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당 하루 400㎖의 물…지옥보다 더한 가자에서 아이들이 산다
폭격으로 벽이 날아간 건물에도 사람이 산다. 전쟁을 피해 간 피란처에서 다시 피란을 떠난 사람들이 포탄 탄피를 기둥 삼아 천막을 친다. 육중한 탱크가 먼지 바람을 일으키며 메마른 땅을 내달린다. 솥단지와 물통을 이고 든 아이들이 밥과 물을 찾아 먼 길을 나선다. 전쟁 230일째, 2024년 5월23일 팔레스타인 땅 가자지구에 여전히 사람이 산다.
물 기대치조차 낮은 가자 주민들
“물은 인간의 생명과 건강, 존엄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 요소다. 극단적인 응급 상황에선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물이 부족할 수 있다. 이럴 때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마실 물을 공급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마실 물이 부족하거나, 오염된 물을 마시는 것은 재난 기간은 물론 재난이 끝난 뒤에도 건강을 위협하는 가장 주된 원인이다.”
세계보건기구(WHO)는 2013년 펴낸 ‘긴급 사태 때 마실 물, 위생, 보건에 관한 자료’에서 이렇게 짚었다. WHO는 △기후 조건 △종합적인 건강 상태 △체력 등을 긴급 사태 발생지역 주민들에게 필요한 물 공급량을 결정하는 3대 요소로 규정했다. 이 세 가지 못지 않게 중요한 게 긴급 사태의 영향을 받은 주민들이 평소 필요로 하는 물 공급량에 대한 기대치다. 가난한 농촌 지역과 부유한 도시 지역 주민 간 ‘기대치’에 현격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란다. 팔레스타인 땅 가자지구 주민들은 만성적인 물 부족에 익숙하다. ‘기대치’ 역시 높지 않을 터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 얼마나 많은 물이 필요할까? WHO는 “건강 상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가장 기본적인 물 필요량 1인당 하루 50~100ℓ”라고 밝혔다. 마실 물과 취사용 물, 몸을 씻고 옷을 빨고 화장실을 사용하는 등 위생용 물을 더한 수치다. 긴급 사태 발생 지역은 어떨까? WHO는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물 필요량’(1인/1일)을 △마실 물 2.5~3ℓ △취사용 물 2~6ℓ △위생용 물 3~6ℓ로 제시했다. 한 명이 하루를 살아남는데 필요한 물이 최소한 7.5~15ℓ란 뜻이다.
“ 이스라엘군의 라파 지상군 작전 개시와 함께 가자지구 남부의 물 · 위생 · 보건 (WASH ) 상황이 더욱 악화하고 있다. 최근 가자지구 현지 조사를 실시한 결과 , 일부 피란민은 생존을 위해 필요한 물 최소 공급량의 단 3% 남짓으로 버티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 다. 깨끗한 물과 (화장실) 등 위생 시설 부족으로 만성 설사에 시달리는 5살 이하 어린이가 급속도로 늘고 있으며, 각종 수인성 질환과 간염 등 감염병도 빠르게 번지고 있다. ”
1인당 하루 물 필요량 50ℓ, 재난 지역 7.5ℓ인데…
미국 ‘국제구조위원회’(IRC)와 영국 ‘팔레스타인의료지원’(MAP)은 5월22일 낸 공동 성명에서 이렇게 밝혔다. 카린 래닝 IRC 가자지구 담당 국장은 “최근 방문한 가자지구의 한 피란민촌에선 난민 1만명에게 공급되는 물이 하루 4000ℓ에 불과했다. 난민 1인당 하루 0.4ℓ가 공급된다는 얘기”라고 전했다. WHO가 제시한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물 필요량’(1인/1일)의 2.6%~5.3%에 그치는 양이다. 래닝 국장은 이렇게 덧붙였다.
“난민 8천여명이 몰린 피란민촌도 둘러봤다. 마련된 간이 화장실이 단 12개소였다. 1개소당 사용자가 600명이 넘는다는 뜻이다. WHO가 정한 최소 기준치(20인당 1개소)의 30배가 넘는 수치다. 여성용 위생용품 부족 사태는 말할 것도 없고….”
에뎀 워소르누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OCHA) 운영국장은 5월20일(현지시각)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안전보장이사회 회의에 출석해 “5월6일을 전후로 이스라엘군이 라파에서 지상군 작전을 시작하면서 가자지구의 인도적 상황이 더욱 급박해졌다”고 말했다. 워소르누 국장이 이날 안보리 회원국에 보고한 가자지구의 최신 상황을 종합해보자.
