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비도 훔쳐본 낙원 … 몰랐던 조선이 보인다
당대 문인 풍류 즐긴 누각까지
공간이 품은 조선의 철학·이념
검증된 사료와 비화로 풀어내
천민 출신 시인 유희경은 문화사랑방 침류대(枕流臺)를 만들어 운영했다. 창덕궁 서쪽 계곡에 위치한 이곳은 선조에서 인조에 이르는 당대 학자와 관료들이 찾아와 시를 나누고 풍류를 즐긴 공간이었다. 조선 중기에 영의정을 지낸 이원익을 비롯해 장유, 김상헌, 이수광, 신흠 등이 드나들었다.
이수광은 "넓은 바위 주위에는 복숭아나무 여러 그루가 둘러 있고 시냇물 양쪽으로는 꽃비가 흩뿌리니 비단 물결이 춤추는 것 같다. 옛날 무릉도원이 이보다 더 좋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쓰기도 했다. 상류 사회에서도 널리 알려진 곳이라 인목대비가 궁궐 너머로 침류대를 거니는 유희경을 봤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신분의 한계에도 유희경이 '인싸'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은 상장례(喪葬禮) 전문가였기 때문이다. "허준의 스승인 어의 양예수는 뒷문으로 나가고 유희경은 앞문으로 들어온다"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의사보다도 장례를 치르기 위한 유희경이 더 대접을 받았다는 말이다. 부안 기생 매창의 남자로 '부안삼절'로 불렸던 유희경은 매창에게 지어 바친 시로도 이름을 날렸다. 유희경은 백대붕과 함께 천민, 평민이 함께 활동하는 문인 모임 풍월향도를 만들어 전성기를 누리기도 했다. 17세기 조선에 신분의 한계를 벗어나 교류하는 문인들이 있었던 셈이다.
역사를 소재로 대중과 소통해온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의 신작이 출간됐다. 1394년 이래 서울은 이 땅의 수백 년 역사의 산증인이다. 조선 시대사를 전공한 저자는 서울에서 조선의 숨결이 묻어 있는 공간을 찾아 떠났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연려실기술' 등 검증된 사료에 바탕을 두고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조선을 상징하는 공간인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등의 궁과 왕릉, 조선이 수도가 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한강, 정조의 숨결이 남아 있는 배다리 등 서울의 공간에 숨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51편의 짤막한 이야기는 조선이라는 나라의 건국 철학부터 이 도시의 형성 과정까지 알려준다.
첫 장은 개성에서 천도한 수도 한양의 탄생 과정을 알려준다. 1394년 한양 천도가 이뤄졌고, 1년 뒤 열 달에 걸친 궁궐 공사를 마쳤다. 경복궁 전체 규모는 755칸 정도였는데 1868년 흥선대원군이 중건한 규모가 7200여 칸임을 고려하면 건설 당시 궁궐 규모는 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성리학을 이념 삼아 건국한 왕조인 만큼 왕의 공간부터 검소와 절약을 담았던 것이다.
서울에는 많은 왕의 흔적이 남아 있다. 연산군은 창덕궁에서 즉위식을 올린 최초의 왕이었다. 왕과 신하의 공부 자리인 경연을 폐지하고 왕을 비판하는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도 탄압한 그는 사치와 쾌락에 빠져 살았다. '연산군일기'에는 경복궁 경회루에서 연산군이 자주 잔치를 베푼 기록이 남아 있다. "누각 아래에는 붉은 비단 장막을 치고서 흥청·운평(기녀) 3000여인을 모아 노니 생황과 노랫소리가 비등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심지어 군인을 뽑아서 서호에 있는 배 수십 척을 끌어 경회지에 띄웠을 정도다.
청와대는 많은 흥망성쇠를 겪은 공간이지만, 그 역사도 깊다. 청와대는 고려 숙종대에 건설된 남경의 궁궐터였다. 궁궐 공사는 숙종 9년인 1104년에 완성됐지만 천도는 단행되지 못했다. 숙종 승하 후 예종과 인종은 수시로 남경에 행차해 연회와 불사를 진행했다. 하지만 1128년 이곳에 화재가 일어나 이듬해 서경에 대화궁을 크게 지었고, 13세기 이후엔 몽골의 침략으로 기능이 점차 소멸됐다.
부활은 한양 천도 이후 왕실의 휴식 공간인 후원으로 활용되면서 이뤄졌다. 정자가 조성됐고 과거시험이 치러지기도 했다. 역대 공신들이 북단에서 회맹식을 행한 북단도 이곳에 위치했다. 부침을 겪던 이곳은 일제강점기에는 총독 관저가 세워지며 다시 쓰였고 해방 이후에는 미군정 사령관 존 하지가 거주했다. 1948년 이승만 대통령이 집무실로 쓰면서 '경무대'는 다시 행정 중심지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김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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