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극 하늘에는 강이 흐르고 거대한 렌즈가 뜬다
하늘과 구름 관측하기
중위도에서 생성된 수분 덩어리
수천㎞ 길이로 지구 기후 좌우
조디악 타고 도착한 해표 마을
수십㎏ 관측장비 메고 전진
“일부러 그러는 거죠?”
연구동 휴게실 화이트보드에 뾰족한 말이 적혔다. 비닐과 플라스틱을 분리해서 버리라며 “비닐 금지, No Vinyl!!”이라고 써놓아도 누군가의 투기 행위가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그 문장을 발견한 사람들 모두 조용하게 술렁였다. “혹시 외국인 과학자들이 몰라서 그런 것 아닐까요?” 내가 소곤소곤 말하자 카밀라 언니는 “글쎄…” 하고 말을 흐렸다. 하기는 영어로도 쓰여 있으니까. 화이트보드 앞을 지날 때마다 나는 우리 중 누군가가 분을 참지 못해 씩씩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 모이는 곳이 으레 그렇듯 남극에서도 선의와 우정, 친절 외에 크고 작은 긴장과 불쾌감들이 지나가곤 했다. 격무에 시달리던 엘(L) 박사가 “해야 할 작업도 많고 작가님 적응도 도와야 하고…” 푸념했을 때 나 역시 나도 모르게 “아, 이제부터 저 독립하겠습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하고 정색하게 됐다.
높은 사람들과 펭귄
“작가님은 이미 잘하고 계세요. 독립해도 될 정도로요.”
잠시 일었던 긴장은 엘 박사의 말에 누그러졌고 우리는 다시 본업으로 돌아가 회의를 마쳤다. 하루 뒤인 목요일은 우리 팀의 디데이였다. 해표 마을 근처인 케이지엘(KGL)1까지 관측을 나가기 때문이었다. 남극 식물들이 어떤 분포로 살고 있는지, 광합성은 잘하고 있는지, 건강은 어떤지 등을 드론에 장착한 초분광 센서를 통해 알아보는 작업이었다. 도시락을 챙겨 종일 기지 밖에 머무는 일이라 기대와 걱정을 동시에 하고 있었다. 걱정은 다른 게 아니라 화장실이었다. 나는 그날 커피는 물론 물도 먹지 않기로 다짐했다. 자연 화장실을 사용하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그런 기억을 얻는 게 또 뭐 그리 특별한 무용담도 아니었으므로 가능하면 피하고 싶었다.
오전에는 우주관측동으로 나가 미니팜(MINI-PAM) 설치를 도왔다. 앞으로 4주 동안 15분 간격으로 이끼들의 광합성량을 관측해줄 장치였다. 다들 배낭을 챙겨 모였고 혼자 가볍게 가는 게 민망해 엘 박사에게 해머를 달라고 하자 “그러세요” 하는 쿨한 반응과 함께 묵직한 무게가 옮겨왔다. 생각보다 무거웠지만 도로 물릴 수는 없었다. 다들 피로가 쌓여 가는 게 눈에 보였으니까. 엠(M)은 들어온 지 일주일이 넘었건만 펭귄마을에도 못 가본 신세였다. 사람들을 보면 “펭귄 귀엽던가요?” 하고 씁쓸하게 물었다. 여기가 남극인데 말이다.
언젠가 국적을 밝힐 수는 없는 유명인사가 기지를 방문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는 너무도 지위가 높은 사람이라 남극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도 그에 대한 경호와 의전은 달라지지 않았는데 문제는 그가 너무 바빠 몇 시간밖에 머물 수 없다는 데 있었다. 그는 킹조지섬에 도착할 때부터 펭귄을 찾기 시작해 기지에서의 이런저런 행사들을 몰아치기 식으로 마친 뒤 펭귄마을로 곧장 출발했다고 한다. 제아무리 유명인사라도 누가 업고 가지 않는 한 자기 발로 자갈길을 한 시간은 걸어야 하는 길, 그렇게 펭귄을 향한 열망으로 측근들의 보호를 받으며 행진하던 그는 ‘ASPA(남극특별보호구역) 171’이라는 표지판과 몇 마리의 귀여운 펭귄들이 보이자 그 앞에서 사진을 찍고는 정작 그 안으로는 발도 들여놓지 않은 채 돌아섰다고 한다.
그런데 며칠 지나지 않아 또 다른 국적의 고위 인사가 기지를 방문했고 도착하자마자 다급한 목소리로 펭귄은 어디 있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 경험담을 들려준 박사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대체 펭귄이 뭐길래!” 하고 소리쳤다. 우리는 깔깔깔깔 웃으며 세종기지에서 펭귄 좀 사육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농담했다. 물론 그렇게 펭귄들을 데려올 생각도 힘도 권리도 없지만.
