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시대적 교리에 갇힌 ‘철학자 예수’ 구출하기 [책&생각]
아렌트‧데리다 통해 예수 새로 읽기
신의 나라는 차별‧편견 없는 나라
사랑‧용서‧환대‧정의 패러독스 사유
철학자 예수
종교로부터 예수 구하기
강남순 지음 l 행성B l 2만원
강남순(미국 텍사스크리스천대학교 브라이트신학대학원 교수)은 한국 교회의 성차별주의 벽에 부닥쳐 한국을 떠난 뒤 2006년부터 미국에서 ‘펜을 저항과 변혁의 무기로 삼아’ 활동하고 있는 여성 신학자다. ‘철학자 예수’는 기독교, 특히 한국 기독교의 반시대적 교리가 예수를 배반했다고 비판하고, 사랑‧용서‧환대‧정의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새로운 눈으로 읽어냄으로써 낡은 교리의 감옥에서 예수를 구출하려는 작업이다.
이 책에서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낯설게 하기’ 기법이다. 예수를 철학자라고 부르는 것부터가 구세주‧메시아라는 고정된 이미지를 깨고 예수를 새로이 발견하려는 의도를 품고 있다. 그런 차원에서 이 책은 예수를 소크라테스와 비교하는데, 지은이가 특히 주목하는 것이 그 두 사람이 ‘묻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이다. 소크라테스가 물음을 던져 무지를 일깨웠듯이 예수도 지치지 않고 질문했다. 신학자 마틴 코펜하버가 계산한 바로는 복음서의 예수는 모두 307번의 질문을 했고, 183번의 질문을 받았으며, 이 183번의 질문 가운데 답변한 것은 3번뿐이었다. 기독교인들은 흔히 예수가 ‘답’이라고 말하는데, 지은이가 보기에는 예수야말로 ‘질문’이다. 예수는 무수한 질문으로 지혜를 찾은 사람, 그래서 철학자 곧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불러 마땅하다. 예수는 소크라테스처럼 ‘거리의 철학자’였다.
이 거리의 철학자가 벌인 운동을 간략히 ‘복음 운동’이라고 부를 수 있다. 복음 곧 ‘좋은 소식’이란 ‘신의 나라’가 오리라는 소식이다. 이때의 신의 나라는 모든 사람이 출신‧인종‧성별‧종교‧계층‧장애‧국적과 무관하게 온전한 사람으로 대우받는 정의의 세계다. 예수가 말한 신의 나라는 ‘아직 오직 않은 세계’, 그래서 ‘도래할 세계’에 대한 메타포다. 지은이는 자크 데리다, 존 카푸토, 한나 아렌트를 사유의 동반자로 삼아 그 메타포를 해석해 나간다.
예수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줄이면 ‘사랑’이다. 예수는 말한다. “나는 여러분에게 새로운 계명을 전하고자 합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여기에 나타난 대로 예수는 ‘서로 사랑하는 것’, 다시 말해 이웃 사랑을 ‘새로운 계명’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웃 사랑의 계명은 구약성서 ‘레위기’에도 나온다. “당신 자신을 사랑하듯 당신의 이웃을 사랑하십시오.” 그렇다면 어떤 이유로 예수의 이웃 사랑을 ‘새로운 계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지은이는 ‘이웃’의 범주가 달라졌음에 주목한다. 구약은 유대인 안에 머물러 있지만, 예수는 유대인이라는 울타리를 치워버렸다. 그 사태를 보여주는 극명한 사례가 ‘선한 사마리아인’이다. 유대인들이 적대시한 사마리아인을 등장시켜 참된 사랑의 표본으로 삼은 데서 예수의 사랑이 경계를 넘어선 사랑이었음을 알아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예수의 사랑은 ‘이웃’도 넘어선다. 예수는 “만약 당신이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반문하며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원수까지 사랑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도달하기 힘든 경지다. 예수는 원수 사랑을 새 계명으로 제시함으로써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은 얼마나 충실한 것인가’를 묻는다. 여기서 지은이는 아우구스티누스가 ‘나는 신을 사랑하는가’라는 물음을 ‘내가 나의 신을 사랑할 때 무엇을 사랑하는가’라는 물음으로 바꾸었음을 상기시킨다. 기독교인은 신을 사랑한다고 쉽게 말하지만, 그 사랑은 우리가 품은 사랑의 크기를 넘어서지 못한다. 그러므로 신을 사랑한다는 말이 빈말이 되지 않으려면 아우구스티누처럼 구체적이고 절실하게 물어야 한다. 더 나아가 신학자 카푸토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물음을 바꾸어 ‘신을 사랑할 때 나는 어떻게 사랑하는가’라고 묻는데, 카푸토의 물음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물음을 더 구체화함으로써 내 사랑의 한계를 더 명확히 보게 해준다.
예수의 또 다른 가르침은 ‘용서’다. 사랑은 용서에서 출발한다. 예수는 복음서에서 용서를 여러 차례 이야기하는데, 그때마다 “당신의 죄가 용서받았습니다”라고 수동태로 이야기한다. 왜 “나는 당신의 죄를 용서합니다”라고 능동태로 말하지 않고 수동태로 말하는가? 지은이는 능동태로 말하는 순간, 용서하는 사람과 용서받는 사람 사이에 윤리적 위계가 정해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예수는 용서하는 사람이 높아지고 용서받는 사람이 낮아지는 그런 위계를 거부했다.
이 대목에서 지은이는 아렌트와 데리다의 용서관을 비교한다. 아렌트는 나사렛 예수야말로 “인간사의 영역에서 용서의 역할을 발견한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아렌트가 주목하는 것은 예수가 말한 ‘새로 태어남’(거듭남)이다. 인간은 새로 태어날 수 있기에 과거와 결별하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 용서는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는 인간의 능력이다. 그러나 아렌트의 용서에는 가해자가 잘못을 인정하고 참회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있다. 아렌트가 주목하는 용서는 사회정치적 영역의 용서다.
반면에 데리다에게 용서는 전제조건이 달리지 않는다. 데리다는 “용서란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라는 모순어법으로 용서의 패러독스를 이야기한다. 그 패러독스는 데리다가 ‘자기 용서’를 이야기할 때 더 분명해진다. “한편으로 나는 언제나 나를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나는 나를 결코 용서할 수 없다.” 데리다의 용서는 인간의 유한성을 바탕에 깔고 있다. 유한자인 인간은 자기를 용서할 수밖에 없지만, 근원적으로 보면 그 용서는 완전한 것이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데리다는 타인의 잘못에 대한 조건 없는 용서를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그 용서가 불가능한 것임을 이야기한다. 인간은 언제까지나 절대적 용서를 향해 나아가는 도상에 있을 뿐이다. 인간으로서 우리의 용서는 아렌트의 용서와 데리다의 용서를 아우르는 곳에 있을 것이라고 지은이는 말한다.
분명한 것은 예수가 가르친 용서가 자기를 죽이는 자들까지 용서하는 무조건적 용서라는 사실이다. 예수와 만날 때 우리가 상기해야 하는 것이 이 무조건성의 명령이다. 신앙은 가능한 것을 따르는 평온이 아니라 불가능한 것을 갈망하는 열정이라고 지은이는 말한다. 그 열정 속에서 우리는 우리를 가두는 편견의 울타리를 넘어 멀리 갈 수 있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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