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유명한 라오콘 군상이 대가의 모작이라면…
(시사저널=조명계 미술시장 분석 전문가(전 소더비 아시아 부사장))
바티칸의 피오 클레멘티노 미술관에 들어서면 라오콘 군상을 가장 먼저 만나게 된다. 고대 그리스 신화 속 인물인 라오콘의 최후를 표현한 작품이다. 팔각형 홀에 위치한 라오콘 군상은 바다뱀이 겁에 질린 남자와 어린 아들 둘을 휘감고 있고, 두 아들은 꿈틀대는 뱀에 맞서 몸부림치고 있다.
황금사과 한 알과 트로이 전쟁
트로이 전쟁은 한국판 '사랑과 전쟁'이다. 바다의 여신 님프 테티스와 펠레우스의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한 불화의 여신 에리스가 앙심을 품고 혼인 잔치 좌중에다 황금 사과 한 알을 던졌다. '가장 아름다운 여신'이라는 문구가 적힌 이 사과를 가지기 위해 헤라와 아프로디테, 그리고 아테나가 다퉜다. 그러나 트로이 왕자 파리스는 아프로디테가 가지도록 했다. 그 대가로 아프로디테는 파리스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주겠다고 약속했고,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를 연결해줬다.
사랑에 눈이 먼 두 남녀는 트로이로 도주했다. 하지만 파리스에게 아내를 빼앗긴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는 치욕감에 떨었다. 미케네의 왕인 형 아가멤논과 함께 트로이를 치기로 하고 전쟁을 시작했다. 왕비를 납치했다는 구실로 아카이아인(그리스인)들은 빌루사의 여자, 황금, 노예를 노려 전쟁을 일으켰다.
기원 전 13세기에 발발했던 트로이 전쟁은 우리에게 익히 잘 알려져 있다. 트로이는 튀르키예 해안의 부유한 도시였던 빌루사를 말한다. 최근 전설로만 알려졌던 전쟁 유적지가 발견됐다. 덕분에 전설에서 실제 전쟁으로 한 발자국 나아간 상황이다.
그리스의 영웅 아킬레우스는 전쟁에서 승리하면 영원한 영광을 얻는 대신 죽음을 맞이한다는 예언을 듣고 고민했다. 하지만 그의 동생이 트로이 왕자 헥토르에게 목숨을 잃게 되면서 복수심에 사로잡힌다. 명예와 죽음 사이에서 고뇌하던 아킬레우스는 피의 복수를 위해 트로이와 헥토르에게 칼날을 겨눈다.
결국 아킬레우스는 헥토르를 죽였다. 그러나 파리스가 쏜 화살은 아킬레우스의 발뒤꿈치에 박혔다.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아킬레우스도 결국 자신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 때문에 죽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아킬레스건(腱)'이라는 명칭이 나왔다. 그리고 파리스도 아카이아인에게 죽임을 당한다. 양측의 영웅들과 신들 사이에 10년 동안이나 계속된 전쟁은 오디세우스의 계책 덕분에 그리스군의 승리로 끝났다.
계책이란 침몰한 배로 만든 목마 하나를 남기고 철수하는 위장 전술을 말한다. 속아넘어간 트로이군은 목마를 성안으로 들이고 승리에 도취되는 실수를 범했다. 새벽이 되어 목마 안에 숨어있던 오디세우스 등이 빠져나와 성문을 열자 그리스군에 의해 성은 함락됐다. 2004년 개봉한 영화 《트로이》에서는 브래드 피트가 아킬레우스 역을 맡았다. 호메로스는 오디세우스가 수많은 위험과 역경을 뒤로하고 마침내 귀향하는 스토리를 대서사시 《오디세이아》로 남겼다. 《오디세이아》는 서구 문학의 시발점이 되었다.
중세시대 라오콘 군상의 발견은 르네상스 시대 가장 중요한 발견의 하나였다. 특히 미켈란젤로에게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1506년 지주인 펠리체 데 프레디스는 자신의 포도밭에 건축공사를 발주했다. 그해 1월14일 인부들이 발굴한 파묻힌 방에서 매우 정교하고 상당한 크기의 대리석 조각들이 나왔다. 온전하지 않은 상태의 조각에는 오른팔이 없는 성인 남성 조각상, 그리고 여러 조각이 떨어져 나간 어린이 조각상이 발굴됐다. 이들의 발굴 소식은 유물수집가였던 율리우스 2세 교황에게 전해졌다.
트로이인들은 전쟁이 끝났다고 환호했다. 하지만 예언자 라오콘은 목마가 트로이의 재앙이 될 것을 알았으므로 불길함이 엄습해 왔다. 라오콘이 이를 프리아모스 왕에게 알려야겠다고 다짐하는 순간, 트로이를 저주하던 신들이 보낸 거대한 뱀들은 라오콘과 두 아들을 물어 죽였다. 이는 역사 이야기가 아닌 전설이다. 하지만 이 전설에서 라오콘이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세계 문학과 역사, 예술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출발점 다른 모작과 위작
라오콘 군상은 헬레니즘 시대 3명의 대표적 조각가인 아타노도로스, 하게산드로스, 폴리도로스의 작품이라고 안내문에 씌어있다. 16세기 고대 역사가 플리니우스가 역사상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고 평했다. 그의 글 외에 작품의 존재에 대해서는 아무도 몰랐다. 그런데 '미켈란젤로가 조각을 모사해 똑같이 만든 것이 진품으로 오인되어 교황 율리우스 2세에 의해 선택된 후, 바티칸 컬렉션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미국 컬럼비아대 린 캐터슨과 같은 대학 고대 유물 권위자인 리처드 브릴리안트, 그리고 뉴욕대 캐서린 웰치 교수 사이에 모작 논쟁이 있었다. 캐터슨은 1501년 라오콘의 뒷모습을 닮은 남성의 몸통 뒷모습을 묘사한 펜화를 들고 미켈란젤로가 라오콘을 조각했다는 가설을 제기했다.
1905년 고고학자 루드비히 폴락은 라오콘 군상이 발견된 장소 근처의 조각 공방 터에서 대리석 팔을 발견했고, 이를 바티칸 미술관에 기증했다. 1957년 바티칸 박물관은 이 팔이 라오콘의 잃어버린 팔일 가능성이 높다고 발표하고 이를 조각에 부착했다. 팔은 450년 전 미켈란젤로가 제안했던 대로 뒤로 구부러져 있었다.
미켈란젤로의 모작 논쟁은 이 구부러진 팔의 발굴에서 기인한다. 라오콘 군상은 1799년 나폴레옹에 의해 루브르로 옮겨졌다.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한 후 1816년 다시 바티칸으로 반환돼 오늘에 이른다.
2005년에 나온 또 다른 가설이 있다. 라오콘 군상이 로마 에스퀼리노 언덕에서 발견될 것이라는 과거 예언이 적중했다. 실제 라오콘 군상을 모작한 사람은 미켈란젤로이고, 미켈란젤로가 제작한 뒤 예언대로 언덕에 숨겼고, 농부와 짠 후 오래된 유물을 발견한 것처럼 조작했다는 것이다. 한데, 오늘날 우리는 미켈란젤로를 비난하지 않고 있다. 모작과 위작은 출발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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