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제국 초석 세웠는데 친구에게 다 뺏겨”…배관공 출신 ‘이 남자’ 기구한 인생 [추동훈의 흥부전]
[흥부전-54][브랜드로 남은 창업자들-46]데이비드 뷰익
그리고 뷰익 가족이 정착한 곳은 다름 아닌 미국 미시간주의 ‘모터시티’ 디트로이트였습니다. 어쩌면 미국에 도착했을 때부터 뷰익은 자동차와의 끈질긴 인연이 시작된 셈입니다. 사실 지금이야 제조업으로 유명한 디트로이트지만 1850년대만 해도 농산물을 유통하고 거래하는 상업의 중심지였습니다.
하지만 그들 가족의 기대는 3년만에 꺾이고 말았습니다. 바로 아버지 뷰익이 사망했고 어머니가 재혼하며 어린 뷰익에거 큰 혼란을 가져다 줬습니다. 결국 뷰익은 1869년, 15살도 채 되지 않은 나이에 공부 대신 일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취업전선에 뛰어듭니다. 당시만 해도 10대에 일을 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았던 분위기였던만큼 뷰익 역시 이러한 길을 택한 셈입니다.
뷰익은 되는대로 일했습니다. 거리에서 신문을 팔거나 농장으로 떠나 막노동을 하며 하루하루 근근이 버텨갔습니다. 또 한 기계가공업체에서도 일하며 기계에 대한 관심도 키워갔습니다. 그러다 그는 배관용품을 만드는 ‘Alexander Manufacturing Company’라는 회사에서 일을 배웠습니다.
배관 사업이 호황을 누리던 가운데 직원이던 뷰익 역시 특유의 근면·성실함으로 회사에서 인정받으며 성장했습니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어린 시절과 달리 일도 잘 하고 돈도 잘 벌기 시작하며 그의 인생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승승장구하던 배관회사는 경영에 문제가 발생하며 1882년 파산을 맞게 됩니다. 경영 실패로 문을 닫게되며 졸지에 실업자가 될 뻔 했던 뷰익은 그의 동료 윌리엄 셔우드와 함께 아예 회사를 인수키로 했습니다. 회사 이름은 ‘뷰익&셔우드 매뉴팩쳐링 컴퍼니’로 지었습니다. 뛰어난 기술자였던 뷰익과 경영감각이 뛰어난 셔우드의 동업은 성공적이었습니다.
결국 뷰익의 회사는 1890년대 초반 디트로이트에서 가장 큰 배관 회사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쫄쫄 굶던 아이가 이제는 지역에서 제일가는 사업가가 된 것이죠.
배관관련 기술에선 경쟁자가 없었던 뷰익의 눈에 다시 새로운 기계가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1890년대 본격적으로 시작된 산업혁명의 정수, 바로 자동차가 그 대상입니다. 배관기술 연구소 한쪽에서 시작된 내연기관 엔진에 대한 연구는 점차 뷰익의 주된 관심사가 되기 시작합니다. 수십년간 해온 배관 사업에 대한 지겨움과 권태가 커졌던 그는 점차 엔진에 매몰되며 배관 사업 자체를 멀리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뷰익은 스스로 엔진을 개발하기를 멈추고 월터 마르와 유진 리처드라는 엔진 전문가를 영입해 새롭게 진용을 꾸립니다. 그렇게 사업 시작 4년만인 1902년 뷰익은 첫 엔진 개발에 성공합니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고집과 집념의 사나이였던 그의 의지는 아무도 꺾을 수 없었습니다. 특히 그가 개발한 엔진은 자동차 역사를 바꿨다고 평가받는 뛰어난 엔진이었습니다. 현대의 엔진들도 대부분 이 오버헤드 밸브식을 채택했기 때문에 모든 자동차 엔진의 아버지가 뷰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기존 사이드 밸브식 엔진이 갖고 있던 약한 출력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핵심으로 한 ‘오버헤드벨브 엔진’이 바로 그가 발명한 새로운 엔진입니다. 당시 사이드 벨브 엔진의 경우 최고 시속이 30km/h에 불과했지만 그의 엔진이 달린 자동차는 50km/h로 달리며 자동차라는 발명품에 걸맞은 기술 역량을 선보입니다.
