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이 만든 끔찍한 세계 [전쟁과 문학]

이정현 평론가 2024. 5. 26.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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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스쿠프 전쟁과 문학 20편
전쟁과 J.D. 샐린저의 문학
‘청춘의 파수꾼’이었던 샐린저
거장 반열 오르고도 은둔 생활
홀든처럼 동료의 망령에 시달려
전쟁의 고통 잊지 않고 살아

J.D 샐린저는 「호밀밭의 파수꾼」으로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작가로서 절정의 위치에서 샐린저는 죽을 때까지 은둔하다가 사망했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주인공 홀든 콜필드는 타락한 어른이 되기를 거부한다. 그것은 어른이 되자마자 전쟁을 경험한 샐린저의 상처에서 비롯됐다. 전쟁터에서 샐린저는 동료들을 모두 잃었다.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을 감당할 수 없었던 그는 '어른'들이 만든 끔찍한 세계를 외면했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신드롬에 가까운 지지층을 낳은 소설이다.[사진=뉴시스]

미국 작가 J.D. 샐린저(1919~2010년)의 장편소설 「호밀밭의 파수꾼(1951년)」은 1950년대 미국 청년들의 의식을 뒤흔들었다. 소설의 주인공 '홀든 콜필드'는 타락한 세계의 일부가 돼야 하는 어른의 세계를 거부한다. 1950년대 미국 젊은이들은 기성세대의 엄격한 순응주의에 불만이 가득했다. 미국 청년들은 「호밀밭의 파수꾼」의 주인공 홀든을 자신들의 대변인으로 여겼다.

작품 안에서 홀든이 썼던 '빨간 모자'는 기성의 질서에 반항하는 청년들의 상징이 됐다. 교육 당국은 주인공 홀든이 학교를 거부한 낙제생이자 문제아라는 이유로 중ㆍ고교에서 금서로 지정했으나 오히려 판매 부수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호밀밭의 파수꾼」이 성공하자 샐린저에게는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고, 수많은 출판사 편집자들이 원고를 청탁하려고 법석을 떨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책에 열광하는 사람들을 반기지 않았다. 샐린저는 줄곧 살아왔던 뉴욕을 떠나 시골로 도피했고, 죽을 때까지 은둔 생활을 이어갔다.

비평가들은 샐린저가 은둔한 이유를 분석하면서 온갖 억측을 쏟아냈으나, 샐린저는 세상의 호기심에 일절 응답하지 않았다. 샐린저가 사망한 직후 전기 작가 케니스 슬라웬스키는 샐린저가 남긴 기록과 지인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저술한 「샐린저 평전(2011년)」에서 전쟁과 사랑이 그의 삶과 글에 미친 영향을 조명했다.

1919년 샐린저는 폴란드계 유대인 아버지와 아일랜드계 어머니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육류와 치즈 사업으로 많은 돈을 번 덕분에 그의 가족은 뉴욕 고급 주택가에 살며 경제대공황 시대에도 풍족한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1932년에 샐린저는 맨해튼의 유명 사립학교에 진학했으나 성적 부진으로 1년 만에 자퇴했다. 아버지는 그를 펜실베이니아의 군사학교로 보냈다.

질서를 혐오하는 소설 속 인물과는 달리 군사학교에 잘 적응한 샐린저는 긍정적인 성격으로 바뀌었다. 각기 다른 사회적 배경을 지닌 인물들이 뒤섞인 용광로 같은 군대에서 그는 좋은 친구들을 만났다. 새로운 동료들을 만날 때마다 인간을 향한 그의 시각은 조금씩 바뀌었다. 어시너스 칼리지와 컬럼비아대에 진학한 샐린저는 문예 창작 수업을 받으면서 습작을 시작했다.

일러스트레이터 콜리(M. S. Corley)가 그린 「호밀밭의 파수꾼」 주인공 홀든 콜필드.[사진=mscorley.blogspot.com 제공]

이 시절 샐린저는 유명 극작가 유진 오닐(1888~1953년)의 딸 '우나 오닐'과 연인이 됐지만 두 사람은 곧 결별했다. 우나 오닐은 전설적인 배우 찰리 채플린(1889~1977년)과 사랑에 빠졌다. 우나 오닐이 자신과 헤어진 후 찰리 채플린과 교제한 사건은 샐린저에게 큰 상처로 남았다.

1942년 4월, 군에 입대한 샐린저는 예비장교학교에 입소했다. 샐린저는 훈련소 교관으로 근무하면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교관 생활은 금방 끝났다. 샐린저가 독일어와 프랑스어를 구사할 줄 알고, 전쟁이 터지기 전 독일에 방문했던 사실을 중시한 군 수뇌부는 그를 정보부대에 배치했다.

