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하는 사람들의 정당 [전범선의 풀무질]
전범선 | 가수·밴드 ‘양반들’ 리더
이번 총선을 계기로 확실히 드러났다. 대안 정치가 방향을 잃었다. 녹색, 정의, 여성, 노동 등 기존의 진보 어젠다는 거대 양당의 아성을 넘지 못한다. 애초 우리가 넘어야 할 근대 산업문명의 좌우, 진보/보수 이분법을 넘지 못하기 때문이다. 민주당을 가짜 진보라고 부르며 진짜 좌파를 자처하는 정당, 국민의힘을 가짜 보수라고 부르며 진짜 우파를 자처하는 정당은 절대로 1987년 체제, 6공화국을 넘지 못한다. 2027년 대선이 7공화국의 출범이 되려면 새로운 판이 필요하다.
한반도가 처한 지정학적 위기와 지구가 처한 기후생태 위기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좌우의 이분법은 중국과 미국, 남한과 북한, 동양과 서양의 이분법이기도 하다. 넘어서지 못하면 미래가 없다. 중·미가 협력하지 않으면 지구의 지속가능성도 없다. 둘이 전쟁을 하면 3차 세계대전이기 전에 2차 한국전쟁일 것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이스라엘-팔레스타인처럼 되지 않으려면 한반도는 좌우 대립을 초월해야 한다. 대안은 무엇인가?
인간의 이념 갈등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가치는 생명이다. 삶과 죽음 앞에 다른 가치는 부차적이다. 자유, 평등, 정의, 민주, 해방, 그 무엇이든 생명보다 우선시되는 순간 도그마가 된다. 생명의 논리는 이분법적이지 않다. 삶과 죽음은 하나다. 옳고 그름으로 나눠지지 않는다. 삶이 있기 때문에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기 때문에 삶이 있다. 빛과 그림자, 밝음과 어둠이 하나인 것처럼 삶과 죽음은 하나다. 그것이 역설적이며 통합적인 생명의 논리다.
그렇다면 생명을 절대가치로 여기는 정치가 가능할까? 만약 생명당이 생긴다면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다. 생명의 논리에는 선악이 없다. 피아 식별이 있을 수 없다. 모든 생명을 숭고하고 절대적인 존재로 모셔야 한다. 너무나도 아름답지만 그런 자세로는 현실 정치에서 힘을 쓰지 못한다. 무릇 정치란 적과 동지를 구별하는 것이라는 카를 슈미트의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거대 양당 정치를 끝내고, 근대 산업문명의 이분법을 넘어서려면 역설적이게도 더욱 강력한 이분법이 필요하다. 기존의 좌우, 진보/보수가 사실은 똑같은 반생명적 정치임을 밝혀야 한다.
삶과 죽음은 하나이지만 살림과 죽임은 명백히 다르다. 삶이 좋고 죽음이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모든 삶은 죽음에 빚지고 산다. 그러나 죽임에 빚질 이유는 없다. 모든 죽임은 나쁘다. 생명이라고 하는 절대가치를 해치는 짓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모든 살림은 좋다. 생명을 살리는 일은 절대선이다. 물론 살림이 불가피하게 죽임을 요할 때도 있다. 생명을 지키기 위해 폭력이 정당화될 때도 있다. 그러나 그럴 때도 폭력, 죽임은 나쁘다. 필요악이다. 비폭력, 불살생, 살림의 가치를 내세우는 정치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살림당은 분명한 피아 식별이 가능하다.
우리는 죽임의 문명에 살고 있다. 스스로 죽이고, 가족이 붕괴하고, 나라가 분열하고, 지구가 오염되고 있다. 인간의 자유이자 권리로,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지구 뭇 생명을 나누고 옮기고 죽인다. 살림을 등한시하는 문명은 지속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살림을 외주화하는 집단만이 무한성장의 신화를 쫓을 수 있다. 우리 모두의 유일한 집, 지구는 유한하다. 외부 자원을 수급할 수 없는 닫힌 체계다. 지구 살림을 집안 살림 하듯이 해야 한다. 무한정 살림살이를 늘릴 수 없다. ‘성장에서 성숙으로, 죽임에서 살림으로’가 살림당의 표어다.
시작은 자기 살림이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순서가 맞다. 나부터 살아야 남을 살린다. 자기 살림, 마을 살림, 나라 살림, 지구 살림이 다르지 않다. 나를 온전히 모시고 살리려면 공동체가 필요하다. 핵가족마저 분열된 핵개인 시대, 개인의 정신마저 분열되고 있다. 디지털 유목민에게는 씨족이나 가족보다는 취향이나 신념 중심의 부족 공동체가 적합하다. 그러한 디지털 부족들이 로컬에서 대안 공동체를 만들어야 지역 재생, 마을 살림이 된다. 국가경제는 성장률이 중요하지만 나라 살림은 국민 행복이 우선이다. 돈 버는 일보다 식구를 돌보는 일이 먼저다.
살림하는 사람들의 정당을 꿈꾼다. 개인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두고, 지역 재생과 공동체 회복, 생태 보전과 탄소중립을 제일 과제로 삼는다. ‘지구가 곧 나고 내가 곧 지구’라는 마음으로 살림을 하는 사람들이 대한민국 나라 살림도 맡아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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