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분단에 ‘호열자’까지 덮쳤다… 봉쇄된 눈물의 38선
[전봉관의 해방 거리를 걷다]
해방 조선을 멈춰세운 1946년 콜레라 팬데믹
미군정이 공포한 ‘군정법령 제1호’(1945.9.24)는 ‘위생국 설치에 관한 건’, 총독부 경무국 위생과를 폐지하고 ‘위생국’을 설치한다는 것이었다. ‘법령 제2호’인 ‘패전국 정부의 재산권 행사 금지’보다 하루 앞선 조치였다. 이를 통해 미군정은 주민의 생명과 건강에 직결되는 위생과 방역이 군정의 최우선 과제임을 천명했다.
비슷한 시기, 인도에서 시작된 콜레라는 중국 남부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콜레라는 근육 경련이 일어나고 쉴 새 없이 설사를 하는 수인성(水因性) 전염병이다. 일본에서는 ‘고레라(虎列剌·호열랄)’라고 음차해서 표기했는데, 19세기 그 괴질(怪疾)과 함께 병명이 조선으로 전파되면서 조선에서는 잘 쓰지 않는 ‘랄(剌)’자를, 그와 비슷하게 생긴 ‘자(刺)’자로 오독‧오기하면서 “호랑이가 살점을 뜯어 베는 것같이 아픈 병”이라는 뜻의 ‘호열자(虎列刺)’로 부르게 되었다.
남방과 중국에서 한국과 일본으로 전재민(戰災民), 패잔병 등 대규모 인구 이동이 예정된 가운데, 중국에서 2만여 명, 인도에서 25만여 명이 콜레라로 사망했다. 1945년 11월, 도쿄의 ‘미국 태평양육군 총사령부(GHQ) 군의감실’은 아시아 태평양 지역 예하 부대에 콜레라 확산에 대비할 것을 지시했다. 이듬해 4월, 주한미군사령부는 예하 각 전술 부대와 군정 부대에 “중국발 입항 선박들에 대한 방역을 강화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이후 중국발 귀국선을 타고 우여곡절 끝에 조국에 도착한 귀환 동포들은 부산항과 인천항에서 방역을 위해 며칠씩 격리되기 일쑤였다.
위태롭게 유지되던 방역망은 경계령이 하달된 지 불과 한 달 만에 허망하게 뚫렸다. ‘콜레라 1번 환자’는 상하이발 송환선 ‘윌리엄 왓슨호’를 타고 와 부산항에 내린 황해도 옹진 출신 23세 귀환 동포 김모씨였다. 왓슨호에는 설사 환자가 다수 있었고, 항해 도중 사망한 사람도 있었다. 원칙적으로는 입항 선박에 방역관이 승선해 역학조사를 실시한 후 음성임을 확인하고 승객의 하선을 승인해야 했다. 하지만 부산항 검역관으로 부임한 젊은 미군 중위는 한국인 방역 의사의 반대에도, 간단한 대변 검사조차 실시하지 않고 ‘무증상자’의 하선을 허용했다.
5월 10일 부산항에 도착해서 검역 장교의 ‘실책’으로 15일 보균자 상태로 상륙 허가된 ‘1번 환자’는 경부선 열차를 타고 이튿날 서울역에 도착했다. 역 앞 ‘삼흥여관’에서 1박한 후, 개성과 황해도 연안을 거쳐 18일 아산 백석포에 도착, 1박했다. 19일 백석포에서 100여 명의 승무원과 승객이 탑승한 인천행 정기선 ‘수원환’에 탑승했는데, 선상에서 구토와 설사가 심해 동승자들의 간호를 받았다. 인천 지역 감염병 격리 병원 덕생원에 입원한 ‘1번 환자’는 20일 오후 사망했다(’중외신문’ 1946.5.25). 보균자의 하선을 허용한 것은 경험 없는 미군 검역 장교의 명백한 실책이었다. 하지만 미군정 보건후생국(’위생국’의 후신)은 이후 ‘1번 환자’의 동선을 정확히 파악해 냈다.
5월 15일 ‘콜레라 1번 환자’가 발생한 후, 같은 달에만 부산·목포·서울·대전 등지에서 97명이 발병했고, 그중 38명이 사망했다. 6월,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지면서 수해와 함께, 수인성 전염병인 콜레라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38선 이북 지역에서도 감염자가 발생했다. 소련군 사령부와 북조선인민위원회는 ‘콜레라 비상 방역령’을 발령하고 국경을 봉쇄했다. 겨울이 되면서 위세가 수그러질 때까지, 7개월 동안 남한에서만 1만5644명의 환자가 발생했고 그중 1만181명이 사망했다. 콜레라는 수액만 충분히 공급해 주면 생명을 위협하는 치명적 질병이 아니었지만, 미국에서 구호 물자로 들여오는 수액의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사망률이 65%에 달했다.