1944년 6월, 샐린저가 소속된 제4사단은 노르망디에 상륙했다. 프랑스에서 제4사단은 연일 격전에 휘말렸다. 전쟁을 색다른 모험 정도로 여겼던 샐린저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노르망디 상륙 이후 두 달 동안 샐린저의 연대는 3080명의 병력 중 장교 76%, 병사 63%가 사망했다. 제4사단은 파리에 입성한 첫 미군 부대라는 영예를 얻었으나 그 대가는 가혹했다.

1944년 9월 중순 미군은 독일로 진격하는 길목인 '휘르트겐 숲'에서 독일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숲에 설치된 부비트랩과 독일군의 포격으로 미군은 수만명의 사상자를 냈다. 휘르트겐 숲에서 샐린저 소속 연대에서만 무려 2517명이 전사했고, 샐린저와 절친했던 동료들은 여기서 대부분 사망했다. 휘르트겐 숲 전투의 가장 큰 비극은 그 작전이 무의미했다는 점이다.

방심한 연합군은 숲을 우회하지 않고 정면으로 관통하는 최단거리를 선택했다. 전투가 끝날 무렵 샐린저는 종군기자로 휘르트겐 숲에 방문한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1899~1961년)를 만났다. 두 사람은 핏빛 숲에서 밤새 술잔을 기울이면서 문학을 토론했다. 이 만남은 샐린저가 계속 글을 쓸 수 있는 힘이 됐다.

혹독한 타격을 입은 제4사단은 휴식을 위해 네덜란드-룩셈부르크 접경지역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불과 일주일 후 그들의 휴양 지역은 독일군 최후의 반격 작전으로 벌어진 '벌지전투'의 무대가 됐다. 휴양지에서 그들은 다시 악전고투를 벌였다.

벌지전투에서 승리한 미군은 독일로 진입했다. 온갖 전투를 겪은 샐린저는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렸으나 전쟁이 끝날 무렵 그는 전투보다 가혹한 임무를 맡게 됐다. 독일을 점령한 연합군은 곳곳에서 강제수용소를 발견했다. 유대인, 집시족, 정치범, 전쟁포로 등을 감금했던 수용소에는 학살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정보부대 장교인 샐린저는 악명 높은 '다하우 수용소'의 생존자들을 심문하는 임무를 맡았다. 전쟁에서 최악의 순간들은 이미 다 겪었다고 확신했던 샐린저는 수용소의 참상에 형언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았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샐린저는 독일에 남아 방첩대 임무를 수행했다.

뉘른베르크의 미군 병원에서 전투 피로증 진단을 받은 샐린저는 병상에서 헤밍웨이에게 자주 편지를 보냈다. 그는 편지에 자신이 겪은 끔찍한 광경, 종전 이후 피폐한 독일의 상황, 자신이 쓰고 있는 글을 상세히 적었다. 헤밍웨이와의 대화는 샐린저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1945년 12월, 샐린저는 병원에서 근무하는 독일인 안과의사 '실비아'와 사랑에 빠졌다. 당시 미군과 독일 국적 배우자의 결혼은 법적으로 금지돼 있었다. 샐린저는 위조 여권을 만들어 그녀가 프랑스 시민권을 받도록 해줬다. 1946년 샐린저는 실비아와 함께 귀국했지만, 그들은 3개월 만에 이혼했다.

두 사람을 강하게 결합했던 열정은 갈등으로 바뀌었다. 고집이 센 두 사람은 다툴 때마다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더구나 샐린저의 가족은 유대인이었다. 샐린저의 부모는 아들이 독일 여자와 사는 것을 반기지 않았다. 실비아는 결국 샐린저와 헤어진 후 유럽으로 돌아갔다.

샐린저는 전쟁과 실연의 고통을 창작으로 극복했다. 1950년 12월, 마침내 그는 전장에서 구상한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을 탈고했다. 동생의 죽음 이후 삶의 가치를 상실한 소설의 주인공 홀든은 전쟁을 겪으면서 인간을 향한 신뢰를 상실한 샐린저를 대변하는 페르소나였다.

동생 '앨리'의 유령을 마주하는 홀든처럼 샐린저 역시 곁에서 쓰러져 간 전우들의 망령에 오랫동안 시달렸다. 세상의 갈채는 그에게 부담으로 다가왔고, 자신만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을 자극했다. 샐린저는 절필을 선언하고 은둔에 들어갔다. 50여년간 세상을 등진 샐린저는 어른이 되기를 거부한 '홀든 콜필드'의 삶을 스스로 완성했다.

이정현 평론가 | 더스쿠프
21cbac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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