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안 역사문화 리포트] 25. 멀리 울릉도·독도가 보인다
■울릉도와 독도는 한몸처럼 엮인 공동체 섬
-세종실록지리지 등 두 섬 존재 기록
신라 장군 이사부가 정벌한 우산국이 울릉도와 독도를 포함하는 해상 왕국이 이었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날씨가 화창한 날, 울릉도에서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섬의 존재를 우산국 사람들이나 이사부가 간과했을 리 없고, 역사서에도 울릉도와 독도를 하나의 공동체 섬으로 보는 기록들이 무수히 등장하기 때문이다.
‘세종실록지리지’ 강원도 삼척도호부 울진현 기록에는 독도에 대해 관리, 통치권을 행사했음을 알게 하는 분명한 사실이 등장한다.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에서부터 울릉도 일원의 면적과 지리, 역사, 토산품 등을 적으면서 ‘우산(于山)과 무릉(武陵) 두섬이 (울진)현의 정동(正東) 해중(海中)에 있다. 두 섬이 서로 거리가 멀지 않아 날씨가 맑으면 가히 바라볼 수 있다’고 한 대목이다.
필자가 예전에 울릉도를 취재할 때 접한 울릉문화원 이우종 전 원장은 이를 두고 “두 섬은 독도와 울릉도를 지칭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며 “울릉도 주변의 죽도나 관음도 등은 날씨와 관계없이 언제나 울릉도에서 볼 수 있는 데 반해 날씨가 맑아야 볼 수 있는 섬은 독도 밖에 없다”며 “울릉도는 물론 독도까지 당시 강원도 울진현에 속해 조선시대 군·현제의 틀 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고 강조했다.
1530년에 완성된 신증동국여지승람 강원도 울진현 기록에도 ‘세 봉우리가 하늘로 곧게 솟아 있는데, 남쪽 봉우리가 약간 낮다. 날씨가 청명하면 봉 머리의 수목과 산 밑의 모래톱까지 역력히 볼 수 있다. 순풍이면 이틀에 갈 수 있다’는 기록이 등장해 울릉도에서 독도를 바라본 모습을 훨씬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세 봉우리가 등장하는데, 이는 조선 성종(1472년) 때 박종원이 삼봉도 경차관(三峯島敬差官)으로 임명됐던 것과 결부시켜 생각해 볼 수 있다. 당시 임금이 ‘우리 봉역(封域) 내에 있다’며 박종원에게 살피도록 한 삼봉도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와 있는 것처럼 세 봉우리가 솟아 울릉도에서 이틀이면 갈 수 있는 독도를 지칭한 것 이라는 주장이 가장 설득력 있다.
이처럼 조선시대 지리지들은 시대를 거듭할수록 훨씬 상세하게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기술을 하고 있는데, 이는 ‘공도정책’으로 섬을 비워 버려진 땅으로 전락시켰다는 주장이 얼마나 큰 곡해인지를 확연히 느끼게 한다.
울릉군지는 이에 대해 ‘조선이 정부 차원에서 섬에 대해 조사를 지속적으로 시행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울릉도 수토(搜討), 삼척영장 장한상도 독도 기록
독도 기록은 삼척, 울진 등지의 향토 사료에서도 확인돼 숙종 때 수토(搜討)를 위해 삼척에서 군사들을 거느리고 출항, 울릉도를 순찰했던 삼척영장 장한상은 ‘울릉도사적(鬱陵島事蹟)’의 보고 기록에서 ‘동남동 방향을 보니 멀리 울릉도 크기의 3분의 1 정도로 섬이 보인다’고 밝히면서 ‘그 거리가 300여 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적었다. 장한상이 보고 기록한 섬이 독도라는 것은 두말할 여지도 없다. 300여리는 현대식 미터법으로 계산하면 120km. 이는 실제 울릉도와 독도의 거리가 87km라는 점을 고려하면, 과학적인 측정을 하지 않고 눈으로 바라본 거리를 말한 상황에서는 비교적 정확한 거리 측정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정조 때에는 삼척부사를 지낸 윤속이 ‘울릉도 동쪽 망망대해 중에 우청도(羽淸島)라는 섬이 있는데, 이를 삼척부 관할로 삼겠다’고 조정에 상신한 내용이 삼척지역 향토사료인 김구혁의 척주선생안(1855년)에 나와 있다. 울릉도에서 고개를 돌려 망망대해 중에 섬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독도 밖에 없으니 윤속이 말한 ‘우청도’ 또한 독도를 지칭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동해안 육지에서 울릉도를 본 기록도 즐비
