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을 '향한' 과정 철학의 모험은 가능한가
어떤 책은 읽을 때 대단히 설레고 짜릿하다. 어떤 두근거림을 주며 세상을 날카롭게 바라볼 수 있는 무언가를 손에 쥐여주는 것 같다. 카를 마르크스의 저작들이 그렇다. 반면, 어떤 책은 읽을 때 나도 모르게 차분하고 담담해진다. 흥분보다는 평화롭다는 감각을 일깨운다.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글이 그러하다. 화이트헤드의 과정 철학은 지금 여기 이곳의 부조리에 맞설 힘보다는 무언가 다른 세상을 꿈꿀 힘을 주기에 매력적인 게 아닐까 싶다. 달리 말해, 화이트헤드를 통해 우리는 모이고 흩어지며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우주의 조화를 이해할 수 있으며, 그 이해 속에서 우리는 다채롭고 아름다운 우주를 전망하게 되기 때문이 아닐까.
<기준 없이>에서 스티븐 샤비로는 화이트헤드 철학을 이자벨 스탕게스가 제안한 '구축론적' 관심 아래에서 독해한다. 그럼으로써 향후 <사물들의 우주> 등에서 본격적으로 개진될 자신의 미학 이론과 사변적 실재론의 바탕을 그린다. 여기서 샤비로의 독해 작업은 기본적으로 비교에 근거하고 있으며, 이 비교는 두 가지 방향에서 이뤄지며, 대담하면서도 독창적이다. 하나는 화이트헤드와 질 들뢰즈를 교차하면서 서로 간의 공통된 면모를 도출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화이트헤드를 임마누엘 칸트의 계승과 쇄신이라는 경로 위에 놓는 것이다. <판단력 비판>이 주는 함의를 드러내면서 화이트헤드가 칸트를 계승하는 맥락을 추적하는 한편, 칸트가 놓지 못한 인식론적 문제설정과 선험적 논리학 등에서 벗어남으로써 화이트헤드가 <판단력 비판>의 함의를 확장해주는 대목을 강조한다. 또한, 이를 들뢰즈가 칸트를 계승 및 쇄신하는 작업과 비교하면서 다시 한번 화이트헤드와 들뢰즈 사이의 유사성을 논증한다. 이러한 논증을 하나씩 따라가다 보면, '느낌', '주체적 형식', '아름다움' 등 과정 철학에서 난해한 개념들의 정의와 그것이 화이트헤드의 철학에서 배치되는 맥락, 나아가 그를 통해 화이트헤드가 제기하고 싶었던 논점 등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런 점에서 샤비로는 과정 철학을 만날 또 다른 길을 제시해준다.
샤비로가 화이트헤드를 독해하는 방법 자체도 흥미롭지만, 더 눈길을 끄는 건 그가 이 작업을 시작하게 된 배경이다. 샤비로는 '서문'에서 이 책이 화이트헤드가 하이데거의 자리를 대신하는 세계를 상상하는 철학적 공상에서 비롯되었다고 얘기한다. 이건 넓게 보아 신유물론으로 통칭되는 여러 논의(그레이엄 하먼, 레리 브라이언트, 티머시 모턴, 퀭탱 메이야수, 캐런 바라드 등) 사이에 어떤 쟁점을 형성하는 것과 관련된다. 근대 철학을 기준 삼을 때는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 사이의 대결'로 볼 수 있고, 샤비로처럼 현대 철학을 기준 삼을 때는 '화이트헤드와 하이데거 사이의 대결'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샤비로가 세운 구도는 정적이고 개체 중심적 논변과 동적이고 관계 중심적 논변 사이의 이론적 쟁점을 명확하게 한다. 이와 관련해, 샤비로는 개체와 관계를 이원론적 대립으로 환원시키기보다 생성의 관점에서 그들을 통합하는 길을 찾고자 한다. 화이트헤드와 들뢰즈에 의거하여 실제적인 결과가 없는 영원한 변화, 끊임없는 반복의 단조로움으로부터 과정 철학을 구해낼 수 있다고 본다.
