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보가치 부풀리기’ 왜 반복되나…은행에 휘둘리는 감정평가

김지혜 기자 2024. 5. 26. 17:07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최근 NH농협·KB국민은행 등에서 ‘담보가치 부풀리기’로 과다 대출하는 배임 사고가 잇따라 적발됐다. 금융당국은 은행권에 자체 감사를 주문하고 있지만 전문적이고 독립적으로 이뤄져야 할 담보가치 평가가 여전히 은행의 ‘입김’에 휘둘리는 제도적 환경이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시중은행 ATM. 성동훈 기자

농협은행은 지난 3월 부동산 가격을 실제보다 12억6000만원 부풀린 매매 계약서를 토대로 담보 대출을 실행한 직원의 배임 혐의를 적발했다. 이후 비슷한 유형의 금융사고 공시가 잇따라 올해 상반기에만 국민·농협은행에서 총 5건, 합계 550억원 규모의 금융사고가 드러났다. 반복되는 사고에 금융감독원은 다음달까지 모든 은행에 상업용 부동산·토지 등 담보 가치를 부풀려 과다 대출한 사례를 조사해 제출하라고 통보했다. .

은행권 관계자들은 ‘담보가치 부풀리기’의 사고 유형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한다. 첫째, 은행 직원들이 담보가치를 자체 산정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가능성이다. 둘째, 담보 평가를 외부 감정평가법인에 맡긴 경우라면 은행 직원과 법인의 공모를 의심해볼 수 있다.

전문가들은 둘 중 어느 쪽이든 감정평가의 공정성·독립성을 보장하지 않는 제도의 허점이 금융사고가 반복되는 토양이 됐다고 지적한다.

시중은행들은 담보대출 10건 중 약 7건의 감정평가를 자체적으로 산정하고 있다. 이성원 한국부동산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의 지난해 보고서를 보면 2022년 기준 금융기관 자체산정 비중은 약 68%에 달했다. 2010년부터 감정평가수수료가 은행 부담이 된 데다, 현행법상 은행이 감정평가를 외부 법인에 의뢰할 의무가 없기 때문이다

은행의 자체산정 관련해 일률적으로 강제되는 법·규정도 없다. 내부통제 의무는 있지만 구체적 지침은 없어 은행별로 제각각이다. A 은행 관계자는 “여신 합계액 5억원 이하 혹은 담보의 시가 추정 금액 10억원 이하일 때 자체산정을 한다는 등 내부 기준이 있지만, 근거 법은 없어 은행마다 모두 상황이 다른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B 은행 관계자는 “담보 가격에 따라 의뢰 여부를 정하는 내부 기준은 없고, 건별로 적정성을 판단한다”고 말했다.

이 선임연구위원은 “대출 실적 압박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은행 직원들이 담보물 가치 산정을 공정하고 정확하게 수행하길 기대하기는 어렵다”면서 “미국 등 해외에서는 금융회사의 담보가치 자체산정을 법으로 금지하는 추세”라고 말했다.

외부 감정평가법인에 의뢰한 담보대출의 신뢰성도 물음표가 찍힌다. C 은행 관계자는 “금융기관들은 외부감정평가법인을 매번 무작위로 선정하기 때문에 은행 직원과 법인의 공모가 일어나기 힘들다”고 일축했다. 그러나 감정평가사들의 반응은 달랐다. 익명을 요구한 한 감정평가사는 “실제로는 은행이 여러 감정평가법인에게 탁상감정을 받아 본 후 가격을 비교해 은행 입맛에 맞는 결과를 택하는 일이 부지기수”라며 “무작위 선정을 한다지만 원하는 결과가 나올 때까지 선정을 계속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은행업 감독업무 시행세칙은 감정평가법인 선정에 있어 공정성 및 독립성 확보할 수 있는 내부통제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규정하지만, 구체적인 방법은 제시하지 않았다. 또다른 감정평가사 D씨는 “여전히 은행은 갑, 감정평가사는 을인 상황에서 감정평가의 공정성이 위협받을 여지는 충분히 있다”고 말했다.

이 선임연구위원은 “외부 감정평가 의뢰를 감정평가의 원칙적 방법으로 규정하고, 감정평가에 대한 통일된 기준과 지침을 마련해 은행 입김에서 벗어난 전문적이고 정확한 담보가치 산정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지혜 기자 kimg@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