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균의 쓰고 달콤한 경제]미국식 자본주의, 버블은 필요악

기자 2024. 5. 23.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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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혁신기업들이 많이 배출되는 이유는 미국 금융시장의 역동성과 무관하지 않다. 금융업의 본질적 기능은 실물경제에 자금을 공급하는 역할인데, 독일과 일본은 은행시스템을 주력으로 한 금융시스템을 유지해왔고, 미국은 자본시장 중심의 금융질서를 발전시켜왔다. 은행시스템과 자본시장에서 발생하는 인센티브는 전혀 다르다.

은행에 의한 자금 공급은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이루어진다. 사업성에 대한 가시적 평가는 물론 담보도 따진다. 당연한 일이다. 대출을 받아간 기업이 크게 성공하더라도 은행은 빌려준 원금과 정해진 이자 외에는 받을 수 없다. 은행에는 기업의 성장성보다는 안정성에 대한 평가가 훨씬 중요하다. 이것저것 재고 따지는 은행원들이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은 불투명한 신성장 산업에 선뜻 돈을 내주기는 어렵다.

반면 자본시장은 주식 발행을 통해 동업자를 모으게 해준다. 확률이 낮더라도 기업이 성공하면 막대한 부를 움켜쥘 수 있기에 기꺼이 자금을 기업에 투입하는 투자자들이 있을 수 있다. 19세기 후반의 혁신기업 ‘에디슨 전기’에는 당시 최대 금융자본이었던 JP모건이 투자했고, 마이크로소프트와 구글, 애플 등 요즘의 혁신기업들에는 미국의 벤처캐피털과 나스닥시장이 든든한 뒷배 노릇을 하고 있다.

다만 미국과 같은 자본시장 중심 모델에서 비롯되는 명확한 비용도 존재한다. 미국식 모델에는 버블이 필요악으로 수반된다. 1990년대 후반 닷컴 버블 국면을 떠올려보자. 당시 투자자들은 앞으로 열릴 인터넷 세상에 열광했다. 투자자들은 꿈꿨다. 인터넷에서 편지도 보내고, 쇼핑도 하고, 엔터테인먼트도 즐기는 세상을. 꿈은 현실이 됐다. 요즘 우리가 그런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새 성장 산업 위해 자금 필요

그렇다고 닷컴 주식에 투자한 이들이 모두 부자가 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많은 이들이 닷컴 버블 국면에서 치명적인 재산상의 손실을 입었다. 투자자들의 비극은 세상의 변화는 올바르게 예측했지만, 당시 주식시장에 상장돼 있던 기업들이 변화된 세상의 주역이 아니었다는 데에 있다. 당시 투자자들은 야후와 엠파스, 라이코스 등이 인터넷 생태계의 지배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최종적인 승자는 구글이었다. 닷컴 버블 당시 구글은 주식시장에 상장돼 있지도 않았다. 닷컴 버블 국면에서 미래의 주역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모았던 많은 회사들은 파산했거나, 설사 살아 있더라도 존재감이 미미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투자자들이 아주 똑똑해 장기적으로 살아남아 향후 산업 생태계를 바꿀 기업에만 자금이 흘러 들어갈 수 있으면 좋겠지만, 이는 가능하지 않다. 특정 기업이 궁극적으로 경쟁에서 승리했더라도, 그 기업이 꼭 성공에 이르러야 할 필연의 법칙이 작동했던 것은 아니다. 경쟁자들의 실수에서 반사이익을 얻었을 수도 있고, 예기치 못한 지정학적 질서의 변화에서 기회를 잡았을 수도 있고, 합리성으로 설명하기 힘든 운이라는 요인도 무시하기 어렵다. 인터넷 생태계의 지배적 사업자가 된 기업은 구글이지만, 이는 결과론일 따름이다.

자본시장 중심의 모델에서 새로운 성장 산업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 산업 전반으로 자금이 투입돼야 한다. 불확실한 성장 산업으로 투자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극단적 낙관론에 기댄 집단적 열광이 필요하다. 이는 버블이라는 형태로 발현된다. 아무리 주가가 올라가도, ‘이번엔 다르다’라는 스토리가 투자자들을 현혹한다. 특정 산업으로 막대한 자금이 투자된다. 이때 자본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한 기업들의 상당수는 대체로 도태되지만, 살아남은 소수의 기업이 생태계를 만들어 나가게 된다.

투자자들은 엄격한 기준으로 ‘최후의 승자’를 선별하려고 노력하지만, 그 판단은 대개 틀리는 경우가 많다. 벤처기업의 성공 확률은 10% 미만이라고 하지 않는가. 투자자나 자금을 유치한 기업이나 모두 선의를 가지고 노력하더라도 실패할 확률이 훨씬 높은 게임이다. 결국 10% 미만의 기업만이 성공해 세상을 바꾸게 된다. 구글도 초창기에는 다른 많은 스타트업들과 비슷했을 것이다. 닷컴 붐이 일지 않았다면 구글도 생존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받지 못했을 수 있다. 구글이라는 신생기업이 성장을 위한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던 데는 집단적 낙관의 산물인 버블이 기여한 바가 크다고 봐야 할 것이다.

‘버블’ 미래 기대주가 과잉 반영

어떤 버블이든 열광이 지나간 이후에는 상처가 남게 마련이지만, 그래도 기술 버블은 상대적으로 후유증이 작다. 뭔가 긍정적인 유산이 남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1990년대 후반 닷컴 버블 국면에서 한국의 코스닥시장도 뜨겁게 달아올랐다. 닷컴 버블이 정점에 달했던 2000년 3월 코스닥시장의 시가총액 최상위 15개 기업 중 현재까지 생존해 있는 기업은 7개에 불과하다. 상당수의 기업이 파산했지만, 그래도 인터넷 전용선은 남아 이후 ‘IT강국 코리아’의 초석이 됐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소위 ‘4차 산업혁명’ 혹은 ‘AI’ 열풍도 과거 닷컴 버블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버블은 상처를 남긴다. 그 기업이 궁극적으로 살아남은 기업일지라도 마찬가지이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위대한 기업이다. 20여년 전 닷컴 버블 국면에서도 전 세계 시가총액 1위 자리에 올랐고, 지금도 시가총액 1위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마이크로소프트의 영광이 단선적인 경로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닷컴 버블 붕괴 국면에서 마이크로소프트 주가는 일시적으로 60%가 넘게 급락했다. 더 중요한 것은 가격 조정 이후 8년 동안 횡보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버블이 붕괴될 때 부실한 기업은 파산하고, 우량한 기업은 살아남지만 주가는 일시적 급락 이후 장기간 소외기를 거치는 경우가 많다. 버블은 미래에 대한 기대를 주가에 과잉 반영하기 때문이다.

투자자에게 ‘버블은 필요악’이라는 관점은 매우 중요하다. 자신의 투자가 의도와는 무관하게 새로운 성장 산업의 동력이 될 수도 있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의 재산이 불쏘시개로 타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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