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엘 나달, 당신의 루틴과 우리의 심장은 함께 뛰었다

조태성 2024. 5. 25. 0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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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
디미트리스 지갈라타스 '인간은 의례를 갈망한다'
인간은 왜 엄격한 반복동작에 심취하는가 파고든
그리스 출신 인류학자의 리추얼, 루틴 탐험기
"초사회적 존재인 인간은 남 따라 하기의 천재
정형화된 의례를 통해 사회 그 자체를 만든다"
지난 9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마스터스 대회에 출전한 라파엘 나달이 서브를 넣고 있다. 로마 = AP 뉴시스

이건 뭐 너무 유별난 게 많아서 '대체 몇 가지인가'라는 논란까지 따라 붙는 수준이다. 올해를 끝으로 은퇴를 예고한 테니스 스타 라파엘 나달, 그리고 그의 독특한 루틴 이야기다.

경기 시작 전 반드시 차가운 얼음물로 샤워한다. 경기장 입장 때는 오른손엔 라켓, 왼손엔 가방을 들고 오른발을 먼저 경기장에 디딘다. 벤치에 가방을 놓은 뒤 대회 주최 측이 발급해 준 신분증에서 얼굴이 나온 쪽을 위로 향하게 둔다. 재킷 등 겉옷은 관중을 바라보며 여러 번 점프하면서 벗는다. 양말은 양쪽 높이가 똑같도록 조정한다.

서브를 정하는 동전 던지기 땐 점프를 반복하고 그 뒤엔 자기 쪽으로 지그재그 전력 질주한 뒤 베이스라인을 발로 쓸어낸다. 서브 전엔 반바지를, 이어서 왼쪽 어깨와 오른쪽 어깨를, 그리고 코와 왼쪽 귀와 코를 거쳐 오른쪽 귀를 쓸어서 정리한다. 물을 마실 때도 한 병에서 한 모금, 또 다른 한 병에서 한 모금 마시고 이 두 병의 상표가 똑같은 방향을 바라보도록 세심하게 줄 맞춰 세운다. 수건을 쓸 때는, 아 이 정도만 하자. 어느 정도 알려진 루틴만 해도 이렇다.


복잡하고 가혹한 의례, 인간의 본능이다

나달은 모든 대회, 모든 게임, 모든 포인트마다 이 행동을 무한 반복한다. 호주 오픈 대회가 서브 시간 제한을 엄격히 적용하자, 나달이 시간이 부족하다며 심판에게 강하게 항의하는 장면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나달은 "미신이 아니라 나 스스로 게임에 임하는 방법, 내 주변을 정리하는 방법"이라고 항변했다지만, 왜 이렇게까지 할까.

그리스정교회 문화에서 자란 인류학자 디미트리스 지갈라타스. 그는 극한 의례의 사회적 의미를 탐구했다. ©Werner Bischof_Magnum Photos

'인간은 의례를 갈망한다'를 쓴 인류학자 디미트리스 지갈라타스도 그런 게 궁금했다. 그리스 출신으로 어릴 적부터 그리스정교의 각종 엄격한 종교 의식을 보고 자란 그는, 커서는 세계 각지의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혹한 의례 현장을 찾아다녔다. 불 위를 걷기, 칼로 만든 사다리 올라가기, 독한 개미 100마리에게 한 쪽 손 왕창 물리기, 수십 수백 곳에다 잔혹한 피어싱 하기 등등이다.

연구의 결론은 "극한 의례의 사회적 효과"다. 의례는 몰입, 황홀경, 소속감을 낳았다. 이런 얘기가 아주 새로운 건 아닌데, 이 책의 차별성은 "심리학적 설문조사, 생물학적 측정, 신경과학적 데이터"가 충분하다는 데 있다. '추론'을 넘어선 '과학적 데이터'다.


나와 함께한다는 '과잉모방'에 열광하는 인간

가령 '거울뉴런'을 통한 인간의 모방 성향에 대한 얘기는 많다. 그런데 인간은 모방을 그냥 하는 게 아니라 아주 격렬하게 한다는 점이 밝혀졌다. 유인원과 아이들 간 비교 실험을 해봤더니, 유인원도 다른 유인원의 행동을 곧잘 따라 하지만 불필요하다 싶으면 알아서 생략해 버렸다. 반면, 불필요한 동작까지 고스란히 지겹도록 반복하는 건 오히려 인간 쪽이었다.

저자는 이걸 '표현형 대조전략'이라 부른다. 인간은 그야말로 초사회적인 존재로 진화했기에 나와 함께 한다는 걸 드러내는 작은 시그널에도 아주 적극적으로 반응한다는 것이다. 작게는 군대 제식 훈련이 있다. 발 맞춰 함께 걷는 것만으로도 전우애는 치솟는다.

행진 중인 대전 국군간호사관생도들. 옷을 갖춰 입고 함께 걷는다는 것만으로도 전우애는 크게 성장한다. 뉴스1

좀 더 극적인 예로는 말레이시아의 힌두교 축제 타이푸삼에선 온몸을 뚫어대는 카바디 의식이 있다. 축제 뒤 기부 의사를 물었더니 단순 참가자는 통계적으로 자기 소유의 26%를 내놨다. 저강도 의례, 그러니까 집단기도 정도에만 참여한 이들은 40%를, 카바디에 참여한 이들은 무려 75%를 내놨다.


별스럽지 않은 일상적 루틴의 힘은 강하다

저자는 이를 '러너스 하이'에 빗댄다. '극단적 의례'를 통해 우리는 "우리를 우리 자신보다 거대할 뿐 아니라 사회적 세계 전체보다 큰 무언가의 일부로 만들어 시공을 초월하는 동포의 사회로 우리를 연결한다." 말하자면 '루틴스 하이'다.

스페인, 불가리아 등에 남아 있는 '불 건너가기'도 마찬가지다. 참가자들은 하나같이 "우리의 심장이 하나가 되었다"고 말한다. 실제 측정했더니 불 위를 걷는 사람과 지켜보는 사람의 심장 박동은 하나가 됐다. 지켜보던 이들이 어찌나 몰입했던지 행사 전 수십 명을 인터뷰한 저자를 행사 뒤에 기억하는 사람이 드물 정도였다.

인간은 의례를 갈망한다·디미트리스 지갈라타스 지음·김미선 옮김·민음사 발행·408쪽·2만 원

현대 사회도 다를 바 없다. 저자는 덴마크에 취직한 뒤 가장 충격적인 일로 "먹고 노는 문화"를 꼽았다. 커피 타임, 케이크 타임, 야유회 지원 등 덴마크 회사들은 하나같이 직원들이 함께 어울려 먹고 노는 일에 진심이었다. 이쯤이면 눈치 챘을 것이다. 그건 일종의 제식훈련이었던 셈이다.

나달은 26일부터 열리는 프랑스 오픈에, 아마 마지막이 될 출전을 한다. 우리가 나달에게 열광한 건 코트를 커버하는 빠른 다리, 예술적 톱스핀을 뽑아내는 굵은 팔뚝 때문만은 아니다. 복잡다단한 루틴들을 하나씩 수행해 나가는 그의 뒷모습이 우리의 몰입을 불러냈고, 그로 인해 우리의 심장이 그의 심장과 함께 뛰었기 때문일 것이다.

조태성 선임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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