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영의 정상에서 쓴 편지] 14. 공작산 약수봉: 4월 초파일 불심으로 오른 산

장보영 2024. 5. 24.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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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천하 유아독존…진흙 속 연꽃처럼 고통 이겨내길”
봄 지나 푸르름 가득 ‘부처님 오신 날’
홍천 천년고찰 ‘수타사’ 인산인해
대웅전 앞 오색찬란 연등 행렬
공작산 약수봉 노송·기암절벽 장관
어둠 속 등불처럼 평온한 삶 향해
부처님 말씀 되새기며 한걸음
▲ 음력 4월 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의 수타사 풍경.

초여름의 산은 앳된 녹음으로 산뜻합니다. 갈잎 다 떨구고 한껏 메말라 있던 나무는 어느 틈에 가지마다 싱그러운 새 생명을 피워냈는지요. 분명 모든 일은 사람들이 까무룩 잠들었을 한밤에 일어났을 것입니다. 온 천하가 푸르름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먼 산을 바라보고 있으면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도둑처럼 일어난 일들 앞에서 새삼스레 깨닫게 되는 것은 세월의 무상함입니다. 봄은 온전히 느낄 겨를도 없이 이미 다 지나가 버렸습니다.

매해 4월 초파일은 ‘부처님 오신 날’입니다. 초파일(初八日)이란 부처가 태어난 BC 624년 4월 8일(음력)을 일컫는 날입니다.

부처는 인도 북부와 네팔 남부의 국경 지대인 히말라야 산맥 카필라 왕국의 왕 슈도다나(Suddhodana)와 마야(Maya)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석가, 석존, 부처님으로 존칭하지만 부처의 이름은 고타마 싯다르타(Gautama Siddhartha)입니다. 그리고 먼 훗날 깨달음을 얻어 붓다(Buddha)라고 불리게 됐습니다.

이즈음의 산사는 불심 깊은 불자들의 발걸음으로 부산합니다. 대웅전 앞마당은 소원을 담은 연등으로 오색찬란하고요.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연등을 바라보고 있으면 삶에 대한 인간의 극진한 정성이 느껴집니다. 어둠을 밝히는 저 등불처럼 나도 당신도 세상사 모든 고통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환하게 빛났으면 좋겠습니다. 연꽃을 닮은 저 등불처럼 그윽한 아름다움 안에서 안온하게 이번 생을 살아간다면 더할 나위 없겠습니다. 산다는 것은 결국 이렇게 바라고 바라는 일의 연속이 아닐까 싶습니다.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모처럼 수타사로 향합니다. 수타사는 홍천 동면에 자리한 천년고찰입니다. 통일신라 제33대 성덕왕 7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하며 보물 동종과 월인석보를 비롯해 월인석보, 대적광전, 후불탱화, 홍우당부도, 삼층석탑, 범종 등 수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지요. 수타사는 본래 일월사(日月寺)였으나 절 옆에 커다란 계곡이 흘러 수타사(水墮寺)로 개칭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후 승려들이 절 뒤의 깊은 못에 빠져 죽는 일이 일어나 수타사의 한자를 목숨 ‘수(壽)’ 자에 비탈질 ‘타(陀)’ 자로 바꾸게 됐다네요.

▲ 수타사 계곡. 물을 거슬러 오르면 용담, 귕소 등 홍천강의 명소에 닿을 수 있다.

부처님 오신 날에 방문한 수타사는 일주문부터 인산인해입니다. 찾아오는 누구에게나 조건 없이 열려 있는 날인 만큼 오늘 하루 이 절을 찾은 모두가 부처님의 가피(加被)로 화기애애합니다. 특히 점심에 무상으로 제공하는 비빔밥 공양은 둘이 먹다가 하나가 사라져도 모를 맛입니다. 여느 식당에서나 흔히 먹을 수 있는 음식이지만 부처님 오신 날 절에서 먹는 비빔밥은 특별합니다. 길게 늘어선 줄을 기다려 마침내 따뜻한 비빔밥 한 그릇을 두 손으로 받습니다. 어려운 일도 아닌데 이 앞에 앉기까지 참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오후의 음악회가 열리는 산사를 뒤로하고 약수봉으로 향합니다. 약수봉은 천년고찰 수타사를 포근하게 감싸고 있는 산입니다. 해발 558m로 아주 높지는 않지만 수백 년 역사의 노송과 크고 작은 기암절벽 등이 장쾌한 볼거리를 자랑하지요. 약수봉은 한국 100대 명산인 해발 887m 공작산에 속해 있습니다. 공작산과 약수봉의 거리는 약 4㎞. 공작산의 산형이 마치 공작이 날아가는 것 같아 공작산이라 불리니 공작산의 서쪽에 솟은 약수봉은 공작산의 한쪽 날개쯤 되겠습니다.

