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실패 반복되면 민생도, 정치도 실패한다 [양재찬의 프리즘]

양재찬 편집인 2024. 5. 25.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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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스쿠프 양재찬의 프리즘
오락가락하는 정부 정책들
헷갈리는 탓에 적잖은 손실
해외 직구 인증 정책 철회 등
설익은 정책 번복 사례 잇따라
진정 필요한 정책들 발굴 절실
정책 혼선과 뒤집기는 정부 정책의 신뢰도를 떨어뜨린다. 이런 혼선을 막으려면 즉흥적인 정책 추진을 피해야 한다.[사진=연합뉴스]

정부 정책들이 오락가락하거나 뒤집어지며 가계와 기업 등 경제주체들을 헷갈리게 하거나 적잖은 손실을 끼치고 있다. 해외 직접구매(직구) 제품의 안전 인증 의무화 정책을 번복한 게 대표적 사례다.

정부는 16일 유모차 완구 등 어린이용품과 전기ㆍ생활용품, 생활화학제품 등 80개 품목에 대해 국가통합인증마크(KC) 인증이 있어야 세관을 통과시키겠다고 밝혔다. 알리익스프레스ㆍ테무ㆍ쉬인 등 'C커머스(중국 e커머스) 공습'을 겨냥한 규제 조치였다. 하지만 소비자 선택권을 제한한다는 비판과 규제 실효성이 부족하다는 논란에 휩싸여 사흘 만에 철회했다.

국토교통부와 경찰청이 20일 발표한 고령자 '조건부 운전면허' 도입 검토는 하루 만에 바뀌었다. 조건부 면허제는 야간 및 고속도로 운전 금지, 속도제한 등을 조건으로 면허를 허용하는 것이다. 인지능력과 반응속도가 떨어지는 고령자 운전의 안전을 강화하고 사고를 줄이기 위해 필요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교통약자인 어르신들의 이동권을 지나치게 제한하고, 대중교통 취약지역에 대한 대안이 없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22일에는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밝힌 공매도 재개 방침을 폐기했다. 공매도는 주가가 내릴 것을 예상하고 주식을 빌려 판 뒤 차익을 노리는 투자기법이다. 정부가 개인 투자자 보호를 위해 한시적으로 금지했는데, 주가 거품을 경고하는 기능이 있고 글로벌 스탠더드에 어긋난다.

금감원장은 며칠 전 기자들에게 "6월 중 공매도 거래 일부를 재개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정부도 당초 올 상반기까지 공매도 금지 조치를 시행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대통령실 관계자는 "투자자가 신뢰할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으면 재개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라고 밝혔다.

설익은 정책들을 내놨다가 비판 여론에 밀려 철회ㆍ번복ㆍ수정한 사례는 현 정부 초기부터 잇따랐다. 초등학교 만 5세 입학, 반도체 세액공제 확대(대기업ㆍ중견기업 8%→15%, 중소기업 16%→25%), 주 69시간 근로 허용, 대입수능 킬러문항 배제, '연구비 카르텔' 지적에 이어진 연구개발(R&D) 예산 삭감 등등.

이런 정책 혼선과 뒤집기는 정부 정책의 신뢰도를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비록 길지 않은 기간이라도 정책의 대상자인 가계와 기업 등 경제주체들에게 손실을 끼친다. 꼭 필요한 정책임에도 다시 추진하기 어렵게 된다.

이들 정책 혼선에는 몇가지 공통점이 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밀어붙이기와 정책(방향)을 반대하는 여론이 거세지면 관련 부처 장관의 책임 회피와 말 바꾸기에 이어 혼선의 원인을 언론이나 외부 환경 탓으로 돌리는 점이다. 주무부처가 충분한 의견 수렴과 진중한 검토 끝에 정책을 내놓지 않는 데다 남 탓을 하니 공무원 조직도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이런 분위기 영향인지 국토부는 24일 내놓겠다던 주택ㆍ토지 분야 규제 합리화 조치(전세ㆍ주택공급 대책)를 연기했다. 박상우 장관이 13일 기자간담회에서 직접 대책 발표를 예고해 시장의 관심을 키웠는데, 발표 3일 전 '관계기관 협의 등'을 이유로 연기했다. 정부는 13일에도 전세사기 피해자를 위한 대책을 발표하려다 이를 취소하고 국토부장관 간담회로 대신했다.

정책 혼선을 막으려면 즉흥적인 정책 추진을 피해야 한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6월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연구비 카르텔'을 지적하며 R&D 예산을 일괄 삭감하도록 지침을 내렸다. 그로부터 11개월 뒤, 지난 17일 열린 같은 회의에서는 "성장의 토대인 R&D 예비타당성조사를 전면 폐지하고, 투자 규모를 대폭 확충하라"고 지시했다.

인공지능(AI) 등 글로벌 기술경쟁에 기민하게 대응하기 위해 예타 규제를 손보는 것은 필요하다. 그렇다고 예산 낭비가 우려되는 부분을 면밀하게 검토하고 통제하지 않은 채 예타부터 폐지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정책 혼선과 급선회가 잇따르자 공직사회가 흔들리는 분위기다. 복지부동이 만연하고 레임덕이 앞당겨지는 등 나비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 국민의힘이 뒤늦게 여당 역할을 자임했다. 현 정부 1기 경제팀장이었던 추경호 원내대표는 "설익은 정책을 발표해 우려와 혼선이 커질 경우 당도 강한 비판 목소리를 내겠다"고 했다.

국내외 경제안보 상황을 제때 제대로 파악하고, 진정 필요한 정책들을 발굴해야 한다.[사진=연합뉴스]

대통령실도 당정협의를 강화하기로 했다. 정부와 대통령실, 국민의힘이 '정책협의회'를 신설하고 매주 회의를 열기로 했다. 국무총리,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대통령 비서실장이 참여하는 기존 고위협의회도 매주 일요일 정례화하기로 했다.

회의를 늘리거나 일요일에도 만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국내외 경제안보 상황을 제때 제대로 파악하고, 진정 필요한 정책들을 발굴해야 한다. 정책설계부터 수요자 중심으로 고민하고, 이해관계자들을 설득하고, 실행과정을 점검하며 보완해 나가야 한다. 대통령의 '좋빠가(좋아, 빠르게 가)' 추종에 앞서 부처 장관들의 책임행정도 절실하다. 정책 실패가 반복되면 민생도, 정치도 실패한다.

양재찬 더스쿠프 편집인
jayang@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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