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민의 문화이면] 어떤 업무 루틴
단순 반복적인 책편집 과정
일하는 기계 같은 느낌 많아
교정볼 때 글씨 '확' 키우거나
종이·화면 바꿔보며 안간힘
오늘도 반복업무 못피하지만
극복해가는 자신에게 위로를
일하는 기계가 되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아마 많이들 그리 느끼지 않을까. 일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반복이다. 아무리 창의적인 일이라도 업무 프로세스에는 반복적 요소가 있기 마련이다. 원고를 교정보고 책으로 내는 편집일도 매번 콘텐츠의 내용은 달라지지만 반복적인 단순노동도 꽤 많다고 할 수 있다. 컴퓨터에서 1차 리딩을 하고, 종이로 뽑아서 n차 리딩을 하고, 색인 작업을 하고, 제목과 카피를 뽑고, 언론사에 보낼 보도자료를 쓴다.
지난 10여 년을 돌아보면 평균적으로 연 20권 이상을 작업해온 것 같다. 한 달에 2권꼴이다. 어떤 책이든 한 달 만에 뚝딱 나오는 경우는 없다. 최소 3개월에서 길게는 몇 년도 걸리는 게 편집 작업이다. 그러니 한 달에 2종을 내려면 동시에 서너 종 이상을 붙들고 진행한다고 봐야 한다. 마치 수영장 저쪽 끝으로 가서 터치를 하면 곧바로 턴을 해서 이쪽 끝으로 돌아오고 다시 턴을 해서 저쪽 끝으로 헤엄쳐 가는 것과 비슷하다.
때론 지루하고 숨이 막힌다. 오탈자를 찾아내기 위해 읽었던 글을 두 번, 세 번 읽을 때가 특히 그렇다. 이 일을 그만둘 수 없는 건 그때마다 숨은 오타들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 보물 같은 발견의 기쁨을 포기할 수 없으니 특별한 루틴들이 생겨난다. 나 같은 경우는 교정지를 보다가 지겨워지면 같은 내용을 화면에 띄워놓은 pdf를 통해서 본다. 종이에 익숙해진 눈은 이것을 신선하게 받아들인다. 뇌의 착각인 것 같다. 아무튼 몇 페이지가 쉽게 넘어간다. 그런 후 다시 종이로 돌아간다. 위기가 한 번씩 찾아올 때마다 눈을 화면으로 옮겨 잠시 인터페이스를 바꿔준 다음 다시 종이로 돌아오길 되풀이한다. 아주 사소한 마술이다.
또 있다. 이는 주로 초교 단계에 컴퓨터로 교정을 볼 때인데, 졸음이 오거나 엉덩이가 들썩들썩해지면 글자 크기를 28포인트나 40포인트 정도로 확 키워서 시각적인 충격을 주는 것이다. 그럴 때도 뇌는 찬물에 세수하는 것 같은 효과를 얻는다. 오탈자도 잘 보이고 결과적으로는 텍스트를 더 느리게 읽는 것이니까 실수할 염려도 줄어든다. 숨어 있던 오류가 여기서 발견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나 같은 경우는 서체와 글자 간격에도 민감한 편이다. 필자들은 신명조, 함초롬바탕, 견고딕 등 다양한 서체와 포인트로 된 원고를 보내온다. 내가 원고를 받자마자 하는 일은 문서에 적용된 온갖 스타일을 지우는 일이다. 그런 후 서체는 바탕체로 바꾸고 자간을 -8, 장평을 95로 맞춘다. 그래야 몰입하기가 가장 쉽다.
사실 이런 것들을 '루틴'이라는 말로 부르는 게 합당할까 싶다. 지루함에서 놓여나려는 '몸부림'에 더 가깝지 않을까. 온갖 우아한 말로 포장되지만 책 만드는 일도 그 내부는 눈물 나는 노동의 현장이다. 페이지가 1000쪽을 넘어가는 벽돌책들은 더욱 그 눈물이 진하다. 여기서는 루틴을 넘어 '꼼수'로까지 잔머리가 진화한다.
가령 1장부터 10장으로 이뤄진 책이라면 5장부터 읽기 시작한다. 그러면 1000m 경주를 500m 앞에서 출발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결승점에 골인한 다음에 다시 돌아와서 500m 더 뛰는 것은 1m에서 시작해 1000m를 완주하는 것보다 훨씬 심리적 압박을 줄여준다. 이른바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꿔주는 마법이지만 초보자는 금물이다.
나 같은 경우 종수 압박이 심하다. 잘 팔리지 않는 인문학 서적을 주로 내다보니 책 종수를 늘려서 매출을 맞춰야 하는 현실을 부정하기 어렵다. 남들이 1권 낼 때 2권을 내는 생태계이다 보니 뇌를 속여야 하는 일이 또 발생한다.
가령 6월까지 꼭 내야 하는 책이 있을 경우 그 원고를 제쳐두고 별로 급하지는 않지만 빨리 읽고 싶은 다른 원고를 그 앞에 끼워넣는다. 6월 마감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지켜야 하기 때문에 반강제적으로 같은 시간에 두 배의 효율을 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몸은 두 배로 망가지겠지만.
[강성민 글항아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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