‘대기의 강’이 화나지 않기를
관측 장소에 도착해 귀가 떨어질 듯 차가운 남극풍을 맞으며 물음표처럼 생긴 쇠말뚝을 해머로 박고 관측 장비를 설치했다. 내가 하는 일은 단순노동에서 조금 더 나아가 미니팜 화면의 파값을 읽는 것으로 바뀌었다. 내가 숫자를 부르면 엘과 엠이 센서를 어느 식물에 설치할지 결정했다. 몇 시간 동안의 작업이 끝나고 발갛게 언 얼굴로 돌아가는데 해안가에 흰 유빙들이 몰려와 있었다.
“우리 사진 찍어요!” 내가 다들 서보라고 했다.
“저는 사진 찍는 거 싫어해요.”
피로 때문인지 은은한 슬픔을 얼굴에 담은 엠이 답했다.
“아, 찍어. 안 그래도 왜 이렇게 사진에 펭귄이 없냐고 지인들이 그런다며!”
나는 그 순간만은 등짝을 찰싹 때리는 이모가 된 심정으로 엠을 유빙 쪽으로 몰았다. 그래도 셔터를 누를 때만은 엠도 환하게 웃었다. 돌아와 조금 쉬다가 저녁을 먹으러 갔는데 기상대원이 달려와 창문을 가리켰다.
“저게 뭐죠?”
한번도 본 적 없는 모양의 대형 구름이 떠 있었고 모두 우르르 몰려와 사진을 찍었다.
“렌즈운입니다. 아주 드물게 관측되는 구름인데 남극에서는 이따금 나타나요!”
우리는 창문에 서서 남극 하늘에 떠 있는 거대한 아이스크림 같은, 혹은 흰 우주선 같은 구름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아이들처럼 다들 들떴다.
밤에는 어제 다 못한 세미나가 다시 열렸다. 준비 때문에 차례를 미룬 포르투갈팀의 과학자 이리나는 누구보다 정성 들인 자료를 통해 세종기지에서 실시하고 있는 연구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이리나의 목표는 아열대 지방에서 남극까지 이어져 있는 ‘대기의 강’(Atmospheric River)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측정하는 것이었다. 나는 대기의 강이라는 말 자체에 매혹되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중위도 지역에서 주로 형성되는 대기의 강은 수분과 열을 품은 채 수천㎞ 길이로 흐르지만 그 폭은 수백㎞에 불과한 좁고 긴 형태였다. ‘강’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어마어마한 양의 수분을 이동시켜 지구 기후 시스템을 좌우하는데 최근 온난화로 인한 기후 변화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많은 과학자들이 이 현상에 주목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연구의 가장 기초가 라디오존데(Radiosonde)라고 하는 대형 기상관측 풍선을 띄워 대기 상황을 매일 살피는 것이었다. 대기의 강은 지구의 물 순환을 일으키는 중요한 존재이지만 남극에 극도로 따뜻한 날씨를 몰고 와 빙붕(남극 대륙을 뒤덮은 얼음이 빙하를 타고 내려와 바다 위로 퍼지며 평평하게 얼어붙은 것)을 약화시킬 수 있는 위험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화가 난 여신처럼 거칠게 모든 것을 앗아갈 수도 있는 것이다.
그제야 나는 이리나 팀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침마다 대기관측동으로 출근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드라이랩에서 작업을 하고 있으면 눈과 비에 완전히 젖어 두 뺨과 코끝이 발갛게 된 채 “흐, 하, 후, 이런, 제길” 하면서 꽁꽁 얼어 뛰어들어오는 이유를.
발표를 함께 한 포르투갈팀의 또 다른 과학자 클라우디우는 ‘한글 러버’답게 한글을 병기한 피피티(PPT) 자료를 준비했다. 어제 회식 자리에서 클라우디우가 수첩을 가지고 와 사인을 받아 간 기억이 났다. 그때도 당연히 한글로 몇 자 적어달라고 했다. 나는 약간 장난기가 돌아 사인과 덕담을 적은 뒤에 “헬륨가스는 조금만!” 하고 적었다. 풍선용 헬륨가스를 마시고 마치 외계인처럼 변한 목소리로 장난을 치기도 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구름이라는 이름을 가진 구름씨(클라우디우)는 자기 이름에 걸맞게 남극의 구름을 세심하게 관측하고 있었다. 라디오존데에 센서를 달아 남극 구름에 포함된 ‘과냉각 물방울’도 측정하는데, 영하의 온도에서도 물방울이 얼어붙지 않고 과냉각된 채로 존재하는 건 얼음핵(ice nucleus)의 양이 적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영하 40도 이하에서는 얼음핵 없이도 자연적으로 얼음이 형성된다고 했다. 구름이 얼어붙을 수 있다니 한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세미나 마지막쯤에는 벡터가 발표자로 나섰다. 벡터는 과학 분야에서 신사업 아이템을 찾아 창업을 돕고 투자자를 연결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많은 기관들에서 연구 과제를 기초로 창업을 유도하고 있었다. 벡터는 극지 연구자들도 자신들의 연구를 ‘산업적’으로 이용하는 데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다른 기관보다 창업률이 낮다는 분석 결과는, 하지만 적어도 내게는 미덥게 느껴졌다. 구름 결정 하나하나, 낫깃털이끼의 포자 하나하나, 체임버에 포집된 이산화탄소 하나하나가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한 세계가 있는 법이니까. 그렇다고 벡터와 같은 지향을 가진 사람들에게 마냥 반대하는 것은 아니었다. 노동, 일자리와 연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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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머프 마을의 대피소
다음날 아침, 우리는 계획한 대로 재빠르게 짐을 쌌다. 셰프가 만들어준 도시락과 더불어 컵라면을 준비하고 온수는 정수기에서 받아 전기포트로 한번 더 끓여서 보온병에 넣었다. 7개의 봉지에 컵라면과 분말커피, 이온음료, 간식 등을 분배했는데, 한국 면세점에서 사온 내 초콜릿바가 드디어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준비를 다 하고 구명복까지 갈아입고 선착장에 모인 것이 8시 반, 무거운 관측장비들은 크레인으로 조디악에 실었다. 하지만 해표마을에 도착하면 결국 우리가 직접 들어야 할 것들이었다. 날은 흐렸고 파도도 높은 편이었다. 두 다리로 힘을 꽉 주었지만 놀이기구를 탄 것처럼 쿵쿵 몸이 보트에 부딪혔다. 혹시 고래를 볼 수 있을까? 대원들 모두 기대했지만 나타나지 않았고 20분쯤 달려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했다.
