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1만명이 서명했던, 올바름 향한 공론의 힘

김규남 기자 2024. 5. 24.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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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6년 사도세자의 아들 이산이 왕이 됐다.

훗날 정조로 불린 그의 즉위는 사도세자 죽음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한 노론에게 위협이었다.

노론의 권세 속에서 참고 힘을 키워오던 정조는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을 말하는 영남 유생들의 상소를 들으며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흘렸다.

5월 초, 그동안 금기시됐던 사도세자 신원을 더욱 강경하게 주장하는 2차 만인소가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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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 선비들, 정조를 울리다
1792년 만인소운동
이상호 지음 l 푸른역사 l 1만6500원

1776년 사도세자의 아들 이산이 왕이 됐다. 훗날 정조로 불린 그의 즉위는 사도세자 죽음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한 노론에게 위협이었다. 반면, 영남 남인에게는 기회로 작용했다. 1792년 3월 정조는 영남 인재만을 대상으로 한 등용 시험인 도산별과를 시행했다. 영남 남인을 정치적 동반자로 삼고, 노론에 대해서는 세게 견제하겠다는 의미였다.

한 달 뒤, 사간원 언관인 류성한이 정조가 경연 참석을 잘 하지 않는다는 등의 비판 상소를 올렸다. 왕이 사도세자를 생각하느라 경연을 소홀히 한다는, 왕을 겨냥한 공격으로 해석됐다. 류성한에 대한 탄핵 여론이 형성됐고, 이는 상소에 연명한 유생 수가 처음으로 1만명이 넘는 첫 만인소운동으로 파급됐다. 노론의 권세 속에서 참고 힘을 키워오던 정조는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을 말하는 영남 유생들의 상소를 들으며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흘렸다. 5월 초, 그동안 금기시됐던 사도세자 신원을 더욱 강경하게 주장하는 2차 만인소가 올라왔다. 1차(1만57명) 때보다 329명 늘어난 1만386명이 연명했다. 그러나 왕은 “감히 하지 못하는 것도 있고, 차마 할 수 없는 것도 있다”고 답했다. 결국 3차 상소를 준비하던 유생들이 정조의 설득으로 귀향하면서 첫 만인소운동은 막을 내렸다.

이후 만인소운동은 서얼차별철폐(1823년), 서원철폐 반대(1871년), 척사(서구세력 척결·1881년) 등으로 이어졌다. 지은이는 “만인소운동은 구체적인 정책 변화를 촉구했던 운동”이라며 “올바름을 향한 공론의 힘을 신뢰하고 이를 실천에 옮겼던 이들의 노력이 역사의 전환점마다 다양한 형식으로 드러났다”고 말한다.

김규남 기자 3string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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