약수봉 등산로는 수타사 계곡을 오른쪽에 두고 200m쯤 산자락을 따라 걷다 보면 이어집니다. 산길은 이내 두 갈래로 나뉘는데 왼쪽 길은 가파른 된비알을 치고 올라 능선에 붙는 길이고 오른쪽 길은 용담과 귕소를 지나 정상으로 오르는 길입니다. 하지만 한 바퀴 원점회귀를 할 수 있기에 어느 쪽으로 올라도 좋습니다. 귕소는 약수봉과 수타사가 품은 명소입니다. 귕이란 아름드리 통나무를 파서 만든 소여물 통을 말합니다. 계곡을 따라 펼쳐진 바위가 세찬 물살의 영향을 받고 마치 귕처럼 파여 있어 붙은 이름입니다.

물길을 따라 걷다가는 물에 취해 갈 바를 잃고 비척거릴 것만 같아 빠르게 산길에 붙습니다. 초반부터 이마 위로 비지땀이 맺힙니다. 멀어져가는 산사에서 울려 퍼지는 음악 소리와 박수 소리가 마치 전생의 꿈처럼 아득합니다. 조금 전까지 저 안에 속해 사람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부대끼던 일도 오랜 추억만 같습니다. 고요한 산속에 있다 보면 부쩍 그런 느낌이 듭니다. 산세가 깊어질수록 문명의 흔적은 서서히 희미해지고 어느 순간 모든 것은 돌연 자취를 감춥니다.

태양 아래 쨍하게 눈부시던 사방이 정오로 넘어가면서 조금씩 흐려집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오후에 비가 내린다는 일기 예보를 그만 잊고 있었습니다. 서둘렀어야 했는데 산 아래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거웠습니다. 세기말을 연상케 하는 어두컴컴한 하늘 아래 아무도 없는 산길을 오르는 동안 두려움이 자라납니다. 제아무리 여유를 다짐해도 몰려오는 회색빛 구름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다급해집니다. 정상까지 겨우 2㎞밖에 되지 않는데 마치 억겁의 시간이 흐른 것 같습니다.

산 도처에 효험 좋은 약수가 많이 흘러 약수봉이거늘 수풀 가득한 산속에서 흐르는 물길을 찾기란 요원합니다. 서릉 삼거리에서 문수암골 방면으로 조금만 내려서면 동굴약수라고 하지만 다음을 기약하고 정상으로 향합니다. 514봉을 지나 약수봉에 도착한 시간은 4시, 하늘에서는 어느덧 예언처럼 세차게 비가 쏟아집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비를 맞을 곳도 산길이지만 이 비를 피할 곳도 산길이라는 것입니다. 점점 거세지는 빗줄기를 피해 울창한 수림 속에 몸을 맡깁니다.

빗속에서 문득 해가 뜨면 뜨는 대로,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흐르며 나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에 대해 생각합니다. 세상 만물을 더하고 빼는 것 없이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면 지옥 같은 모든 고통에서 비로소 벗어날 수 있다는 부처의 설법도 함께요. 그 말은 정령 진실일까요? 우리는 정령 이번 생에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을까요? 속으로 ‘천상천하유아독존’을 외치며 귕소 방면으로 하산합니다. 그 많던 사람은 어디로 다 사라졌는지 산사는 텅 비어 있고 실체 없는 안개만이 두둥실 허공을 떠다닙니다. 작가·에디터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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