이뿐만 아니라, 샤비로의 공상은 실천적 측면에서도 또 하나의 쟁점을 제기한다. 바로 ‘비판’에 관한 것이다. 샤비로에 따르면, 하이데거의 전통에 서서 탈근대적 사유를 개진한 흐름에선 해체를 자신의 과업으로 삼았다. 그런데 철저히 모든 걸 해체한 뒤엔 무엇이 남는가? 비판만 일삼다가 희망 없는 아포리아에 갇히고 마는 건 아닐까? 이는 분명 거친 물음이다. 이론가의 자기만족에 사로잡혔다는 샤비로의 평가도 어떤 면에선 과하거나 부당하다고 반론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미 지나간 세계에 관한 고답적인 탐구만으로 충분한 건지 되물을 필요가 있다. 언어의 한계가 세계를 한계 짓는다는 회의적 태도가 온당한 건지 되물을 필요가 있다.
갑작스럽지만, 샤비로의 얘기를 잠시 벗어나 보자. 지난 3월 서울 모처에서 진보적 사회운동단체들과 활동가들이 모여 '체제전환운동 정치대회'라는 걸 열었다. 거기서 나온 여러 얘기 중에 하나를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그동안 자본주의, 가부장제 등에 대한 비판은 숱하게 많았다. 뭐가 문제인지는 많이들 얘기해왔다. 불평등과 기후위기가 문제라는 건 당연한 게 되어 버렸다. 거기에 맞서자는 주장으론 충분치 않다. 어떤 세상을 만들 것인지에 관해 얘기해야 한다. 우리에게 다른 세계를 향한 욕망이 있다. 새로운 세상을 전망하고 요구하며 실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학술적인 용어로 달리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왜 비판은 전망으로 이어지지 못했는가? 모순과 부조리를 드러내고자 했던 비판적 분석은 왜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그걸 실현하기 위한 행동으로 나아가지 못했는가? 샤비로의 표현을 빌리면, 어쩌면 하이데거의 전통에 갇혀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화이트헤드는 어떤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을까?
물론 샤비로가 6장 '귀결들'에서 언급했듯이, 화이트헤드는 실제로 자본주의에 관한 얘기를 직접적으로 하지 않았다.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은 명령하지도, 윤리적 요구를 만들고 부과하지도, 합법성에 대한 판단을 내리지도 않는다.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은 "모든 존재자와 모든 현존의 형식에 일의적이고 무차별하게 적용된다...특히...인간-중심적이지 않기 때문에, 당파적이거나 정치적으로 일방적일 수가 없다(322)." "어떤 방식으로든...정치-미학적 판단에 공헌하지(326)" 않는다.
"하지만 화이트헤드는 그와 같은 판단이 유용하게 틀지어지고 명확하게 표현될 수 있는 '범주적 도식'을 제공한다." 화이트헤드는 우리 경험의 모든 요소를 해석해낼 수 있는 일반적 관념들의 체계를 세우고자 했다. 현존하는 것들이 어떻게 자신을 새롭게 구성하면서, 동시에 자신을 새로운 어떤 걸로 세계에 첨가하면서 세계를 새롭게 만들어내는지를 남김없이 파악할 수 있는 사유를 정립하기 위함이었다. 창조성은 신을 포함한 모든 존재의 경험에 나타나는 근본적 사태다. 우주는 계속해서 창발하면서 다양하고도 새로운 무언가를 생성하고 그 속에서 우주 자신도 변화한다. 그 와중에 우리는 이미 "계속해서 우리의 실제적 상황을 평가하고, 칭찬하거나 비난하고, 부정적으로 파악하여 바꾸려(325)" 한다. 인간과 비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는 독특하고 미적인 가치평가에 입각해서 주체적으로 경험한다. 여기에 객체적 여건으로 결정되지 않는 미결정성의 지대가 놓여 있다. 화이트헤드는 주체적 형식과 욕구라는 개념을 통해 이러한 새로움과 다양함의 현존을 입증했다.
