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몬 드 보부아르의 사랑, 사르트르로만 기억될 순 없다 [책과 세상]
미국 작가와 17년간 나눈 서한집 ‘연애편지’
‘계약 결혼’ 이미지 걷어낸 자리 남은 사랑들
페미니즘의 고전 ‘제2의 성’을 쓴 프랑스의 작가이자 철학자 시몬 드 보부아르의 사랑이라고 하면 떠올릴 인물은 단연 장 폴 사르트르다. 서로 다른 파트너를 둬도 상관하지 않는 계약 결혼을 50년간 유지한 두 사람의 관계는 당대를 넘어 오늘도, 또 내일도 회자할 세기의 사건이었다.
늘 나란히 엮이는 사르트르의 이름, 먼저 세상을 떠난 사르트르의 옆에 묻히고 싶어 했다는 사실은 보부아르에게 있었던 다른 사랑을 엷게 만들고는 한다. 그러나 다른 사랑은 분명히 존재했다. 사르트르에 앞서 깊이 사랑했던, 젊은 나이에 사망한 친구 자자(엘리자베스 라쿠앵)와 보부아르가 끼고 다닌 반지를 선물한 미국 작가 넬슨 올그런. 지적 동반자였던 사르트르 못지않게 그의 사상에 영향을 미친 이들을 소거한 채로의 보부아르 읽기는 오독이다.
보부아르가 친구에게 영감받은 소설 ‘둘도 없는 사이’
“오늘 밤, 내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은 네가 죽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살아있기 때문일까? 이 이야기를 너에게 바치고 싶지만 나는 네가 더 이상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
소설 ‘둘도 없는 사이’ 첫 장에서 보부아르는 ‘자자에게’라는 머리말을 통해 이렇게 읊조린다. “이것은 너의 실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에게서 영감을 받아쓴 이야기일 뿐”이라면서 “너는 앙드레가 아니었고, 나는 나를 대신해 말하고 있는 실비가 아니었잖아”라고 덧붙이는 그의 말이 무색하게 소설의 주인공 ‘실비’는 보부아르를, 그의 친구 ‘앙드레’는 자자를 닮았다.
현실의 두 사람처럼 실비와 앙드레 역시 아홉 살에 학교에서 만난다. “내가 아는 아이들은 모두 나를 지겹게 했다”고 여기던 실비는 재능 있고 자신감 넘치는 앙드레에게 매료되고, 그의 첫사랑에 질투를 느끼기도 하며 둘도 없는 사이가 된다. 실비는 앙드레가 “훗날 책 속에 인생이 적힐 비범한 재능”을 가졌다고 확신하지만, 그는 결혼해서 집안을 돌보는 사회적 여성성에서 자유롭지 않다. 스물한 살의 앙드레는 갑작스럽게 죽고, 새하얀 꽃으로 덮인 그의 무덤 앞에서 실비는 “어렴풋이, 앙드레가 죽은 건 이 순백색에 의해 질식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이해했다.”
생전 공개되지 않은 원고…70년 만에 빛 보다
자자도 스물한 살에 바이러스 뇌염으로 죽었다. 소설은 두 사람의 일화를 여럿 따왔다. 친척 집에 가기 싫어 실수인 척 도끼로 제 발을 내리친 과감한 앙드레는 “여행을 떠나기가 싫어서 발을 도끼로 찍어 버렸단다”라고 보부아르에게 편지로 고백한 자자의 모습 그대로다. 보부아르가 “우리는 우리를 기다리던 역겨운 운명에 맞서 함께 싸웠다. 오랫동안 그의 죽음으로 나는 자유의 대가를 치렀다고 믿었다”(‘정숙한 처녀의 회고록’)고 썼을 정도로 자자는 보부아르의 생에 큰 부분이었다.
이런 죄책감을 갖고 여러 차례 글로 자자의 삶을 되살리고자 애썼던 보부아르는 1954년에 쓴 ‘둘도 없는 사이’를 생전엔 공개하지 않았다. 사르트르가 이 원고를 읽고 “지나치게 개인적”이라고 평가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70년이 지나 비로소 세상의 빛을 본 ‘둘도 없는 사이’의 영문판 서문을 쓴 소설가 마거릿 애트우드는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사르트르씨, 21세기에 우리가 당신께 답변을 드려요. 이건 심각한 문제랍니다.”
“나의 남편”에게 보낸 보부아르의 ‘연애편지’
“안녕이든 아듀든 저는 시카고에서 보낸 이틀을 잊지 않겠어요. 제 말은 당신을 잊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1947년 2월 보부아르는 올그런에게 보내는 첫 편지의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썼다. 문장이 예언이 된 듯, 서로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던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진다. 보부아르는 올그런을 “지극히 사랑하는 나의 남편”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올그런이 선물한 반지를 두고 편지에서 “제가 당신에게 속해 있다는 은밀한 표시인 그것을 한순간도 손가락에서 빼놓지 않아요”라고 말했고, 실제로 죽을 때까지 이를 간직했다.
17년간 한 남자를 향했던 304통의 ‘연애편지’로 이뤄진 서한집은 페미니즘 철학가였던 보부아르의 모순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그러나 여성으로 기대받는 ‘나’와 원하는 대로 자유롭고자 하는 ‘나’ 사이의 여성들의 목소리를 포착한 힘이 경험에서 나왔음을 알면 보부아르의 사상은 더욱 생생해진다. 보부아르라는 철학자를 제대로 마주하자는 골치 아픈 목적이 아니더라도, 그의 소설과 편지는 자체만으로도 흥미로운 문학이다. 그렇기에 “파리의 쑥덕공론을 더 듣고 싶다면 당신 소식을 좀 보내 주세요”라고 속삭였던 보부아르에게 시간을 내줄 이유는 충분하다.
전혼잎 기자 hoiho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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