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조선 실경화의 정수, “꽃 보듯 편하게 보세요”
‘조선은 실경화가 없는 나라’ 인식에 의문
‘옛 그림으로 본’ 연작 시리즈의 완결편
옛 그림으로 본 조선 1: 금강
옛 그림으로 본 조선 2: 강원
옛 그림으로 본 조선 3: 경기, 충청, 전라, 경상
최열 지음 l 혜화1117 l 전권 12만원
“궁금한 것은 못 참아요. 가장 존경하는 학자가 성호 이익 선생인데요. 그분이 ‘치의자득’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치의’(致疑), 의문을 갖고 ‘자득’(自得), 스스로 깨우치라는 말입니다. 제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조선은 실경화가 없는 나라’라는 인식이 팽배했어요. 조선은 중국 그림을 베끼는 수준이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관념 산수’라는 말도 썼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진짜 그런가?’라는 질문을 갖고 ‘실경화’를 찾아다녔죠. 이제 저는 ‘조선은 실경화의 천국’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1993년 한국근대미술사학회를 창립하고 2005년 인물미술사학회를 창립한 미술사학자 최열(68). 그는 한국 근대미술사 연구에서 독보적인 인물이다. ‘한국근대사회미술론’ ‘한국근대미술의 역사’ 등 미술사 관련 여러 저서를 쓴 그가 최근 자신의 30년 미술사 연구 경험을 총망라해 ‘옛 그림으로 본조선’이란 책을 내놨다. 이는 ‘옛 그림으로 본 서울’(2020), ‘옛 그림으로 본 제주’(2021)에 이은 ‘옛 그림으로 본’ 연작 시리즈의 완결편으로 총 세 권으로 구성됐다. 직접 가볼 수 없는 금강산과 관동팔경 등 명승지가 많은 강원도의 옛 그림들을 각각 한 권의 책에 담았고, 나머지 지역인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지역의 옛 그림들을 모아 별도 한 권으로 구성했다.
1520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 독자들을 압도하지만 큰 부담을 갖지 않아도 된다. 1000개가 넘는 옛 그림들이 향연을 펼치며 즐거움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또 저자가 마치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해설사가 해설해주듯 그림의 시대적 배경부터 화가 이야기, 그때 그 시절 사람들의 생활상까지 들려주니, 마치 옛사람들과 함께 그 시대 그곳을 유람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이 책의 큰 장점은 다채로움이다. 같은 화가가 같은 장소에 가서 그린 그림이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림 속 풍광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발견할 수 있고, 특정 화가의 화풍 변화도 관찰할 수 있다. 또 같은 풍경을 서로 다른 화가가 어떻게 달리 그렸는지 비교해볼 수도 있다. 예컨대 저자는 1711년 정선이 처음 금강산 유람에 나서 그린 ‘총석정’과 1788년 단원 김홍도가 그린 ‘총석정’을 보여주면서 그림에 대해 해설해주는데, 이런 부분에서 그림에 대해 잘 모르는 독자들도 그림을 어떻게 보고 읽는지 배울 수 있다.
책은 김금원의 ‘호동서락기’, 이중환의 ‘택리지’, 정철의 ‘관동별곡’ 등과 같은 고전 속에서 특정 장소를 어떻게 다뤘는지 전해주는데, 그 내용이 풍성하다. 또 정선이나 김홍도처럼 잘 알려진 화가 외에도 일반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화가들의 생애와 작품까지 다뤄 독자의 시야를 넓혀준다. 저자는 “아름다움은 한 가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종류가 많은데, 미술 세계도 그렇다”며 “사람들이 명품, 명작, 거장에만 관심 갖는데, 다채로운 아름다움을 알아가면 좋겠다”고 말했다.
고문헌을 찾아 읽고, 그림들을 직접 보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중간에 그만두고 싶거나 포기하고 싶은 적이 없었냐”는 물음에, 저자는 “한 번도 없었다”고 단호하게 답했다. 도리어 “너무 힘들 때 그림을 보러 가면 행복해졌다. 마치 힘들 때 커피 한잔 마시면 기운이 나는 것처럼 커피 마시듯 그림을 보러 다녔다”고 말했다. 그에게 그림을 보고 읽는 일은 즐거움 그 자체였고, 이 책은 그림에 푹 빠진 한 연구자의 가장 행복하고 즐거웠던 순간들의 결정체인 셈이다.
그렇다고 책이 마냥 쉽게 쓰인 것은 아니다. 광주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저자에게 광주천과 무등산, 5·18 민중항쟁은 학문의 근간이 됐다. 그는 무등산 옛 그림을 찾고 싶었지만 쉽게 발견할 수 없었다. 우연한 기회에 지도를 보다 무등산 그림을 찾았는데, 무등산도가 지도로 분류되어 있었다. 뒤늦게 작자 미상인 ‘무등산도’를 구해 광주 이야기와 함께 무등산도도 이번 책에 담았다. 발품과 정성 없이는 불가능한 작업이었다.
30년 동안 실경화의 숲을 거닐었던 그가 꼽는 최고의 실경화는 무엇이고 ‘최애 화가’는 누구일까. “김윤겸이 그린 ‘월연’, ‘극락암’ 같은 그림 한번 보세요. ‘태종대’ 같은 그림도요. 이 사람은 욕심이 없어요. 화폭의 50%를 비워둬요. 먹이나 채색을 연하고 부드럽게 하지만 그렇다고 힘이 없는 것은 아니에요. 그 기운이 담겨 있죠. 이분은 천재예요. 그런데 아무도 몰라요.”
“싸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한다”는 그는 최근 승경지를 가보면 주차장이 너무 넓고 길을 너무 잘 내놓은 것이 불편하기만 하다. “스스로 그러한 자연을 인간이 무한대로 침탈하고 있는 모습”이라고 그는 본다. “제가 쓴 책의 대부분 그림을 보면 그림을 그리는 이가 자연을 중심으로 그림을 그립니다. 자연을 지배하는 관점으로 그리지 않지요.” 저자는 독자들이 이 책을 읽으면서 ‘자연 중심주의’적인 관점을 회복하길 바란다. 저자는 또 그림은 잘 보고 “잘 읽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런 그에게 그림을 보고 읽는 즐거움을 모르는 이들에게 그림 즐기는 방법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하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그림이 어렵다면 ‘(그 생각) 그냥 놔둬버려라’라고 말하고 싶어요. 지식을 요구한다는 강박을 버리라는 얘기입니다. 그림은 내 눈앞에 펼쳐지는 만큼만 봐도 괜찮아요. 지나가다 꽃을 보면 우리는 ‘예쁘다’고 말하고 강아지를 보면 ‘귀엽다’고 말하지요. 선입견이 없는 것이죠. 그림도 마찬가지입니다. 있는 그대로 내 마음을 열고 꽃이나 강아지 보듯이 편하게 보면 됩니다. 그다음은 읽기인데요, 조선의 그림은 작아요. 세필로 그린 데다 자신이 자연의 일부라고 생각해서 사물도 사람도 작게 그렸지요. 그래서 돋보기로 확대해서 보듯 꼼꼼히 읽으면 좋습니다. 뭘 보든 자기 생각대로 해석해도 됩니다. 그러다 보면 내 생각은 이런데 전문가들은 뭐라고 말하나 궁금해져요. 그렇게 그림을 보는 즐거움을 알아가는 것이죠.”
양선아 기자 anmad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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