연구개발에 매진했던 4년간, 뷰익이 판매한 차는 고작 1대였습니다. 사실상 아무런 수익을 내지 못한채 연구개발에만 매몰되며 배관회사서 벌어들였던 돈을 다 썼을 뿐 아니라 계속해서 대출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혁신적인 기술은 갖고 있었지만 돈이 없던 뷰익은 하는 수 없이 자본가에 기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뷰익이 돈을 갚지 못하자 브리스코는 아예 회사 경영권과 기술을 전부 빼았고 아예 회사를 제임스 하이팅에게 매각해버립니다. 그리고 브리스코는 직접 맥스웰-브리스코 컴퍼니를 설립해 직접 자동차 생산에 나서죠. 맥스웰-브리스코 컴퍼니는 당시 미국에서 자동차 생산량 3위를 기록하며 뷰익의 성과를 가로챘습니다.
그래도 다시 마음을 다잡은 뷰익은 자신의 이름을 딴 최초의 자동차 ‘뷰익 모델 B’를 완성하는데 성공합니다. 세계최초의 오버헤드 밸브 엔진이 장착된 이 자동차는 빠른 속도와 멋진 디자인으로 인기를 모았습니다. 하지만 1년 동안 해당 차량은 37대가 판매되는데 그쳤습니다. 대량 생산을 해야 했지만 회사를 인수한 제임스가 생산 공장에 투자를 제대로 하지 않은 탓이었죠.
결국 전전긍긍하던 제임스는 그의 친구 윌리엄 듀랜트를 찾아가 SOS를 청합니다. 당시 미국 최대 규모의 마차 생산업체를 운영 중이던 듀랜트는 마차의 시대가 끝나고 자동차의 시대가 올 것임을 예감했습니다. 특히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뷰익의 차는 그의 눈에 확 띄었습니다. 듀랜트는 곧바로 뷰익자동차의 지분을 사들여 경영권을 인수합니다.
결국 불만이 쌓인 뷰익은 1906년 듀랜트의 회사를 떠났고 듀랜트는 뷰익을 비롯해 자동차 회사를 자회사로 둔 지주회사 GM을 설립하며 자동차 왕국을 만들게 됩니다.
만약 그가 잘했던 배관과 화장실 설비에 집중했다면 그의 삶은 어떻게 변했을까요? 아마 더 부유하고 더 행복하게 살았을지 모르겠지만 반대로 자동차 산업에서 그의 발명품이 더욱 늦게 또는 다르게 개발됐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또한 지금의 GM왕국 역시 그가 배관공으로 머물렀다면 탄생조차 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강형욱 “아내는 통일교 2세…스무 살에 탈퇴했다” - 매일경제
- “‘닭강정 6000마리’ 튀겨 달라고”…1.2만명 모인 인천항 맥강파티 화제 - 매일경제
- 이승기 법정에 직접 나와 충격 고백…“대표에 폭행 등 가스라이팅 당해” - 매일경제
- “尹 다시 심판해야” 서울역 앞서 대규모 집회…조국 “8년전 일 다시” - 매일경제
- “외출시 우산 꼭 챙겨야겠네”…내일 전국 비, 시간당 10~30mm 강한 비 - 매일경제
- 45살에 어렵게 얻은 딸, 제왕절개하다 얼굴에 칼자국…병원은 ‘모르쇠’ - 매일경제
- “노래를 엄청”…‘구독자 40만 기념’ 조민 노래 들은 유명가수의 솔직평가 - 매일경제
- “우크라에 서방무기로 러시아 본토 때리게 해주자”…나토총장 제안 - 매일경제
- “유명가수가 나에게 입으로”…성폭행 폭로 전직 모델출신女 ‘충격고백’ - 매일경제
- 김민재 잔류하나…“다음 시즌 더 좋은 모습 보여줄 것” → 뮌헨은 “기대됩니다” - MK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