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회고록, 김정숙 인도 방문말고 더 중요한 것은?

이재호 기자 2024. 5. 25.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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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books] 문재인 전 대통령 외교안보 회고록 <변방에서 중심으로>

문재인 전 대통령의 외교안보 회고록 <변방에서 중심으로>가 출간된 이후 가장 큰 관심을 받은 이는 문 전 대통령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도,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도 아닌 김정숙 전 영부인이었다. 특히 여당에서는 윤석열 대통령의 영부인 김건희 전 코바나컨텐츠 대표의 의혹에 대한 맞불 성격으로 김 전 영부인의 인도 방문 비난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와 관련 문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모디 총리는 허황후 기념공원 조성 계획을 내게 말하면서 공원 개장 때 꼭 다시 와달라고 나를 초청했어요. 나중에 그 기념공원을 개장할 때 인도 정부는 나를 재차 초청했는데, 나로서는 인도를 또 가기가 어려웠죠. 그래서 고사했더니 그렇다면 아내를 대신 보내달라고 초청해서 아내가 나 대신으로 개장행사에 참석했어요"라며 당시 상황을 전했다.

문 전 대통령은 "제가 이 이야기를 소상히 하는 이유는, 지금까지도 아내가 나랏돈으로 관광여행을 한 것처럼 악의적으로 왜곡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라며 정치적 논란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알면서도 정면돌파를 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이후 당시 국정기획상황실장이었던 윤건영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과 외교부가 김정숙 영부인을 초청한다는 인도 총리 명의의 초청장이 있다고 밝히면서 논란은 다소 주춤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물론 여당은 여전히 특검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실제 인도 방문에 대한 특검보다는 김건희 영부인 특검을 막기 위한 방어 수단인 것으로 보인다.

회고록에는 이처럼 문 전 대통령이 재임 중 겪었던 여러 사건들과 관련해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이야기들이 많이 실려 있다. 특히 문재인 정부가 남북 정상회담, 역사상 최초의 북미 정상회담, 2019년 6월 남북미 정상의 판문점 회동 등 외교안보 분야에서 굵직한 사건들에 주도적으로 관여했던 정권이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대목이 많다.

그런데 이보다 더 눈에 들어왔던 점은 사안을 다루는 문 전 대통령의 철학이었다. 문재인 정부가 직면했던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그는 '적폐청산'이라는 이름으로 개혁을 추진하기도 했지만, 한국 정부가 가져갸아 할 '연속성'이라는 측면도 중시하며 사안에 접근했다. 전 정권이 했던 일들을 전부 바꾸거나 없애버리는 식의 행보를 보이지는 않았다.

"국가정책의 명칭 같은 것을 정부가 바뀔 때마다 바꿔버리는 것은 우리 국가정책의 연속성이나 이어달리기 면에서 큰 손실입니다. 내가 취임해서 보니까 아세안(ASEAN) 국가들, 특히 메콩 지역 국가들과 우리 코이카 (KOICA, 한국국제협력단)를 통해 농촌지역 개발협력사업을 하는데, 그 사업의 이름이 새마을협력사업이었어요.

그 나라들은 '새마을'이라는 용어와 상관없이 그들의 농촌 개발에 큰 도움이 됐기 때문에 매우 고마워했는데, 우리가 집권하니까 사업 명칭을 바꾼다는 말이 들려왔습니다. 무슨 '농촌개발협력사업' 같은 이름으로 바꾸겠다고 해서, 내가 그러지 말라고 했어요. 기왕에 그 나라에 그 이름이 각인돼 있고 그것이 호응을 받는다면 기존 정책의 이름을 그대로 지속시키는 게 좋겠다고 지시했지요.

지금도 '새마을협력'이라는 사업 명칭이 유지되고 있어요. 전 정부 지우기를 해서 얻는 게 뭔지 모르겠어요. 명칭을 바꾸면 기존 외교정책의 후퇴처럼 느껴지는 거죠. ASEAN 국가들은 그게 걱정이었을 테죠."

▲ 문재인 외교안보 회고록 <변방에서 중심으로>, 김영사 펴냄. ⓒ김영사
한일 간 일본군 '위안부' 합의에 대해서도 문 전 대통령은 유사한 태도를 보였다. 위안부 합의의 내용과 성격에 문제가 많았지만, 국가가 체결한 합의를 아예 부정하는 것은 "국가정책의 연속성이나 이어달리기"면에서 손실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대신 합의의 문제점을 국민에게 상세히 공개하고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더욱 세심한 배려를 하는 방식으로 사안을 마무리했다.

