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머노이드 뮤지컬 《천개의 파랑》
(시사저널=조용신 뮤지컬 평론가)
'휴머노이드(Humanoid)'는 '사람(Human)'과 '같은 것(oid)'이란 단어의 합성어다. 말 그대로 외모가 사람과 비슷하고 2족 보행을 하며 감정도 느끼는 '인간형 로봇'을 뜻한다. 일본에서는 1973년 와세다대학교 이치로 가토 교수가 세계 최초의 휴머노이드 로봇인 '와봇-1'을 개발했다. 우리도 잘 아는 애니메이션 《마징가Z》 《기동전사 건담》 등을 통해 로봇의 대중적인 이미지를 확산시켰다. 우리나라도 카이스트(KAIST)를 비롯한 여러 연구기관에서 세계적인 로봇 회사들과 경쟁하며 점차 정교한 기능을 갖춘 휴머노이드를 만들어내고 있다.
한국형 휴머노이드 소재 뮤지컬
로봇이 스스로 학습하고 판단하는 인공지능을 갖추고, 빠르고 안정적인 보행과 손발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기술에의 도달은 쉽지 않은 과제다. 로봇이 사람처럼 움직이며 일하기 위해서는 높은 지능을 가진 두뇌는 물론이고 연료에 해당하는 배터리, 외부 자극에 반응하는 복잡한 센서 등 수많은 부품 요소가 정확하게 결합돼 오차 없이 움직여야 한다. 아직 이 같은 첨단기술은 실제 인간의 몸을 따라가지 못한다.
로봇에 대한 인간의 높은 기대치에 비해 현실의 개발 속도는 그에 이르지 못하면서 대중은 그 차이를 상상과 환상을 기반으로 한 예술의 영역으로 소비해 왔다. 조지 루카스의 영화 《스타워즈》 시리즈에서는 귀여운 외모의 '알투디투(R2-D2)'와 개그감 충만한 '쓰리피오(C-3PO)'가 각기 다른 개성과 능력을 지닌 로봇의 활약상을 보여줬다. 영화 《바이센테니얼 맨》(1999)의 '앤드류'는 인간을 사랑해서 죽는 순간까지 철저하게 봉사하며 희생하는 로봇으로 인간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 작품이었다.
영화 《엑스 마키나》(2015)의 '에이바'는 사람의 감정을 느끼는 치명적 매력을 지닌 지능형 휴머노이드 로봇이다. 하지만 자신을 만든 개발자를 죽이고 사회에 숨어든다. 이렇듯 영화에서 휴머노이드 로봇의 캐릭터는 처음에는 반려로봇 같은 '귀여운 존재'에서 출발해 인간에게 '희생하는 존재'를 거쳐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위협적인 존재'로까지 확장했다.
사실 로봇이 인간을 주도하는 절망적이고 우울한 디스토피아 세계는 이 분야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아이작 아시모프(Isaac Asimov)가 1950년 소설 《아이, 로봇》에서 극적으로 묘사한 바 있다. 그는 인간에게 저항하는 로봇 집단에 대한 두려움을 통해 인간이 만들어내는 휴머노이드 기술의 발전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세계 수준의 휴머노이드 연구가 이뤄지는 국내에서도 이를 문화 콘텐츠 소재로 다루는 사례가 꾸준히 이어져 왔다. 특히 뮤지컬계가 적극적이라고 할 수 있다. 2010년대에 발표된 《어쩌면 해피엔딩》 《유앤잇》 《땡큐 베리 스트로베리》 《로빈》 등이 모두 소극장 규모로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AI 로봇이 등장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러한 흐름을 이어가면서 최근에는 대극장 버전의 새로운 창작뮤지컬이 등장했다.
최근 개막한 창작뮤지컬 《천개의 파랑》은 천선란 작가의 2019년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 수상작인 SF장편소설 《천개의 파랑》을 뮤지컬로 각색한 작품이다. 2035년 가까운 미래가 배경으로 SF소설에서 일반적으로 느껴지는 기괴한 설정 대신 인간미가 물씬 풍기는 따뜻한 과학소설이다.
경마장에서 로봇 기수로 일하다가 자신의 경주마 '투데이'와 경기 중 낙마해 하반신이 망가져 폐기 처분을 기다리는 휴머노이드 '콜리'와 남모를 아픔을 감추고 사는 경마장 앞 식당을 운영하는 가정의 고등학생 딸이자 로봇 만들기 천재인 '연재'의 사랑과 우정에 관한 이야기다. 배경이 되는 경마장의 경기 장면들, 한계를 뛰어넘는 특별한 지능과 감정을 갖춘 콜리의 모습, 미래 사회에 일상화된 각종 로봇들이 흥미롭게 담겨있는 원작 소설을 무대 위의 액션과 음악, 연기로 각색해 대극장 뮤지컬로 새롭게 탄생시켰다.
최근 수년간 만들어진 대극장 창작뮤지컬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묵직한 울림이 있는 주제를 갖춘 작품이다. 공공예술단체로서 한국형 뮤지컬을 꾸준히 제작해온 서울예술단의 신작으로 최경화 프로듀서, 김한솔 작가, 박천휘 작곡가, 김태형 연출가, 신은경 음악감독 등 뮤지컬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스태프가 한자리에 모였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연재 주변에는 상실과 외로움을 가진 존재가 많다. 척수성 소아마비로 휠체어에 의지해야 하는 언니 은혜, 하반신을 잃은 로봇 기수 콜리, 그리고 그의 파트너이자 다리 부상으로 안락사를 앞둔 경주마 투데이. 연재는 언니의 휠체어를 끌며 다리가 되어주고 콜리에게는 직접 자신의 기술로 망가진 다리를 만들어낸다. 또한 투데이의 안락사를 막고 다리를 회복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도록 다시 경기에 참가할 수 있는 기획에 참여한다. 무엇이 17세 여학생으로 하여금 이러한 사랑을 발휘하게 했을까. 그것은 아마도 연재가 휴머노이드가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음악의 높은 완성도에 지루함 '제로'
소설에서는 천 작가의 문장들에서 연재의 감정과 행동이 마치 소복이 내리는 눈처럼 순수하고 아름답게 표현됐다면 무대예술에서는 배우의 연기와 노래가 서사와 정서를 함께 머금고 이를 객석으로 고스란히 전달하고 있다. 소설에서는 여러 호흡으로 분산되어 있던 주변 캐릭터들의 이야기가 무대에 맞게 응축되고 살이 붙어 대사와 노래가 어우러진 장면들로 각색됐다. 170분의 결코 짧지 않은 러닝타임이지만 그중 절반이 넘는 시간 동안 흐르는 음악이 높은 완성도를 갖추어 지루함도 느낄 수 없다.
배우들의 호연도 돋보인다. 아이돌 활동 경력이 많은 진호(펜타곤)와 효정(오마이걸) 배우는 각각 콜리와 연재 캐릭터의 옷을 차려입고 많은 분량의 노래들을 흔들림 없는 음정과 호흡, 딕션을 유지하며 무대에서 중심을 끌어준다. 같은 배역을 나눠맡고 있는 윤태호, 서연정 배우 그리고 조역과 앙상블을 맡은 서울예술단 단원들이 빚어내는 장면, 실제 크기의 경주마 퍼펫과 실제 구동되는 로봇들의 등장도 이 작품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한 매력이다.
인간과 기계의 공존과 연대, 상처와 불평등 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고 느리지만, 자신만의 방식대로 세상을 밝게 일구려는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는 모처럼 관객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좋은 K뮤지컬로 기억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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