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 음탕하게 놀던 ‘이곳’…반란군이 칼 씻은 홍제천 옆에 있었다 [서울지리지]
조선전기 학자 성현(1439~1504)이 쓴 <용재총화>가 꼽은 옛 서울의 명소다. 삼청동은 북악산, 인왕동·백운동은 인왕산의 이름 난 곳이다. 쌍계동은 성균관 윗쪽 골짜기이며 청학동은 남산(중구 필동)에 위치했다. 모두 한양도성을 둘러싼 내사산들이다. 이들 산에는 경치가 아름다운 장소가 많아 풍류를 즐기기 위한 누정(樓亭)들이 빠짐없이 세워졌다.
성현이 으뜸으로 꼽은 삼청동은 도심에서 가까우면서도 숲이 울창하고 골이 깊다. <용재총화>는 “지위가 높고 점잖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논다”고 했다. 순조의 장인이자 조선후기 세도정치의 서막을 연 장동(신안동) 김씨 김조순(1765~1832)의 별장 옥호정(玉壺亭·종로 삼청동 133-1)이 삼청동에 있었다. 옥호는 ‘옥으로 만든 작은 병’으로 신선의 세계를 의미한다. 김조순은 병자호란때 삼학사로 알려진 김상헌을 필두로 노론의 중심인물인 김수항, 김창집의 직계 후손이다. 이조판서, 양관 대제학, 병조판서, 훈련대장을 지내며 조정의 실권과 군사권을 장악했고, 막강한 권력은 아들 김유근에게 대물림됐다. 옥호정 역시 김유근에게 상속됐다.
기묘한 형상의 바위가 산재하고 노송이 빽빽한 인왕산도 권력자들이 애호했다. 인왕산 동쪽으로 내리뻗은 돌산 중턱에 터잡은 석파정(石坡亭·종로 부암동 산16-1)은 김흥근(1796~1870)의 별장이었다. 김흥근은 19세기 중반 장동 김씨 세도정치기에 활동했던 인물로 김조순의 5촌 조카다. 집안 후광으로 철종 때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고, 고종이 즉위한 후에는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이 장동 김씨 세력을 정계에서 몰아내는 과정에서 대립했다. 김흥근은 석파정만은 지키려고 애를 썼지만 결국 흥선대원군에게 강탈당했다. 대원군은 건물 터의 형상에서 정자이름을 바위언덕, 즉 석파정으로 정했고, 자신의 아호도 석파라고 했다.
석파정에서 북쪽으로 700m지점의 세검정(洗劍亭·종로 신영동 168-6)은 인조반정과 관련이 깊어 일반인에게도 낯익다. 이귀, 김류 등은 광해군을 폐위키로 결의하고 1623년(광해군 15) 음력(이하 음력) 3월 12일 홍제천에 집결한 후 창의문을 도끼로 부수고 들어가 인조를 새로운 왕으로 옹립했다. 이후 반정군들은 홍제천에서 칼을 씻어 칼집에 넣었다. 세검(洗劍)은 태평성대를 맞이했음을 상징한다. 정자도 반정군이 거사 성공을 자축하며 건축했다고 알려져 있다.
세검정은 층층의 바위와 어지럽게 쏟아지는 물줄기가 볼만했다. <동국여지비고>는 “정자가 돌 위에 있으며 폭포수가 그 앞을 지난다. 장마 때마다 도성 사람들이 나가서 넘쳐흐르는 물을 구경한다”고 했다. 다산 정약용(1762~1836)도 1791년(정조 15) 여름, 폭포를 구경하기 위해 세검정으로 달려갔다. <다산시문집>은 “이때에 비바람이 크게 일어나더니 산골 물이 갑자기 흘러내려 눈 깜짝할 사이에 계곡은 메워지고 물 부딪치는 소리가 아주 요란하였다. 흘러내리는 모래와 구르는 돌이 내리치는 물속에 마구 쏟아져 내리면서 물은 정자의 초석을 할퀴고 지나갔다. 그 형세는 웅장하고 소리는 맹렬하여 서까래와 난간이 진동하니 모두들 오들오들 떨며 불안해했다. 내가 ‘어떻냐’고 물으니 모두들 ‘이루 말할 수 없이 좋다’ 하였다”고 적었다. 아쉽게도 1944년 2월 25일 주변의 화재로 전소됐고 현재의 건물은 1977년 신축됐다. 부근에 주택가가 형성되고 도로가 나면서 옛날의 운치 있던 분위기는 퇴색됐다.
종로 배화여고 뒤편 필운대(弼雲臺)는 이항복(1556~1618)의 집에 있던 정자였다. 이항복은 백사를 포함해 여러 개의 호를 갖고 있었으며 필운대도 그 중 하나다. 주변에는 봄이면 꽃이 만발해 필운대에서 굽어보기 좋았다. <동국여지비고>는 “주변 인가에서 꽃나무를 많이 심어 경성 사람들의 봄철 꽃구경은 반드시 먼저 이곳을 손꼽게 되었다”고 했다. 옛터에 필운대 각석이 남아있다. <동국여지비고>는 “석벽에 새긴 필운대 세 글자는 곧 이백사의 글씨”라고 했다.
