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 논란’도 ‘젠더폭력’도 아닌, ‘심신미약’[젠더살롱]
지난달 9일, 창원지법 진주지원에서는 ‘진주 편의점 숏컷 여성 폭행 사건’의 가해자에 대한 선고 공판이 있었다. 이 사건은 2023년 11월 4일, 경남 진주시 한 편의점에서 20대 남성이 종업원인 20대 여성과 이를 말린 50대 남성을 마구잡이로 폭행한 사건이다. 가해자는 20대 여성의 짧은 머리가 ‘페미니스트’인 증거이며 ‘페미니스트는 좀 맞아야’ 하기에 때렸다고 진술했다.
나는 작년 이 지면에 이 사건은 ‘페미 논란’이 아니라 ‘젠더폭력’이라고 썼다. 그런데 판사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이 사건 담당 판사(형사3단독 김도형)는 가해자의 범행 동기, 폭행 정도, 범행 방식이 그가 ‘심신미약’ 상태였다는 것을 입증한다고 보아 검사가 구형한 5년보다 2년 짧은 3년을 선고했다. 한 여성을 헤어스타일에 기반해 ‘페미니스트’라고 주장하면서 그런 이유로 폭행을 가한 가해자를 ‘사물을 변별할 능력이나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미약한, 책임능력이 떨어지는’ 이로 보아 처벌을 감경한 것이다. 아마도 판사는 이런 동기로 그만큼 난동을 부리고 청력이 영구히 손상될 정도로 사람을 폭행한 가해자를 이해하기 어려웠나보다. 이해한다. 나도 이런 인간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범죄자가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사람 눈으로 보면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렇다고 범죄자에 대한 처벌을 언제나 감경하는가?
사건이 발생한 이후의 상황도 답답하기는 매한가지다. 피해자들은 수사기관으로부터 피해자 지원에 대한 어떤 안내도 받지 못 했고, 언론보도를 보고 연락한 진주성폭력피해상담소로부터 상담이며 의료 지원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를 알게 된 진주시는 진주성폭력피해상담소에 의료비 지원은 안 된다고 통보했다. 상담소는 현행 '여성폭력방지법'에 의거해 피해자 의료비를 지출했지만 '여성폭력방지법'은 이런 사건을 ‘여성폭력’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페미’라며 맞았는데 ‘여성폭력’ 피해자가 아니고 그저 운이 나쁘거나 재수 없다고 치라는 이 사회는 대체 어떤 사회인가? 여성에 대한 폭력을 용인하는 문화, 관계, 관행, 법제도야말로 가해자를 끊임없이 양산하는 가해의 매트릭스라 할 만하다.
여성폭력 규제 못 하는 '여성폭력방지법'?
그런데 법이 없다면 만들면 되지만 법이 있는데 피해를 인정받지 못 하다니? 도대체 어떻게 된 법이길래 이 모양인지 한 번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다.
정식 명칭은 '여성폭력방지기본법'인 이 법의 출발은 2017년 7월 '젠더폭력방지기본법 제정 및 국가행동계획 수립 · 이행' 계획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6, 17년 그 뜨거웠던 겨울 이후 들어선 문재인 정부가 선정한 ‘국정운영 100대 과제’에 실질적 성평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젠더폭력방지법'(가칭)은 바로 실질적 성평등을 위한 하나의 방안이었던 것이다.
이는 한국 여성운동계의 오랜 숙원이기도 했다. 한국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이 법으로 규제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이후다. 1980년대 말 한국 사회 민주화와 글로벌 탈냉전으로 시민운동과 여성운동이 성장하면서 다양한 폭력의 피해자들이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피해자들의 용기 있는 증언, 운동가들의 헌신과 열정, 시민들의 지지와 합의가 결합하여 성희롱, 성폭력, 가정폭력, 성매매를 규정, 규제하는 각각의 법률 제정으로 이어졌다.
문제는 각각의 법률로 현실에서 일어나는 다양하고도 복합적인 폭력을 제대로 규제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피해자의 절대다수가 여성인 이런 폭력은 복합적이고 연속적이라는 특징이 있다. 예컨대 가정폭력은 구타에 성폭행을 동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성희롱과 성폭력 피해를 연속적으로 경험하는 경우도 흔하다. 게다가 이 법률들은 스토킹, 교제살인, 디지털 성폭력에 대해서는 별 규정이 없었다. '젠더폭력방지법'은 개별 폭력 사안들의 기반인 공통의 젠더권력관계를 문제 삼으면서 사안들을 포괄하고자 한 시도였던 것이다. 2018년 봇물처럼 터져 나온 미투 선언은 이 법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케 했다.
