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에이트 쇼’ 한재림 감독 “대리만족 ‘사이다’ 피하려 했다”

송은아 2024. 5. 25.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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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민란을 다룬 창작물은 가슴을 데운다. 불평등하고 부조리한 현실, 피지배 계층을 짓누르는 고통과 억압을 보면 울분이 차오르고, 이들이 마침내 분연히 떨쳐일어날 때면 희열이 인다. 벅찬 가슴을 안고 현실로 돌아오면 우리도 무언가 바꿀 수 있을 것 같다. 

최근 공개된 넷플릭스 시리즈 ‘더 에이트 쇼’를 연출한 한재림 감독은 묻는다. “정말 그런가요?”
사진=넷플릭스 제공
‘더 에이트 쇼’는 인생 막장에 몰린 8명이 8층으로 이뤄진 수상한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기만 하면 돈을 버는 게임을 그렸다. 초반에 게임 참가자들은 원시 인류처럼 아기자기하게 힘을 합치지만 이내 분열한다. 식량을 독점한 채 막대한 돈을 벌고 행복하게 소비하는 8층, 종이상자를 이불 삼아 궁상 맞게 버티는 3층, 가장 적은 돈을 벌면서 거주민의 쓰레기와 분뇨를 모두 받아주는 1층으로 사는 형편이 달라지고, 서서히 계급이 형성된다. 

지배·피지배 관계가 공고해지지만, 자본주의적 욕망에 사로잡힌 참가자들은 게임을 떠나지 못한다. 물리적·정신적 폭력은 갈수록 가혹해진다. 4, 5화쯤 보다보면 저층 거주민에게 어서 빨리 ‘혁명의 그날’이 오기를 응원하게 된다. 이 드라마를 계속 보게 만드는 힘은 이 기대감이다.

‘더 에이트 쇼’는 보는 이의 기대에 살짝 비튼 답변을 내놓는다. 왜 저층 거주민은 자신들을 극악스럽게 괴롭힌 상층 거주민에게 속시원히 보복하지 못했을까. 최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한 감독은 “그러면 진실을 얘기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반란이 성공하면) 혐오를 쌓은 다음에 그 혐오를 깨부수는 ‘사이다’를 주는 거잖아요. 그럼 재미만을 주는 거예요. 그냥 소비되는 거죠”라며 “여기에서 카타르시스를 주는 건 자본주의 사회에서 거짓말이라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우리가 무너트릴 수 있나요. 불가능하죠. (반란 성공은) 대리만족과 허상을 주는 거예요. 그러니 이 무너트릴 수 없는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해봐야해요. 드라마가 ‘사이다’를 주면 고민을 안 하잖아요. 그걸로 끝, 만족하면서 살잖아요.”

‘더 에이트 쇼’에서 저소득층을 상징하는 1층은 딱할 만큼 단점이 많다. 신체 장애를 가진데다 게임으로 얻는 돈도 적고, 원룸보다 작은 방은 거주민들의 분뇨로 가득 찬다. 그렇다고 이 인물의 인간성이 특별히 좋은 것도 아니다. 
한 감독은 이런 설정에 대해 “저도 마음이 아프다”며 “이 인물을 보며 ‘우린 네가 아니야’ 위안을 얻고 (드라마에) 대리만족한 채로 사는 게 맞나 고민해보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진짜를 봐야 무언가 바꾸더라도 바꿀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가 시급에 맞게 각자 자리에서 힘든 하루를 보내고 점점 살기 힘들어지니 문화예술을 보며 ‘사이다, 사이다’ 이러면 세상은 안 바뀌잖아요.”

2층 거주민이 쇼를 끝내고 싶어할 때 공용공간의 시간을 모두 써버리지 않는 것 역시 자본주의 시스템을 뛰쳐나가지 못하는 현대인을 빗댄 설정이다.

드라마가 진통제처럼 현실의 문제를 망각하게 만드는 걸 경계한만큼 ‘더 에이트 쇼’에는 창작자로서 한 감독의 고민도 반영됐다. 

“관객에게 어떤 재미를 줘야 하나. 도파민의 시대잖아요. 예전에는 우리가 작품을 대할 때 재미와 의미, 질문, 혹은 작가의 개성을 많이 지켜봤거든요. 지금은 재미만 있으면 다 된다는 사고가 극에 달한지 오래 된 것 같아요. 유튜브도 숏츠도 그렇고요. 이런 상황에서 내 작품은 어떤 지점에 서 있을 것인가. 어떤 장면에 관객이 쾌감을 느낄지 아는데, 재미와 자극을 위해 이런 장면을 남발하는 게 맞나 고민입니다.”

일부에서는 ‘더 에이트 쇼’ 후반부 폭력에 대해 ‘과하다, 불쾌하다’고 말한다. 이는 정확히 한 감독이 원한 반응이다. 
“재미만 자꾸 추구하다보면 나중엔 점점 센 자극을 원해요. 이런 것에 대한 풍자이지, 폭력으로 쾌감을 주려는 의도는 1도 없었어요. 고문 장면 역시 자극의 끝이 뭘까 되돌아보자는 거예요. 재미만 추구했을 때 뭐가 남겠나. 자극적으로 하려면 참가자들의 베드신을 왜 안 보여줬겠어요. ”

‘더 에이트 쇼’는 누구 하나 빠지지 않는 배우 8명의 호연이 높이 평가받고 있다. 한 감독은 “여러 번 볼수록 배우들 연기가 잘 보일 것”이라며 “8명이 한꺼번에 나오는 연기를 하기가 쉽지 않은데 배우들이 저 멀리 있어도 다들 연기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출연진에 대해 “안 아픈 손가락이 없지만”이라고 전제를 달며 “(문정희가 연기한) 5층에 애착이 간다”고 했다. 보는 이를 답답하게 만드는 캐릭터를 워낙 잘 연기하는 바람에 혹여라도 안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어서다.

박정민이 연기한 7층이 영화 제작자와 만나 설교를 듣는 장면에 대해서는 본인의 경험담은 아니라고 밝혔다. 그저 “추구하는 가치가 재미와 의미로 서로 다른 사람을 보여주는 상투적인 장면”이라고 한다. 

이 작품은 한정된 공간에서 막대한 돈을 놓고 벌이는 게임이라는 점에서 넷플릭스 ‘오징어게임’과 교집합이 있다. 한 감독은 “이 작품을 준비하는 중에 ‘오징어 게임’이 나왔다”며 “이 작품은 서바이벌 게임의 장르적 재미를 주기보다 사회부조리극이고 재미란 무엇인가란 주제를 관객에게 질문하는 이야기”라고 선을 그었다.

송은아 기자 se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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