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향수가 낳은 박근혜 팬덤, 노무현 애수가 낳은 문재인 팬덤
정치팬덤에는 대상에 대한 정서적 애착이 있어야 하고, 팬덤이 공감하는 내러티브가 있어야 한다. 아이돌 팬덤을 설명할 때 ‘한을 먹는다’는 표현을 쓰는데, 심금을 울릴만하는 스토리나 영욕의 드라마가 있어야 하는 얘기다. “자신이 팬질하는 대상이 겪는 악재를 뜻하는 ‘한 먹음’은 아이돌판에서 진정으로 강력한 힘과 끈끈한 결속력을 발휘하는 팬덤으로 거듭나기 위한 의식이나 다름없다.”(임명묵) 비유하자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수사학의 하나로 거론한 파토스가 있어야 강력한 팬덤이 형성될 수 있다. 그래야 내러티브 몰입이 이뤄진다. 몰입은 안으로 열광을 낳고, 밖으로 혐오를 낳는다.
박근혜는 양친을 모두 총탄으로 잃었다. 9살부터 27살까지 대통령의 딸로 지냈고, 어머니를 잃은 뒤에는 영부인의 역할을 대신했다. 10·26 사태 후 20년 가까이 독신으로 잊혀지내다 1997년의 외환위기 후 “(아버지가) 어떻게 일으킨 나라인데…” 하며 정치에 뛰어들었다. 보수의 영웅 박정희에 대한 향수에 고난의 인생 스토리까지 더해진 비장한 내러티브는 정치팬덤을 낳는 상징자본으로 작용했다. 박근혜는 당을 두 번이나 구해냈다. 한 번은 2004년 총선 때다. “박근혜 대표는 한나라당의 ‘구세주’나 다름이 없었다. ‘차떼기당’으로 전락한 한나라당이 2004년 4·15 총선에서 그나마 명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박 대표의 대중적 인기 덕이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2005년 조선일보 기사의 한 대목이다. 2012년 총선 때도 그는 당의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아 승리의 매직을 보여줬다.
정치 셀럽 박근혜의 대중적 인기는 어느 신문기사 제목처럼 ‘아버지 후광, 알맹이 없는 연예인식 인기’라고 평가절하되기도 했다. 허나 그것은 정치팬덤이었다. 그는 ‘근혜님’, ‘박짱’으로 불리곤 했다. 애정어린 호칭이다. 2004년 3월 개설된 팬 커뮤니티 ‘박사모’는 6만 명의 회원(2011년)을 두었고, 게시글에는 ‘가슴 떨린다’ ‘그립다’ 등 숭배와 친밀감의 애정 표출로 넘쳐난다. 경쟁세력에 대해서는 ‘철면피 인간’, ‘배신자’, ‘비열한 망나니’, ‘가증스런 위선자’ 등 적개심을 드러내는 팬덤언어를 사용했다. 지금의 팬질 그대로다.
박근혜에게는 팬덤 감수성이 있었다. “미니홈피 개설 초기에 미공개 가족사진을 올리고, 100만 번째 방문자와 ‘1일 데이트’를 예고해 방문자 수를 늘리는 등 만만찮은 솜씨을 보여왔다. 박사모는 결성 1년 만에 회원 수 4만명에 육박하는 대규모 조직으로 발전했으며, 이들은 책임당원제를 도입하는 한나라당에 집단 입당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강준만) 이렇게 구축된 팬덤의 힘은 놀라웠다. 2008년 총선, 친박 후보가 출마하지도 않은 한나라당 텃밭에서 당 사무총장이던 친이 의원이 ‘평소 박근혜를 괴롭혔다’는 이유로 허무하게 떨어졌다. 또 당의 공천을 못받은 친박 후보들, 즉 친박연대 소속 14명과 친박 무소속 12명이 ‘친박 돌풍’으로 당선됐다.
박근혜 팬덤은 박정희에 대한 향수, 보수정서에 맞는 페르소나와 행태, 혼자 남겨진 대통령의 딸이나 커터칼 피습과 같은 감성 요인, 보수 미디어의 ‘팬덤적’ 지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지만 그는 집권 후 팬덤정치를 통치전략으로 활용했다. 박근혜는 대선에서 과반 득표로 승리했고, 의회에서도 다수의석을 확보하고 있었다. 취임 초를 제외하곤 2년차 중반까지 50%를 넘는 지지율을 누렸다. 종편의 출범으로 언론지형도 더 유리해졌다. 비록 집권 초의 국정원 댓글사건, 세월호 참사 등 불안요인이 없진 않았지만 집권기반은 안정적이었다. 세월호 참사 직후인 2014년 6월 지방선거에서도 사실상 승리했다. 광역단체장 선거에서는 야당에게 1석 뒤졌지만 기초단체장 선거에서는 117석 대 80석으로 크게 앞섰다.