옥인동 송석원(松石園)은 정조 때의 평민시인 천수경(1758~1818)의 집이었다. 1786년(정조 10) 천수경은 송석원에서 중인 시인 13명과 시사(詩社·시동인)를 결성했고, 하급계층의 한문학 활동인 위항문학운동의 구심적 역할을 했다. 천수경 사후 주인이 여러 차례 바뀌었으며 이후 장동 김 씨 일가를 거쳐 순종의 계비 순정황후 윤 씨의 백부인 친일파 윤덕영의 소유로 넘어갔다. 윤덕영은 1914년 송석원 터에 프랑스풍 대저택 벽수산장(碧樹山莊)을 지었다. 저택은 방이 40개나 돼 ‘경성의 아방궁’이라 불리기도 했지만 지금은 주택가 골목에 돌기둥 등 일부 잔해만 쓸쓸히 남아있다.
굽이굽이마다 절경이 널려있는 한강에는 상류에서 하류로 내려가면서 정자들이 빼곡했다. 기록을 종합하면, 한강에는 대략 75개의 누정이 존재했다. 광나루와 동호 일대에 18개, 용산강에 9개, 서호에 35개, 노량진에 3개, 양천에 10개의 누정이 있었다. 동호와 서호의 경치가 뛰어나 상대적으로 누정이 집중됐다.
중랑천이 한강과 만나는 지점은 호수를 연상하게 할 만큼 강폭이 넓어 ‘동호(東湖)’로 호칭됐다. 저자도, 두모포, 응봉 등 동호 주변은 예로부터 한강변에서 경관이 수려하기로 유명했다. 조선전기 권신 한명회(1415~1487)의 압구정(狎鷗亭)이 동호 정자 중 하나다. 애초 여의도에 있다가 1476년(성종 7) 동호로 옮겨왔다. 한강개발로 압구정 일대가 완전히 달라졌지만 정자 터는 대략 동호대교와 성수대교 사이 현대5차 아파트로 추정한다. 압구(狎鷗)는 갈매기와 허물없이 가깝다는 뜻으로 세상사에 욕심이 없다는 의미가 담겼다. 김수온의 <압구정기>는 “(한명회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한림(翰林) 예겸(倪謙)에게 정자 명칭을 부탁하여 압구를 받았다”고 했다. 한명회는 압구정을 호로 삼았다.
용산강의 대표 정자는 용양봉저정(龍驤鳳䎝亭)이다. 한강대교 남쪽 노들나루공원 옆 언덕(동작 본동 10-30)에 있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화성 현륭원에 참배하러 갈 때 한강을 건너 잠시 휴식할 목적으로 1791년(정조 15) 완공한 행궁이다.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는 “북쪽에는 높은 산이 우뚝하며 동에서는 한강이 흘러와 마치 용이 꿈틀꿈틀하는 것 같고, 봉이 훨훨 나는 듯하다. … 이에 대신들에게 명해 ‘용양봉저정’이라고 크게 써 문위에 걸게 하였다”고 했다.
화성에 갔던 정조가 환궁하기 위해 한강을 건너는 장면을 묘사한 ‘한강주교환어도’에 용양봉저정이 그려져 있다. 정조 이후 헌종도 용양봉저정을 종종 찾았고, 1867년(고종 4) 9월 9일에는 고종이 행차해 수군의 군사훈련을 보고 밤에는 횃불을 올리는 것을 관람하며 밤을 지새웠다. 용양봉저정 건물들은 고종때 유길준(1856~1914)에게 하사됐다가 1930년 일본인의 손에 들어가면서 온천장, 운동장 등 오락시설과 요정으로 운영되다가 광복후 국유로 환원됐다.
서울의 누정들은 하나같이 당대 최고 권력자들의 소유였지만 지금까지 그 명맥이 유지되는 것이 극히 드문 실정이다. 다시금 권력의 무상함을 느끼게 된다.
<참고문헌>
1. 조선왕조실록. 동국여지비고. 용재총화(성현). 다산시문집(정약용). 동각잡기(이정형). 홍재전서(정조). 견한잡록(심수경)
2. 서울의 누정.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 2012
3. 명승 관련 신사료 연강정사기를 통한 18세기 한강 연안 명승의 현황 및 복원방향 연구. 국립문화재연구소. 2015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지키기 급급했던 일본, 결국 한국에 손벌렸다…휘발유 대거 수출, 대일 흑자 1조7천억 - 매일경제
- 오늘의 운세 2024년 9월 20일 金(음력 8월 18일) - 매일경제
- “미안하다”…22년만에 밝혀진 ‘샵 해체’ 오열하는 이지혜, 무슨일이 - 매일경제
- “6억대로 신축 대단지 살아볼까”…알짜 입지인데 파격 전세 쏟아진다는 이 아파트 - 매일경제
- 내비만 믿고 달렸는데 ‘5시간 논길감옥’…날벼락 맞은 이유 알고 보니 - 매일경제
- “부부 2명도 좁은데 아이는?”…임대주택 5만 가구 ‘텅’, 절반이 10평 이하 - 매일경제
- “카푸어는 감히 못 산다”…‘크게’ 성공하면 타는 아빠車 끝판왕, 4억이면 싸다? [카슐랭] -
- “개발자 필요없어요” 한때 귀하신 몸, 이젠 재취업도 막막…누가 대체하길래 - 매일경제
- “266억원 로또 당첨된 장 모씨”...잭팟 터뜨린 주인공 한인이라는데 - 매일경제
- “가장 바빴던 황인범, 데뷔전에도 편안해 보여”…‘오른발 쾅! 왼발 쾅!’ 패배 속 희망찼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