안전 찾아 떠난 피란처조차 ‘참담’
2023년 10월7일 개전 이래 가자지구 전체 인구(약 230만~240만명)의 75%(약 170만명)가 삶의 터전을 떠나 피란민으로 떠돌고 있다. 이스라엘군이 대피 명령을 반복해 내린 탓에 이들 중 상당수는 4~5차례씩 피란처를 옮겨야 했다. 특히 이스라엘군이 라파에서 지상군 작전을 본격화하면서 지난 보름 남짓 동안 라파를 떠나 가자지구 다른 지역으로 대피한 피란민만 80만명을 넘어섰다.
한때 피란민 100만명 이상이 몰리면서 발디딜 틈도 없던 라파의 긴급 피란시설은 이제 거의 텅 빈 상태다. 피란민 대부분은 인근 칸유니스와 데이르알발라 쪽으로 피신했다. 하지만 그들이 안전을 찾아 도착한 새로운 피란처의 상황은 ‘참담한 수준’이다. 거처도, 화장실도, 급수시설도, 하수시설도 마련되지 않은 상태인 탓이다.
라파 지상전 개시로 가뜩이나 제한적이던 구호물품 공급 상황은 한층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됐다. 5월17일 현재 이집트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라파 검문소는 폐쇄된 상태로, 구호물품과 연료는 물론 사람도 통과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응급 식량과 의약품 등 구호물품 8만2천t의 발이 묶였다. 지상전 개시 이후 라파 검문소를 통해 연료 약 65만4천ℓ가 가자지구로 공급됐다. 이는 지상전 개시 이전 평균 공급량의 ‘4분의 1’ 수준이다. 이 때문에 병원과 급수시설 등지에서 필수적인 기계·설비 가동이 더욱 어려워졌다.
5월1일부터 9일까지 개방됐던 가자지구 북쪽 에레츠 검문소도 이후 차단된 상태다. 새롭게 문을 연 에레츠 서쪽 검문소를 통해 제한적이나마 구호물품 반입이 가능했지만, 이 지역 일대도 현재 대피 명령이 내려진 상태다. 에뎀 국장은 “솔직히 말하자면, 가자지구에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말로 표현할 방법이 없다. 앞서 가자지구의 상황을 두고 재난적이고, 악몽같고, 심지어 지옥같다고 표현한 바 있다. 이 모든 표현보다 지금 현지 상황은 더욱 열악해졌다”고 말했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전혀 다른 생각인 모양이다. 네타냐후 총리는 5월20일 카림 칸 국제형사재판소(ICC) 수석 검사가 전쟁범죄와 반인도적 범죄 등의 혐의로 팔레스타인 무장 정치세력 하마스 지도부 3명과 함께 자신과 요아브 갈란트 국방장관에 대한 체포영장을 청구하자, “사법체계를 우습게 만들었다”고 맹비난했다. 이어 그는 자신에 대한 체포영장 청구는 “9·11 동시 테러의 책임을 두고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과 오사마 빈라덴을 등치시킨 것과 마찬가지”라며 “그 무엇도 하마스에 맞선 이스라엘의 정당한 전쟁을 막지 못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제노사이드 조’ 바이든의 행보
“터무니 없는 짓이다.” 비슷한 시각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도 네타냐후 총리 등에 대한 체포영장 청구를 거세게 비판했다. 그는 “칸 검사가 뭐라든, 이스라엘과 하마스를 등치시킬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힌다. 미국은 안보 위협에 처한 이스라엘과 늘 함께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같은 날 저녁 백악관에서 열린 ‘유대계 미국인 문화유산의 달’ 행사에서도 비슷한 주장을 내놨다. 그러면서 “가자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집단살해’(제노사이드)가 아니다. 그런 주장은 단호히 배격한다”고 강조했다. 미국 대학가를 휩쓸고 있는 팔레스타인 연대집회에서 자신을 겨냥해 ‘제노사이드 조’라고 부르는 걸 의식한 걸까? 대체 뭘 증명하고 싶은 건가?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이 펴낸 최신 자료를 보면, 2023년 10월7일부터 2024년 5월22일까지 이스라엘군의 공격으로 가자지구 주민 3만5709명이 숨지고 7만9990명이 다쳤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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