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득 경영' 빛난 노량해전, 일본의 대륙 진출 300년 늦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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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한의 ‘충무공 경영학’ ⑥ 〈끝〉
정유재란 때 칠천량에서 대패한 원균의 조선 수군은 궤멸 상태였다. 1597년 8월 3일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용 교지를 받은 이순신은 13척의 배를 추려 명량에서 133척의 일본 수군과 맞붙어 대승한다. 그리고 일본 수군의 보복을 피해 몇 번의 피난을 한 후 목포 앞 고하도와 완도 옆 고금도에서 수군 재건을 시도했다. 명나라 진린의 수군도 힘을 합치면서 드디어 조명(조선·명나라) 수군 연합군이 탄생했다.
왜군 최소 1만 5000명 살상 전과 올려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정유재란 최후의 전투인 노량해전은 이순신의 집념이 아니었다면 절대 벌어질 수 없는 해전이었다. 이순신은 명나라와 일본이 강화교섭을 준비하는 와중에도 계속 임전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참전한 3국이 모두 전쟁을 계속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조선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전 국토의 유린으로 식량 부족이 심각했고, 임란 다음 해인 1593년 봄부터 시작된 전염병은 1595년 가을까지 계속됐다. 전투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이순신은 다시는 일본군이 조선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눌러놓으려 했다.
1598년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이 조선까지 알려지고 패색이 짙어진 왜군은 철수를 계획하기 시작했다. 왜군은 앞서 명량해전에서 대패한 후 육전에서도 연이은 패배로 고전을 면치 못했고, 도요토미가 병사하자 왜군 지도부는 철군을 서둘렀다. 이 소식을 접한 이순신은 장수들을 불러 모은 다음 적의 퇴로를 끊어 지구전을 펼침과 동시에 수륙연합군으로 합동 공격을 진행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이순신과 진린의 조명연합 수군은 고금도로 물러나지 않고 묘도에 머물면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퇴로를 막아서기 시작했다.
이순신은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과 함께 1598년 9월 고금도(古今島) 수군 진영을 떠나 노량 근해에 이르러 명나라 육군장 유정(劉綎)과 수륙합동작전을 펴 왜교(倭橋)에 주둔하고 있는 왜군 고니시의 부대를 섬멸하고자 했다. 사실 고니시는 수륙 양면으로 위협을 받게 되자 진린에게 뇌물을 바치고, 퇴로를 열어줄 것을 호소하며 예교성에서 퇴로를 찾고 있었다. 이에 진린은 고니시가 마지막으로 요청한 통신선 1척을 빠져나가게 하고, 이순신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백성들이 울어 운구행렬 갈 수 없었다”
“이 몸이 죽을지라도 하늘에 어떤 서운함도 없다.”
마지막 날이 다가왔다. 11월 18일 밤 이순신의 예측대로 사천의 시마즈 요시히로, 남해의 소 요시토시, 부산의 데라자와 마사시게 등이 500여 척을 끌고 노량으로 향했다.
이항복의 『고 통제사 이공유사』에서는 “이날 밤 삼경(밤 12시)에 공이 배 위에 꿇어앉아 하늘에 말하기를 ‘오늘 진실로 죽을 결심을 했습니다. 원컨대 하늘이시여. 반드시 이 적들을 다 죽여주시옵소서’라고 했다”고 나온다. 그러고는 휘하 장졸들을 격려하며 전투태세에 들어갔다.(지도)
19일 새벽, 공이 한창 독전하다가 문득 지나가는 철환에 맞았다. 공이 말하기를 “지금 싸움이 한창 급하구나. 내가 죽었다는 말을 절대로 하지 마라(戰方急 愼勿言我死)”고 했다. 공은 말을 마치고 세상을 떠났다.
그때 공의 맏아들 회와 조카 완은 활을 쥐고 곁에 있었는데 울음을 그치고 서로에게 말하기를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한없이 슬프구나 한없이 슬프구나. 그러나 만약 돌아가셨다고 알리면 온 군대가 놀라 동요할 것이고 저 적들도 그 틈을 탈 것이다. 그러면 시신 또한 온전히 돌려보낼 수 없게 된다. 싸움이 끝날 때까지 참아야 한다”고 했다(이충무공행록).
선조수정실록 32권, 선조 31년(1598) 11월 1일자 기사를 보자.
“순신의 형의 아들인 이완(李莞)이 그의 죽음을 숨기고 순신의 명령으로 더욱 급하게 싸움을 독려하니, 군중에서는 알지 못하였다. (중략) 진린이 순신에게 사람을 보내 자기를 구해 준 것을 사례(謝禮)하다 비로소 그의 죽음을 듣고는 놀라 의자에서 떨어져 가슴을 치며 크게 통곡하였고, 우리 군사와 중국 군사들이 순신의 죽음을 듣고는 병영마다 통곡하였다. 그의 운구 행렬이 이르는 곳마다 백성들이 모두 제사를 지내고 수레를 붙잡고 울어 수레가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이순신은 이 전투에서 이미 죽기를 각오하고 한 명의 왜군도 살려 보내지 않겠다고 결의를 다진 것으로 보인다. 숱한 부하 장졸과 아무 죄 없는 백성을 유린하고도 뻔뻔스럽게 강화 조약을 내거는 왜군의 몰염치함을 징벌하지 않고는 편히 잠들 수 없을 것이라는 간절함이 이순신의 심중에 깊이 각인된 것이다. 이순신은 노량 바다에 적을 모두 파묻어버리기로 작정했다.
그 장렬한 충성심과 용맹함으로 왜군은 지리멸렬 패퇴하고 조선을 굳게 지키는 장쾌한 대승을 거뒀다. 그 위대한 전과를 미국의 해군 역사가 조지 해거먼은 이렇게 말했다.
“이순신으로 인해 일본의 동아시아 정복이 300년이나 미뤄졌다.”
일본에선 이 마지막 노량해전의 패퇴로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이 무너지고 도쿠가와 이에야스 막부로 정권 교체가 일어났다. 명나라는 전쟁 후 급격히 국기가 무너지고 기울면서 스스로 야만족이라 부르던 청나라 여진족에게 나라를 넘겨주고 멸망했다. 그러나 조선에선 지도부의 아무런 변화도 끌어내지 못했다. 다만, 서애 류성룡이 남긴 『징비록』이 있어 못난 조선 왕가와 지도층의 민낯, 그리고 전후의 수습 과정을 살필 수 있다.
박종평은 『난중일기』와 윤휴의 『통제사 이충무공 유사』를 이렇게 옮겼다.
“예교에서 싸움이 급해지자 공은 뱃머리로 나와 싸움을 독려했는데, 장수와 군사들이 겨드랑이를 붙잡으며 힘써 간청했으나 듣지 않고 그대로 말하기를, ‘적을 죽이고 죽을 수 있다면 그 어떤 서운함도 없다. 적이 물러가면 내가 죽을지라도 너희는 편안할 것이다.(殺賊死無憾 賊退我死 爾輩安矣)’”
그는 순국하면서까지 한 치의 흐트러짐과 사욕이 없었고 목숨으로 국가의 생존을 지켜냈다. 더불어 일본이 대륙세력이 되고자 시도했던 간 큰 야욕이 함께 무너져내렸다.
이 전투를 강행함으로써 이순신은 미래의 화근을 뿌리뽑고자 했다. 이후 일본은 300년간 대륙 진출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으니 이순신의 거시 전략 경영은 우리 역사상 가장 빛나는 업적으로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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