하지만 화이트헤드와 만날 때처럼 세상은 그리 평화롭지 못하다. 현존하는 사태는 평온함과는 거리가 멀다. 21세기를 규정하는 거대한 두 위기, 불평등과 기후위기는 불안과 공포를 고조시킨다. 정녕 다양성과 조화가 무너지고 있는 이 세계 또한 ‘아름다운 것’인가? 제이슨 W. 무어는 <생명의 그물 속 자본주의>에서 자본주의를 하나의 세계 생태로 긍정하는 식으로 그것이 구성되어온 역사적 과정을 명확히 하려 시도했다. 무어는 인간 자연과 비인간 자연의 다발, 즉 생명의 그물이 공동생산한 역사적 자연의 일부로 자본주의를 규정한다. 무어는 마르크스의 역사유물론과 변증법을 통해 관계주의적이고 생태론적인 전체론을 사유한다. 그러면, 우리는 화이트헤드와 더불어 그와 같은 시도를 해볼 순 없을까? 객체적 여건과 주체적 형식 등 경험과 그 속에서 이뤄지는 생성을 파악하는 방식에 초점을 둔 화이트헤드의 미학에선 오늘날 세계, 특히 자본주의로 특징지어지는 세계를 어떻게 바라볼까? 그건 어떤 점에서 무어의 시도와는 다른 함의를 지니게 될까?
물론 샤비로는 6장 '귀결들'의 10번 각주에서 안느 포머로이를 언급하며, 마르크스와 화이트헤드를 연결하는 작업에 신중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또한, "화이트헤드의 책이 새로움과 모험을 위한 우리의 끈질긴 갈망을 정당화하고 그것 속으로 우리를 되던지면서 끝난다(332)."고 말한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거기서 멈출 수 없다. 그 갈망을 실현하기 위한 숱한 경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경험을 피하거나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의 언어는 그 경험을 받아들일 틀을 우리에게 쥐여준다. 그런데 화이트헤드와 더불어 그 경험을 비판하고 성찰하는 계기를 발견할 순 없는 걸까? 자본주의에서 마주하는 화해 불가능한 경험을 화해시킬 수 있다면, 우리는 자본주의가 아닌 다른 세계로 창조적으로 전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걸 위한 한 가지 논점을 짧게 확인하는 걸로 글을 마치려 한다.
샤비로가 잠깐 언급하고 지나가는 포머로이의 작업에선 화이트헤드가 제기한 '개념적 역전', '비순응적 명제'이라는 범주가 중요하게 취급된다. 그것들이 새로움과 창조성을 설명하는 데 도움되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현실적 존재가 객체적 여건을 느낄 때 현실적 존재는 영원한 객체를 참조하고 자신의 주체적 지향에 비춰서 그 여건을 파악하게 된다. 그런데 그때 그 여건 중 어떤 걸 받아들이지 못하기도 한다. 이렇게 순응할 수 없을 때 현실적 존재는 영원한 객체나 여건에서 실현되지 않은 무언가, 잠재된 무언가인 '아직은 아닌 것(not yet)'과 '현실적인 것과는 다른 것(other than actual)'을 통해 새로운 걸 창조하게 된다.
샤비로가 정립하려 한 비판적 심미주의에서 ‘비판’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필자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샤비로는 <사물들의 우주>에서 (정치)경제학과 공존하지만 경제로 환원될 수 없는 내적 경험의 영역, 미학의 영역에 집중했다. 그 대가로 (정치)경제학은 화이트헤드주의자가 말하는 경험에서 배제되고 말았다. 이 공백을 채운다면, 화이트헤드가 말하지 않았으나 은연중에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 즉 과정 철학에 기반한 정치-미학적 판단을 할 수 있지도 모른다.
인간 자연과 비인간 자연 중 어떤 존재는 무엇이 더 아름다운 세계인지, 그 가치평가를 할 주체적 형식을 지니고 있다. 더 나은 세계를 향해 전진할 욕망 또한 갖고 있다. 과정 철학 내에서 아름다움의 미학이 정치적 실천이 되기 위한 디딤돌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그걸 경험, 달리 말해 수행적 실천의 몫으로만 남겨두면 다시금 자기만족, 회의주의, 비관주의에 빠져들지도 모른다. 샤비로와 더불어 그리고 그를 넘어서, 화이트헤드를 읽을 때 마주하는 긍정과 낙관의 힘을 굳건히 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길 바란다.
[박기형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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