그러나 ‘젠더폭력’은 한국의 국회에서는 낯설고 어려운 말이었던 것 같다. 2018년 법제사법위원회 회의록은 이 용어에 대해 어떤 논의들이 오갔는지를 기록했다. 젠더를 ‘여성과 남성’으로 이해(?)한 법제사법위원회 위원들은 굳이 남성 피해자까지 보호할 필요가 없다며 '젠더폭력방지법' 대신 '여성폭력방지법'이라는 용어를 택했다. 대부분 남성 의원들이었다. 그리하여 국회를 통과한 '여성폭력방지법'에서 ‘여성폭력’ 정의는 다음과 같이 정리되었다.
제3조 1항. ‘여성폭력’이란 성별에 기반한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 신체적ㆍ정신적 안녕과 안전할 수 있는 권리 등을 침해하는 행위로서 관계 법률에서 정하는 바에 따른 가정폭력, 성폭력, 성매매, 성희롱, 지속적 괴롭힘 행위와 그밖에 친밀한 관계에 의한 폭력, 정보통신망을 이용한 폭력 등을 말한다.
'여성폭력방지법'의 여성폭력 정의
이에 따를 때 ‘진주 편의점 숏컷 여성 폭행 사건’은 ‘여성폭력’ 사건이기에 충분하다. 이 사건은 “성별에 기반한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 신체적ㆍ정신적 안녕과 안전할 수 있는 권리 등을 침해하는 행위”의 전형 아닌가? 그런데 왜 아니라는 걸까? 이제까지 각각의 법률들로 사건을 처리해 온 관성이 너무도 강하다는 게 그 첫 번째 이유다. 이 정의의 뒷부분인 “관계 법률에서 정하는 바에 따른”에 따라 기존 법률들의 정의를 적용하는 데 급급할 뿐이다. 따라서 기존 법률에는 없는 ‘페미니스트라고 폭행한 폭력’은 이 법의 적용을 받지 못 한 것이다.
‘심신미약자’의 권력
두 번째 이유는, 이게 더 중요한 이유인데, 한국 사회는 “성별에 기반한 폭력”이 무슨 말인지 잘 모른다. 혹은 모르는 척하거나. 이 말의 의미는 이렇다. 사회적으로 부여하는 남성성과 여성성 간 위계가 있고, 이를 만들고 유지하는 온갖 제도, 문화, 관행으로 개인 여성들은 대부분 여성이라는 이유 말고는 달리 이유를 찾을 수 없는 차별을 당하며 (차별이란 이유가 없는 데 이유를 붙여서 부정의하게 대하는 것이다), 여성에 대한 폭력은 성차별의 결과이자 이를 다시 재생산하게 된다. 유엔을 비롯한 국제인권기구들이 1960년대부터 발전시켜온 ‘젠더에 기반한 폭력(Gender-based Violence)’, 줄여서 ‘젠더폭력’의 의미다.
머리카락이 짧다고 사람을 때려 귀를 멀게 하고 말리는 사람까지 폭행하고도 ‘심신미약’을 이유로 감경받을 수 있는 ‘권력’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진주 편의점 숏컷 여성 폭행 사건’ 담당 판사는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사람을 폭행하고 다니는 남성이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권력자’라 할 만하다. 판사가 대리하는 법제도가 이렇게 그를 버젓이 ‘보호’해 주지 않는가? 가해자의 성별을 바꿔보면 답은 바로 나온다. 어떤 여성이 헤어스타일을 이유로 남성을 때려 귀를 멀게 했다면, 과연 ‘심신미약’을 이유로 감경받을 수 있을까?
남성 피해자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남아나 십대 남성, 남성 동성애자, 그 외 다양한 경우에 사회적으로 부여된 지배적 남성성에 미달하는 이들로 여겨지는 남성들이 젠더관계의 약자로서 폭력의 대상이 되는 상황을 포괄하는 '젠더폭력방지법'을 만들고자 한 것은 여성들이었다.
최근 우리는 잇따른 교제 폭력 및 살인 사건과 제2의 N번방 사건, BBC 다큐멘터리를 통한 ‘버닝썬 사건’의 복기까지, 도처에 만연한 젠더폭력으로부터 눈을 돌릴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을 지루하게 보내고 있다. 과연 아무 공통점이 없는, 다 다른 사건들일까? 예외적 ‘심신미약자’들이 저지른 일들일까? 가해자를 끊임없이 양산하는 가해의 매트릭스를 해체하는 질문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문화를 읽습니다. 김신현경 서울여대 교양대학 교수와 서한영교 작가가 번갈아 글을 씁니다.
김신현경 서울여대 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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