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명이 넘는 연명 상소 ‘만인소’… 조선 ‘공론 정치’를 복원하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1792년 음력 윤4월 하순, 영남 남인으로 일컬어지는 경상도 유생 수십여명이 가족과 주위의 걱정과 우려를 뒤로한 채 목숨을 걸고 한양으로 올라갔다.
정조에 대한 기호 노론 세력의 압력과 오만불손을 규탄하고 바로잡기 위한 1만명이 넘는 연명 상소, 이른바 '만인소'를 위한 행보였다.
이들은 상소는 물론 연명한 1만여명 유생의 신분과 이름, 수결을 옮겨 적는 일을 이틀 동한 진행한 끝에 겨우 하루 전날 밤 상소문을 완성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영남 선비들, 정조를 울리다―1792년 만인소운동/ 이상호/ 푸른역사/ 1만6500원
1792년 음력 윤4월 하순, 영남 남인으로 일컬어지는 경상도 유생 수십여명이 가족과 주위의 걱정과 우려를 뒤로한 채 목숨을 걸고 한양으로 올라갔다. 정조에 대한 기호 노론 세력의 압력과 오만불손을 규탄하고 바로잡기 위한 1만명이 넘는 연명 상소, 이른바 ‘만인소’를 위한 행보였다.
파장을 우려한 성균관 유생 대표들이 사전 열람 및 허가인 ‘근실’을 해주지 않으면서 만인소 전달은 한동안 지연됐지만, 결국 이날 오후 늦게 돈화문이 열렸다. 영남 유생들은 궁 안으로 들어가 정조에게 인사를 한 뒤, 유생 우두머리인 소두 이우가 상소문을 읽기 시작했다.
“발을 싸매고 조령을 넘어 피를 쏟는 마음으로 상소를 올립니다. …” 이우의 상소 낭독이 모두 끝났지만, 한동안 적막이 이어졌다. 노론에 막혀 있던 정조가 의리를 내세운 영남 유생들의 상소에 조용히 울고 있었다.
“정조는 상소를 듣던 그 자세 그대로 미동도 없었다. 고개를 들어 용안을 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무언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보좌에 앉은 왕의 입이 열릴 줄 몰랐기 때문이다. 류이좌는 고개를 들지 못한 채 곁눈질로 그 답답한 상황의 이유를 알아보려 했다. 그 순간 그는 깜짝 놀랐다. ‘눈물’이었다. 용안 위로 촛농을 닮은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는 게 아닌가.”
책은 영남 유생 류이좌가 기록한 것으로 추정되는 ‘천휘록’의 ‘임자소청일록’ 기록과 시선을 따라 1792년 조선의 첫 만인소 운동을 꼼꼼하게 복원했다. 운동이 일어난 배경, 영남 유림의 상경 과정, 소두의 임명이나 상소문 작성 등 실제 상소 운동, 상소의 처리 등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조선은 공론정치를 지향했다. 1565년 백인소를 시작으로 관료를 넘어 재야 유생들까지 상소 운동이 이어졌다. 만인소 운동도 1792년 이후 1823년 서얼 만인소, 1881년 척사 만인소 등으로 이어졌다. 저자는 상소 운동은 현대적 민주주의 제도가 없던 조선 시대에 유학의 권위를 빌려 구체적인 정책 변화를 촉구했던 일종의 시민운동이었다며 근현대 시대 의병운동과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고 분석했다.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그만하십시오, 딸과 3살 차이밖에 안납니다”…공군서 또 성폭력 의혹
- “효림아, 집 줄테니까 힘들면 이혼해”…김수미 며느리 사랑 ‘먹먹’
- “북한과 전쟁 나면 참전하겠습니까?”…국민 대답은? [수민이가 궁금해요]
- 박지윤 최동석 향한 이혼변호사의 일침…"정신 차리세요"
- “이 나이에 부끄럽지만” 중년 배우, 언론에 편지…내용 보니 ‘뭉클’
- “송지은이 간병인이냐”…박위 동생 “형수가 ○○해줬다” 축사에 갑론을박
- “식대 8만원이래서 축의금 10만원 냈는데 뭐가 잘못됐나요?” [일상톡톡 플러스]
- “홍기야, 제발 가만 있어”…성매매 의혹 최민환 옹호에 팬들 ‘원성’
- 사랑 나눈 후 바로 이불 빨래…여친 결벽증 때문에 고민이라는 남성의 사연
- "오피스 남편이 어때서"…男동료와 술·영화 즐긴 아내 '당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