사드 배치 문제에 대해서도 야당 국회의원 시절과 대통령 당선 이후 입장이 달라졌다는 비판이 있었는데, 이에 대해 문 전 대통령은 "그때 사드 배치 결정을 철회하고 다시 가져가라고 할 수는 있었겠지만, 만약 그렇게 했다면 한미동맹에 큰 균열이 생기는 거죠. 그것을 국민들이 동의할 리가 없고요. 그렇게 되면 평화프로세스를 힘있게 추진하기는 불가능해지죠"라며 국가 정책의 연속성, 대외 신뢰도 및 정책 우선순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태도를 보였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준비 과정과 관련해 문 전 대통령은 "정부 출범 당시 올림픽 준비가 부실할 수밖에 없었어요. 탄핵 국면 동안 행정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으니까요. 그렇지만 기존의 조직과 사람을 바꾸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봤어요. 개막식 감독도 바꾸지 않았지요. 다만 우리가 점검해보고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갔어요. 개막식도 드론쇼 같은 것이 추가되면서 훨씬 역동적인 모습을 갖추게 됐죠"라며 또 한번 연속성을 강조했다.

문 전 대통령의 이러한 태도는 안정적인 국가 운영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직선제로 대통령을 선출하는 선거 제도를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는 국민 주권이 제대로 실현되지 않은 것이라는 비판도 가능한 부분이다. 기존의 공약과 입장으로 나타나는 국정철학이 제대로 실행되지 않았다고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문 전 대통령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과정에서 보다 적극적인 입장을 가져갔어야 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그는 개성공단 가동과 금강산 관광에 대해 "제재를 무시하고 재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다만 남북관계의 특수성을 내세워서 어떻게든지 집요하게 UN 안보리 제재의 예외를 인정받았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문 전 대통령은 국가 정책을 운영할 때 단기적 성과가 아닌 장기적 관점을 가져야 한다는 점을 지속적으로 강조했다. 그러다 보니 기존의 공약이나 입장이 달라지는 부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사실상 실패했다는 평가에 대해 "결과를 다 얻지 못했다고 그 과정 자체를 폄훼하는 것은 옳지 않아요. 평화라는 것이 언젠가는 공고해져야겠지만, 공고한 평화에 이르기까지 평화를 위한 노력은 모두 평화로 가는 하나의 과정이거든요. 그 과정 하나하나가 중요하죠"라고 답했다.

평창 동계올림픽 기간 중 한미 연합 군사 훈련을 유예하자고 제안한 것 역시 장기적 차원에서 준비한 것이라고 문 전 대통령은 설명했다.

"취임 직후부터 길게 내다보면서 안보와 국방을 중시하는 여러 행보를 계속해왔습니다. 취임 직후 한미연합사를 방문한다거나 우리 합동참모본부(이하 '합참')과 국방부를 방문하기도 하고, 트럼프 대통령 방한 때는 평택 미군기지를 방문해 거기서 트럼프 대통령을 맞이하고 장병들과 함께 식사를 하기도 했죠.

현무 미사일 발사시험을 참관하고, 북한의 미사일 도발에 맞서 우리 역시 상응하는 미사일을 발사하고 공중폭격 훈련을 실시하는 등 강력하게 맞대응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안보를 중시하면서 강한 국방, 강한 한미동맹, 강력한 연합방위 태세를 강조하는 행보를 축적해놓았기 때문에 연합훈련을 유예한다는 결단을 크게 저항받지 않고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문 전 대통령은 "국가 운영은 당면한 과제뿐 아니라 미래까지 멀리 보면서 해야 하는 것"이라며 "대화와 외교를 통해 오래된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원래 시간이 오래 걸리는 법이지요. 더구나 70년 간 적대해 온 국가들 사이에 고작 2년도 안 되는 대화에서 빠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고 대화를 포기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해 남북, 북미 간 보다 긴 호흡으로 문제 해결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하기도 했다.

문 전 대통령의 정책 노선이나 성과 여부 등은 논쟁의 영역이다. 그의 회고록에서 이를 따지기보다는, 문 전 대통령이 행정부의 최고 책임자로서 어떤 기준을 가지고 본인의 생각‧신념‧공약 등을 관철하기도 하고 때로는 물러서기도 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극심한 이념 갈등을 벌이고 있는 지금의 한국 사회에 더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5년 단임제 대통령이 만들어 놓은 것 중에 무엇을 폐기하고 무엇을 계승할 것인지, 그리고 그 기준을 무엇으로 잡아야 할지에 대해 문 전 대통령의 회고록을 통해 참고해보면 어떨까. 덧붙여 남한을 신경 쓰지 않고 민족을 지우고 적대적 두 국가로 지내자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도 회고록을 꼭 한 번 봤으면 좋겠다. 김 위원장의 답이 국가를 운영하는 '장기적 안목'에서 봤을 때 꼭 정답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 지난 2018년 4월 27일 판문점에서 정상회담을 가진 문재인(오른쪽)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판문점에서 군사분계선을 넘고 있다. ⓒ판문점 공동취재단

[이재호 기자(jh1128@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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