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카페] 비타민A 결핍 어린이 구할 황금쌀, 빛을 잃을까

이영완 기자 2024. 5. 27. 0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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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에 비타민A 만드는 베타카로틴 유전자 도입
그린피스는 생태계 혼란 유발한다며 소송 제기
필리핀 법원, “양측 주장 대립” 이유로 정부 허가 취소
한국도 황금쌀 개발, 반대 여론에 허가 신청도 못 해
옥수수와 박테리아의 베타카로틴 유전자를 벼에 넣어 노란색을 띠는 황금쌀. 주황색 색소인 베타카로틴은 인체에서 비타민A를 만든다./국제쌀연구소

고(故) 김지하 시인은 ‘밥은 하늘입니다’라는 시에서 ‘하늘의 별을 함께 보듯이 밥은 여럿이 갈라 먹는 것...밥이 입으로 들어갈 때 하늘을 몸속에 모시는 것’이라고 했다. 동학의 2대 교주 해월 최시형도 “밥은 곧 하늘”이라 했다. 밥은 생명을 유지하고 사람답게 해주기 때문이다.

하늘과도 같은 밥이 더 빛날 때가 있었다, 1999년 스위스 취리히 연방공대의 잉고 포트리쿠스(Ingo Potrykus) 교수는 황금쌀을 개발했다. 이들은 농업기업 신젠타와 함께 옥수수에서 베타카로틴을 만드는 유전자를 쌀의 유전자에 끼워 넣어 황금빛을 내는 쌀을 개발했다. 이 황금쌀은 개발도상국에서 비타민A 결핍으로 시력과 심지어 목숨까지 잃는 어린이들을 구할 것으로 기대됐다. 황금쌀이 비타민A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하늘 같은 밥을 만들 쌀인 셈이다.

옥수수와 박테리아의 베타카로틴 유전자를 벼에 넣어 노란색을 띠는 황금쌀. 주황색 색소인 베타카로틴은 인체에서 비타민A를 만든다./국제쌀연구소

◇필리핀 법원 황금쌀 허가 취소 판결

인체는 당근을 주황색으로 만드는 색소인 베타카로틴을 식품을 통해 흡수해 비타민A로 만든다. 쌀은 이 베타카로틴이 크게 부족하다. 우리야 시금치 같은 다른 식품을 통해 보충할 수 있지만, 영양분을 쌀에만 의존하는 저개발 국가에서는 문제가 심각하다. 어린이가 비타민A가 부족하면 시력을 잃고 심하면 면역력 약화로 사망에 이른다. 전 세계에서 한 해 50만명이 넘는 어린이들이 비타민A 결핍으로 목숨을 잃는다고 알려졌다.

2021년 필리핀 정부가 현지 환경과 입맛에 맞춘 황금쌀 품종인 말루소그(Malusog)의 상업적 재배를 허가했다. 정부는 이 품종이 8년 안에 필리핀 쌀 수확량의 10%를 차지해 비차미A 결핍 문제를 해결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런데 환경단체가 어린이들의 목숨을 구할 황금쌀을 가로막았다. 지난달 17일 필리핀 항소법원은 말루소그 재배 허가를 취소했다. 그린스피와 다른 환경단체들이 제기한 소송에서 법원은 황금쌀의 안정성에 대한 과학적 합의가 없는 상황에서 상업적으로 재배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황금쌀은 미국과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에서 먼저 허가를 받았다. 하지만 이 나라들은 쌀이 주식이 아니어서 비타민A 결핍 문제가 심각하지 않다. 스위스 연구진은 황금쌀 개발 기술을 공익 목적으로 쓰라고 기부했다. 필리핀 국제쌀연구소는 이 기술로 방글라데시의 건조한 기후에서 잘 자라는 품종의 쌀에 베타카로틴 유전자를 넣어 2019년 재배 허가를 받았다. 이어 필리핀도 허가했는데 이번에 복병을 만난 것이다.

그린피스는 판결 후 성명서에서 “이번 결정은 수십년 동안 GMO에 맞서 싸워온 필리핀 농부와 국민에게 기념비적인 승리”라고 밝혔다. 황금쌀이 저개발 국가 어린이의 목숨을 구할 약이 될 수 있는데도 그린피스가 황금쌀을 반대한 것은 벼에 옥수수와 박테리아에서 추출한 유전자 두 가지를 넣은 유전자변형농산물(GMO)이기 때문이다.

