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했어도 ‘혼인 무효’ 가능”… 대법원, 40년만에 판례 변경
이미 이혼했더라도 ‘합의 없는 결혼’ 등의 특별한 사정이 있었다면 혼인 자체를 무효로 할 수 있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이혼한 부부의 혼인 무효를 인정하지 않았던 판례를 40년 만에 바꾼 것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노태악 대법관)는 23일 김모 씨가 전남편 서모 씨를 상대로 낸 혼인 무효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대법원장과 대법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원심 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가정법원(1심)으로 돌려보냈다. 이에 따라 법원은 이들이 혼인을 실제 합의했는지 등을 심리하고 혼인 무효 여부를 판결해야 한다.
원고 김 씨는 2001년 서 씨와 결혼해 2004년 이혼했다. 2019년 김 씨는 “극도의 혼란과 불안, 강박 상태에서 혼인에 관한 실질적 합의 없이 혼인신고를 했다”면서 혼인 무효 소송을 냈다. 민법 815조는 당사자가 합의하지 않았을 경우 혼인을 무효로 할 수 있다고 정하고 있다.
그러나 1심은 각하 판결을 내렸고, 2심은 김 씨의 항소를 기각했다. 대법원이 이혼한 부부의 경우 이미 혼인 관계가 사라져 실익이 없다는 이유로 혼인 무효를 인정하지 않는 판결을 1984년 내렸고, 판례가 유지돼 왔기 때문이다.
‘부모 강요에 결혼후 이혼’ 기록 없애고… 가출한 외국인 아내와 혼인무효도 가능
이혼부부 ‘혼인무효’ 인정
‘이혼 미혼모’ 혜택 받을 길도 열려
이날 전원합의체(전합)는 이혼과 혼인 무효는 법적 효과가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이혼 후 혼인 무효’도 실익이 있다고 보고 40년 만에 판례를 변경했다. 이혼했으니 무조건 각하할 것이 아니라, 법원이 각 사건의 사실관계를 판단해 혼인 무효 사유가 있는지 따져서 판결하라는 취지다.
● ‘이혼 미혼모’도 혜택 받을 길 열려
대법원 판결에 따라 부모 등 타인의 강요·협박 등으로 원하지 않는 결혼을 했다가 이혼한 부부들은 혼인 무효 소송을 통해 가족관계등록부에서 혼인 기록을 삭제할 수 있게 됐다. 외국인 배우자가 혼인신고 후 가출해 이혼한 부부도 혼인 무효 여부를 다툴 수 있다.
또 이혼한 배우자가 결혼 중 절도, 횡령, 사기 등 재산 범죄를 상대 배우자에게 저질렀을 경우 지금까지는 형법상 ‘친족상도례’ 조항에 따라 형사 책임을 물을 수 없었지만, 앞으로는 혼인 무효 시 처벌할 수 있다. 혼인이 무효가 되면 인척이거나 인척이었던 사람과의 결혼을 금지한 민법 조항도 적용되지 않는다.
김 씨는 소송을 제기하면서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의 미혼모 가족 지원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김 씨가 혼인 무효 판결을 받으면 정부와 지자체의 지원을 받게 될 가능성도 있다. 양소영 법무법인 숭인 변호사는 “혼인 무효 사유가 있음에도 이혼했다는 이유로 인정받지 못해 불합리한 상황들을 겪는 사람들에 대한 ‘권리 구제의 폭’이 상당히 넓어지게 될 것”이라고 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이혼 건수는 9만2000건이다.
● ‘재판 지연 해소’ 의지 반영
조희대 대법원장이 지난해 12월 취임한 이후 전합 선고는 23일이 처음이다. 올 3월 초 엄상필 신숙희 대법관 취임으로 대법관 공백이 해소된 후로는 2개월 반 만이다. 이날 선고가 이뤄진 배경에는 조 대법원장의 ‘재판 지연 해소’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전해졌다.
전합 선고는 김명수 전 대법원장이 퇴임 3일 전인 지난해 9월 21일을 마지막으로 8개월간 이뤄지지 않았다. 후임 대법원장 임명이 늦어지고, 민유숙 안철상 전 대법관의 퇴임으로 공백이 생겼기 때문이다. 전합에는 대법원장과 대법관 12명(법원행정처장 제외)이 참여한다.
대법원 관계자는 “대법원도 재판 지연 해소에 앞장서자는 취지에서 적극적으로 심리에 나섰고, 합의가 이뤄진 사건은 빠르게 선고하자는 방침이 반영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합이 이날 선고한 3건 중 2건에서 전원일치 판결이 내려졌다. 특히 혼인 무효 사건은 전합 구도가 중도·보수(8명) 우위 구도로 재편된 가운데 40년 만에 판례가 변경됐다. 법조계에선 변화하는 시대상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겠다는 ‘조희대 전합’의 방향성이 드러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한 고법 부장판사는 “대법관 지형의 변화와 관계없이 시대 흐름에 따라가지 못해 변경이 필요한 판례는 적극적으로 판단하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부분”이라고 말했다.
장은지 기자 jej@donga.com
김자현 기자 zion37@donga.com
최미송 기자 cm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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