해안가에서 구명복을 벗고 파도에 휩쓸려가지 않게 지대가 높은 곳에 돌을 얹어두었다. 그리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때만 해도 우리에게는 힘이라는 게 남아 있었다. 수십㎏의 등짐을 지고 얼마나 오래 걸어야 하는지 누구도 자세히 얘기해주지 않았으니까. 다만 이 모든 험로를 예상하고 있는 엘 박사만이 약간의 긴장감으로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첫 목적지는 해표마을 대피소였다. 나는 말로만 듣던 대피소를 직접 보게 된다는 데 기대를 품었다. 교육 받을 때 혹시라도 낙오하면 얼마간의 음식과 식수가 상비되어 있는 대피소에서 대기하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20분쯤 걸리는 거리였지만 가는 길은 생각보다 험했다. 중간에 얼음이 녹아 꽤 빠른 유속으로 흘러가는 하천을 만나기도 했다. 대체 얼마나 많은 얼음이 어디에서 녹아 이 정도의 물길을 만드는지 믿을 수가 없었다. 드론 작업을 담당하는 원격탐사팀 이외에 다른 대원들도 조력자로 함께했지만 촬영장비는 너무 무거웠다. 가장 무거운 건 드론 자체가 아니라 드론을 보호하기 위한 케이스라고 했다.
“저… 케이스 빼고 드론만 가져올 수는 없었나요?”
크기는 작지만 내게는 꽤 무거운 짐을 들고 가며 나는 물었다.
“작가님, 장비 가격이… 그럴 수 없는 가격입니다.”
제이(J) 대원이 답했다. 나는 얼마냐고 다시 물었고 가격을 듣고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드디어 도착한 해표마을 대피소는 마치 스머프 마을의 버섯집처럼 귀엽고 앙증맞은 인상이었다. 무엇보다 아주 제대로 지은 듯 보였다. 답답하지 않게 창문이 나 있고 바람에 날려가지 않게 루프로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내부 천장과 벽에는 계란판처럼 생긴 단열재가 시공되어 있었다. 그리고 야영에 필요한 거의 모든 것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테이블, 의자, 담요, 초코바(!), 초코파이, 구급상자, 생수, 휴지와 버너, 부탄가스, 삽, 간이침상…. 이런 비품 역시 기지에서 조디악을 타고 누군가의 손에 들려 여기까지 왔을 것이다.
대피소를 둘러보고 나갔더니 해표마을이라는 이름답게 해표들이 여기저기 누워 우리를 응시하고 있었다. 서로 붙어 있는 걸 좋아하는지 한데 엉켜 있었는데, 놀랍게도 같은 종들도 아니었다.
“쟤는 코끼리해표, 흰색 쟤가 웨델(웨들)이에요.” 엘 박사가 설명해주었다.
코끼리해표는 덩치가 커서 그런지 하품이나 하며 무신경했지만 웨들해표는 근심스러운 할아버지 같은 인상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눈썹과 턱 부근이 은빛 털이라 더 그렇게 느껴졌을지도 몰랐다. 우리는 다시 짐을 들고 유독 평화로워 보이는 펭귄과 물개와 해표들을 지나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나중에는 헉헉거리는 숨소리 이외에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이윽고 얕은 산등성이가 나오고 우리는 마지막 힘을 짜내 그곳을 넘었다. 눈 덮인 산비탈과 함께 작고 고요한 호수와 황금빛 이끼숲이 나타났다.
김금희│소설가 단편집 ‘너무 한낮의 연애’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 장편소설 ‘경애의 마음’ ‘복자에게’, 에세이 ‘사랑 밖의 모든 말들’ ‘식물적 낙관’ 등을 썼다. 작고 단순하고 환해지기 위해 늘 분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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