-삼척 소공대 등 고지대에서 울릉도 조망
육지인 동해안에서 울릉도를 바라본 기록도 전해지는 것이 참으로 많다. 요즘은 육지에서 육안으로 울릉도를 보는 것이 쉽지 않지만, 미세먼지 등 오염원이 적었던 옛적에는 청명한 날에 고갯마루 등 고지대에서 울릉도를 보는 것이 가능했다는 것을 옛 선인들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 두타산 일원에 은거하면서 민족의 대서사시인 ‘제왕운기(帝王韻紀)’를 저술한 동안거사(動安居士) 이승휴 선생은 몽골 침략 때 주민들과 함께 요전산성(蓼田山城)에 들어가 항거하면서 ‘맑은 날 울릉도를 보았다’고 동안거사집에 남겼다. 또 고려말-조선초의 문인인 운곡(耘谷) 원천석은 울진에서 삼척지역으로 넘어오면서 지현(知峴)이라는 곳에 올라 울릉도를 바라보면서 시(詩) ‘등지현망울릉(登知峴望蔚陵)’를 읊기도 했으며, 현재 삼척시 원덕읍에 있는 와현(瓦峴) 소공대(召公臺)는 고려∼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숱한 문사들이 울릉도를 바라보면서 시를 읊은 명소로 손꼽히기도 한다.
이런 지리적 근접성으로 인해 울릉도와 독도는 고지도에서 거의 예외 없이 강원도 동해안과 경북 동해안의 부속 도서 형태로 표현돼 이 지역이 역사적으로 울릉도·독도 수호의 전초기지 역할을 했다는 것을 실증하고 있다. 실례를 들면, 고려대 중앙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지도(地圖·1800년대 중엽)’ 라는 이름의 지도는 삼척부를 소개하면서 거의 같은 비율로 울릉도를 더불어 기재, 조선시대에 울릉도가 삼척의 영역에 포함됐다는 것을 명확히 설명해 준다. 또 삼척시립박물관이 보유하고 있는 울릉도 도형(圖形·조선 후기)의 경우는 울릉도·독도에 무리를 이루고 살았던 가지어(可之魚·강치)와 향나무(香板), 주토(朱土·붉은 색 황토) 등을 특산품으로 명기하면서 조정에 봉납 대상이라는 기록도 함께 명기, 울릉도에 대해 조선시대 사람들이 상세히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영남대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천하지도(18세기 중엽)도 강원도 편에 울릉도를 표기하고 있고, 서울대 규장각의 팔도지도(1767년∼1778년)와 국립중앙도서관의 해동전도(제작시기 미상)에는 삼척 동쪽바다 가까이 울릉도와 우산도(독도)를 함께 그려 넣은 점이 특징적이다.
지도상의 이 같은 기록들은 조선 세종실록에 ‘삼척부 바다 한가운데 요도(蓼島)가 있다’고 한 기사와 조선 선조때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가 남긴 아계유고(鵝溪遺稿) 울릉도설 편에 ‘가을과 겨울이 교차할 때쯤 삼척의 소공대에서 울릉도가 보인다’고 한 기록 등을 뒷받침해 주는 사료들이다. 이산해는 조선 중종∼광해군 때 문신(1539-1609년)으로, 대사간, 대사헌, 이조판서와 삼정승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한 인물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던 해에 탄핵을 받아 울진 평해에 유배돼 많은 시문을 남겼는데, 허균이 ‘그의 시는 평해에 귀양 가서 절정에 달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이산해가 가을과 겨울이 교차할 때라고 한 것은 아마도 11월 초·중순, 톡하고 건드리면 쨍하고 금이 갈 것 같은 쾌청한 늦가을 혹은 초겨울 일 것이다.
육지에서 울릉도를 보고, 울릉도에서는 독도를 볼 수 있었다는 것은 동해안과 울릉도·독도가 한몸처럼 엮여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고, 육안으로 울릉도를 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삼척, 울진, 강릉 일원이 줄곧 울릉도·독도를 잇는 통로가 된 것은 역사에서 당연한 귀결이었다. 최동열 강릉본부장
*참고= 기사에 인용(참고)된 논문과 책, 인터뷰 직함은 논문 발표와 책 발간, 인터뷰 당시의 근무처와 직책을 준용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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