그럼에도 그는 팬덤정치를 가동했다. 정당과 의회 때문이었다. 유승민 원내대표와 갈등을 빚은 탓에 당을, 국회선진화법에 따른 입법교착(gridlock) 탓에 국회를 걸림돌로 여겼다. 이명박 정부 시절의 이른바 동물 국회에 대한 반성으로 만들어진 국회선진화법으로 박근혜 정부는 발이 묶였다. 일방적인 강행 처리가 어려운 터에 여당도 거수기 역할을 거부했다. 결국 박대통령은 정당과 의회를 우회·압박하는 팬덤정치에 나섰다. 팬덤을 동원해 유승민을 원내대표직에서 몰아냈고, 국회개혁청원에 서명하는 등 ‘대중 속으로 들어갔고’(going public), 2012년 총선에서는 진박 감별 논란을 빚으면서까지 공천을 전횡했다. 콘크리트 지지층으로 불리던 강한 팬덤을 믿고 펼친 포퓰리즘 정치였다.
문재인 팬덤은 노무현 애수에서 비롯됐다. 그에 대한 보수정부·언론의 핍박과 죽음으로 인해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지못미’ 정서, 애잔한 내러티브가 생겨났다. 민주화 특히 정권교체 이후 보수 언론의 힘이 강해지면서 정치의 미디어화가 진행됐고, 종편의 등장으로 더 깊어졌다. 이런 열세 속에서 기성 미디어를 대체하는 에스엔에스(SNS), 소셜 미디어가 대항언론으로 등장했다. “이처럼 스마트폰과 팟캐스트, 에스엔에스 플랫폼 기술의 발달과 기술 간 상호작용이 대안적 혹은 대항적 공론장을 만듦으로써 ‘플랫폼 정치’ 혹은 ‘네트워크 정치’가 보수화된 매스미디어 중심의 미디어 정치와 경쟁할 수 있게 되었다.”(백욱인) 이 때 등장한 나꼼수가 판을 바꿨다. 나꼼수는 정치의 개인화, 사사화, 감정화 흐름을 강화했다. 이준형에 따르면, 보수세력의 권력남용과 비리에 대한 나꼼수의 찰진 조롱과 질펀한 풍자가 대중의 새로운 정치참여를 이끌어 내고, 노무현 죽음 이후 진보 진영에 퍼져있는 애도의 감정을 결집시켰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문재인이고, 그의 팬덤이다.
문팬덤의 기세는 맹렬했다. “투철한 팬심과 비상한 사명감으로 무장한 모바일 전사들이 민주당의 당원 게시판과 온라인 커뮤니티를 휩쓸며 당의 여론을 움직였다. 2012년 문재인의 민주당 대선 후보 선출, 새정치민주연합 시절의 친문-비문 계파 갈등, 문재인과 박지원이 당권을 두고 격돌한 2015년 전당대회와 2016년 분당에 이르는 중대 고비마다 이들이 펼친 활약은 눈부셨다. 온라인 좌표 찍기, 게시판 댓글 도배, 특정인을 겨냥한 문자 폭탄이 무기였다.”(이세영) 문자폭탄에 대해 문재인은 “적어도 정치인이라면 그런 문자를 받을 줄도 알아야 한다”거나 “경쟁을 흥미롭게 해주는 양념같은 것”이라며 감쌌다. 집권 후 문재인은 촛불집회에서 제기되고, 대통령 탄핵으로 표출된 적폐청산의 요청에 적극 호응했다. 여소야대인 걸 감안하면 이 선택은 탄핵연합을 이어가는 연합정치가 아니라 팬덤정치를 통한 정면돌파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문팬덤은 전위대를 자처했고, 내편에겐 수호천사 네편에겐 기동타격대로 행동했다.
문팬덤은 박팬덤에서 더 진화했다. ‘우리 이니(문재인의 애칭) 하고 싶은 거 다해’라는 말이나 이니 굿즈 등에서 알 수 있듯 감성 브랜드화했다. 자발적 모금으로 문재인 생일 축하 광고를 2018년엔 뉴욕의 타임스퀘어에, 2019년에는 서울역 옥외전광판에, 그리고 2020년에는 광주의 지하철역 광고판에 내걸었다. “당신을 지켜드리기로 맹세합니다. 우리를 믿으세요.” “그대와 함께 만드는 미래에 단 한 번도 등 돌린 적 없음을.”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일세.” 그들은 한겨레·경향신문, 오마이뉴스를 ‘한경오’로 호칭하며 언론적폐로 규정해 집단공격하기도 했다.한겨레21 문재인 표지사진과 영부인 호칭을 문제삼아 그 신문에 대한 절독·불매 운동도 전개했다. 추앙과 적대의 배타적 팬덤이었다.
팬덤정치는 2022년 대선과 2024년 총선을 거치면서 이제 절정에 달한 듯하다. 그 실상과 향후 전망이 궁금하다.
이철희 | 방송에서 정치평론을 하다 정치에 나서 20대 국회의원, 문재인 정부 마지막 정무수석을 지냈다. 2020년 ‘대통령 탄핵 결정요인 분석: 노무현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 탄핵 과정 비교’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인자를 만든 참모들’ ‘정치가 내 삶을 바꿀 수 있을까’ 등의 책을 냈고, ‘진보는 어떻게 다수파가 되는가’ 등의 역서가 있다. 우리 정치가 어쩌다 이렇게 나빠졌는지, 무엇이 문제인지, 어떻게 해야 나아질 것인지 등에 대해 터놓고 얘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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