황금쌀 개발자인 포트리쿠스 교수는 사이언스지 인터뷰에서 “이번 법원 결정은 필리핀과 다른 지역의 황금쌀에 재앙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필리핀 정부 측 변호사는 “법원이 단순히 양측이 반대되는 증거를 제기했다고 제대로 과학적 합의가 없다고 판결했다”고 비판했다. 법원이 상반된 주장의 타당성을 검토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필리핀 정부는 대법원에 상고하겠다고 밝혔다. 대법원이 양측의 증거를 면밀히 검토하면 판결을 뒤집을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그 과정은 최소 2년 이상 걸린 전망이다.

쌀은 비타민A가 부족하다. 쌀 외에 다른 식품이 부족한 저개발 국가에서는 비타민A 결핍으로 시력을 잃거나 심하면 사망하는 어린이들이 많다. 황금쌀은 비타민A 결핍 문제를 해결할 대안이다./조선DB

◇한국 황금쌀은 허가 신청도 못해

사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먼저 국산 황금쌀로 지은 밥을 먹을 수 있었다. 2008년 국립농업과학원은 밥 두 공기만 먹으면 하루 비타민A 권장량을 충족하는 황금쌀을 개발했다. 당시 연구진은 고추의 베타카로틴 유전자를 벼에 넣은 황금쌀을 개발했다. 연구 결과는 2010년 국제 학술지 ‘식물생명공학 저널’ 표지 논문으로 게재됐다.

연구진은 이어 베타카로틴 색소의 일종인 카로티노이드가 붉은색을 내는 루비쌀도 개발했다. 농촌진흥청은 비타민A 결핍 문제가 심각한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등 해외 시장을 겨냥해 2011년부터 상용화를 추진했다. 하지만 GMO 반대 여론에 부닥쳐 2017년 사업단을 해체하기로 결정했다. 김동헌 메디프로젠 대표는 “방글라데시나 필리핀과 달리 한국 황금쌀은 허가 신청도 못 했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당시 농업과학원 생명자원부장으로 황금쌀 개발에 참여했다. 김 대표는 “농업과학원의 하선화 박사(현 경희대 교수)가 개발한 황금쌀은 스위스가 처음 개발한 것보다 기술이 개선된 2세대”라며 “하지만 우리나라는 비타민A 결핍이 심각하지 않고 GMO에 대한 반감 문제가 있어 안타깝게 사장됐다”고 말했다.

환경단체들은 1990년대 말 GMO가 인체에 해로울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2010년대 중반 이후 오랫동안 GMO가 소비됐지만 위험하지 않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이어 환경단체는 GMO가 원래 작물에 없던 외부 유전자를 갖고 있어 생태계를 혼란에 빠뜨릴 수 있다고 우려했다. 과학자들은 이에 대해 자연에서도 식물 20종 중 한 종꼴로 차나 바나나처럼 외부 생물인 토양 세균의 유전자를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GMO는 과학기술로 이런 과정을 빠르게 한 것뿐이란 말이다. 김동헌 대표는 “환경 위해성은 GMO 작물을 어떤 환경에서 재배하느냐에 따라 위해성을 다르게 판단해야 한다”며 “벼는 월동을 하지 않아 잡초가 돼서 생태계에 영향을 줄 수 없다”고 말했다.

과학자들은 GMO에 대한 반감을 극복할 농작물 품종 개발 기술을 개발했다. 바로 유전자를 마음대로 자르고 붙이는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이다. 외부 유전자를 주입하지 않고 자체 유전자로 교정한다는 점에서 GMO와 다르다. 곰팡이병에 강한 바나나 품종을 GMO 기술에 이어 유전자 가위로 개발하고 있다. 황금쌀도 같은 방식으로 다시 개발될 수 있다. 황금쌀의 빛을 되살려는 과학자들의 노력이 언제쯤 빛을 볼 수 있을까.

참고 자료

Plant Biotechnology Journal(2010), DOI: https://doi.org/10.1111/j.1467-7652.2010.00543.x

Science(2000), DOI: https://doi.org/10.1126/science.287.545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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