치료제인 수액의 공급이 부족해 사망률이 급등하자, 미군정 보건후생국은 방역과 예방에 총력을 기울였다. 도 단위로 환자와 사망자 수를 집계해 언론을 통해 공개했고, 전국적으로 무료 콜레라 예방접종을 실시했다. 수액이 부족했던 것과는 달리, 백신 공급은 비교적 여유가 있었다. 서울에는 해방 전부터 운영되던 백신 생산 시설이 있었다. 한반도에서 유일한 콜레라 백신 생산 시설이었던 삼청동 ‘조선 방역 연구소’ 40여 직원은 하루 10만명분의 백신 제조량을 100만명분으로 늘리기 위해 불면불휴(不眠不休)로 분투했다(‘동아일보’ 1946.5.24.). 백신 접종을 독려하기 위해 ‘호열자 예방주사증’ 소지자에 한해 기차와 전차의 탑승과 50인 이상을 수용하는 극장, 유흥업소, 음식점, 공회당 등의 출입을 허용했다.
방역과 위생 선전 활동도 강화되었다. 한건숙 보건위생국장은 라디오방송에 출연해 “호열자는 오염된 물 또는 파리를 매개로 음식을 통해 전염되므로 냉수, 야채, 과일 등 음식에 주의하고, 파리가 끓지 않게 ‘변소’를 청결히 하며, 눈에 띄는 대로 파리를 잡으라”고 호소했다. 그해 여름에는 냉면을 비롯한 ‘날 음식’의 판매와 하천에서의 세탁이 금지되었다.
괴질로 목숨을 잃는 것도 비극이었지만, 그보다 더 큰 비극은 봉쇄와 이동 제한이 초래했다. 일본군 무장해제를 명분으로 미소 간에 설정된 38선은 ‘국경선’이 아니었다. 미소 양군은 법령으로 38선 통행을 금지하지는 않았지만, 실질적으로는 38선 월경을 막았다. 진주 직후부터 미군정청은 “38선 이북으로의 여행은 자유이지만, 절대 삼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모순된 입장을 견지했다. 제한적으로나마 허용되던 ‘38선 월경’은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무기 휴회되고, 남북 양측에서 단독 정권 수립 시도가 본격화된 1946년 5월 법적으로 금지되었다. 그 명분은 ‘콜레라 방역’이었지만, 찬 바람이 불면서 콜레라의 위세가 한풀 꺾인 이후에도 ‘38선 봉쇄’는 풀리지 않았다.
해방 직후 귀국을 위해 한국인 귀향민 수만명이 모여든 두만강변 투먼(圖們)에도 어김없이 콜레라가 돌았고, 다수의 귀향민이 고향을 코앞에 두고 이역 땅에서 목숨을 잃었다. 국경이 봉쇄된 상태로 하염없이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귀향민들은 인근 한인 촌락으로 분산 배치되었다. 때마침 중국의 토지개혁이 실시되었고, 국경 봉쇄가 풀리기를 기다리던 상당수 귀향민이 토지를 분배받고 중국에 정착했다.
홍수와 식량난에 콜레라까지 창궐하면서 민심은 극도로 흉흉해졌다. 방역을 위해 경찰력을 동원한 강압적 봉쇄와 이동 제한은 미군정에 대한 민심 이반을 초래했다. 좌익 세력들은 그 틈을 교묘히 파고들어 민중을 선동했다. 콜레라의 피해가 유난히 컸던 대구에서는 콜레라 방역이 한창이던 10월 1일 경찰과 시위대 사이에 대규모 유혈 충돌이 일어나 수백명이 목숨을 잃었다. 좌익의 선동과 성난 민심은 호열자보다 무서웠다.
<참고 문헌>
김춘선, ‘중국 연변지역 전염병 확산과 한인의 미귀환’, 한국근현대사연구 제43집, 2007
신동원, ‘호열자, 조선을 습격하다’, 역사비평사, 2004
임종명, ‘1946년 부산·경남 지역의 콜레라 발병·만연과 아시아’, 역사와 경계 제126집, 2023
정병준, ‘1945~48년 미·소의 38선 정책과 남북갈등의 기원’, 중소연구 제27-4호, 2003
정영진, ‘폭풍의 10월’, 한길사, 1990
허병식, ‘감염병의 주권과 재영토화: 1946년 콜레라의 발생이 불러온 풍경들’, 한국학연구 제67집,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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