대형 출판사는 너나 할 것 없이 과감하게 투자한다. 애플TV+ 드라마로도 제작된 이민진 작가의 소설 ‘파친코’는 선인세만 20억 원에 달하고 하루키 또한 이와 유사한 규모의 계약을 체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민음사 또한 한 차례 이 경쟁에 뛰어든 적이 있다. 지난 2013년 하루키의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10억 원 규모로 계약하면서다.
박 대표는 이때를 기점으로 “오버페이(무리한 투자)는 없다”는 기조를 유지 중이다. 하루키의 신작을 출간한 이후 현재까지 민음사의 원칙은 ‘최대 10만 달러(약 1억3700만 원)’다. 이 때문에 외부에서는 박 대표에게 보수적인 운영을 한다는 평가를 한다. 박 대표의 지향점은 길고 탄탄한 출판사 운영이다. 민음사의 대표 시리즈 ‘세계문학전집’과 꼭 맞는 표현이다. 국내에서 100만 부 이상이 판매된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필두로, 70% 이상의 시장을 점유하고 있는 이 시리즈는 한순간에 이뤄지지 않았다. 1998년 국내 최초로 외국 작가들을 만나 정식 계약을 맺고 정상급 번역자를 섭외해 26년간 차곡차곡 쌓아 올린 결과다.
하지만 투자에 인색한 것은 아니다. 무리한 투자는 지양하지만, 편집부를 중심으로 새로운 작가를 발굴한 성과는 속속 나오고 있다.
원조 ‘듄친자’(듄에 미친 자)를 자처하는 박 대표는 2001년 황금가지를 통해 프랭크 허버트의 원작 소설 ‘듄’을 국내에 가져왔고 1∼18권을 차례로 냈다. 당시 시장 반응은 싸늘했고 초판조차 판매되지 않았지만 2021년 개정판을 내고 영화 개봉이 맞물리면서 그해 20만 부가 넘게 팔렸다. 영화 ‘듄 : 파트2’가 개봉한 이후 올해 4월 ‘듄 신장판 전집 세트(1∼6권)’는 예스24 소설·시·희곡 분야 베스트셀러 3위, 종합 순위 33위를 기록했다. 국내 판타지 소설을 대표하는 ‘드래곤 라자’(1998)도 마찬가지다. 박 대표가 민음사를 맡기 전 황금가지를 운영하면서 출간한 책은 당시 민음사 내에서도 많은 반발이 있었지만, 그는 출간을 감행했고 100만 부 이상의 판매량을 올리며 명실상부한 한국 판타지의 대표작이 됐다.
■ 朴대표가 꼽은 ‘대표 도서’
하나의 책이 편집자의 손을 거쳐 세상에 나오는 과정을 알게 될 때, 그 책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 지난 22일 서울 강남구 민음사 본사에서 만난 박근섭 대표는 시기별로 출간한 책이 경영의 결정적인 순간을 떠오르게 한다고 말하면서 총 4권의 책을 꼽았다.
‘세계문학전집’은 출판사가 탄탄한 기반을 갖추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준다. 새로운 시도와 도전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소위 ‘스테디셀러’로 불리는 책들의 역할이 정말 중요하다.
‘드래곤 라자’는 독자들의 관심과 출판계 트렌드가 변할 때 출판사 또한 같이 발맞춰 변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출간 당시 비주류였던 판타지 소설의 위치는 이 책을 계기로 역전됐다.
‘82년생 김지영’은 직원들의 자율성을 보장해줬을 때 나올 수 있는 최상의 결과물이었다. 책의 폭발적인 성공에 민음사 한국문학팀은 자신감을 찾고 적극적으로 한국문학을 발굴하는 계기로 삼았다.
박 대표가 리더십 함양을 위해 특별히 추천한 책은 ‘사기열전’. 박 대표는 “리더십의 가장 기초가 되는 ‘사기열전’은 리더의 역할에 대해 배울 부분이 많은 도서”라고 설명했다.
신재우 기자 shin2roo@munhwa.com
■ 약력
△1964년 출생 △서울대 경제학과 학사 △미주리주립대 경영학 석사 △황금가지 대표(1995∼) △민음사 발행인 겸 대표이사(2005∼)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 회장상(2002), 국세청장상(2003), 중소기업청장상(2022)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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